《晉紀1 武帝 泰始 9年》 (癸酉, 273) ⑥. 처음에, 등애가 죽자 사람들은 모두 그를 억울하게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아무도 그를 위하여 변명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황제가 즉위하기에 이르자 의랑인 돈황 사람 단작이 상소를 올렸다. ⑥. 初,鄧艾之死,〈事見七十八卷魏元帝咸熙元年。〉人皆冤之,而朝廷無爲之辨者。〈爲,于僞翻。〉及帝卽位,議郎敦煌段灼上疏曰:〈敦,徒門翻。〉 "등애는 마음에 지극한 충성심을 품고 있었는데, 반역이라는 이름을 짊어졌습니다. 巴· 蜀을 평정하고서도 삼족이 족멸되는 형벌을 받앗는데, 등애는 성격이 강하고 급하며 공로를 자랑하고 자기의 좋은 점을 나타내려고 하며 친구들과 협동할 수 없었으니 그러므로 그에 관하여 제대로 처리하려고 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鄧艾心懷至忠而荷反逆之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