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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大艦,長百二十步(174.24m)/立秋節仲候白露降3日(음6/25)己丑

solpee 2020. 8. 13. 05:40

《晉紀1 武 泰始 8 (壬辰, 272)

 

 

 ⑤. 왕준에게 조서를 내려서 둔전군을 철폐하고 주함을 대대작으로 제작하게 하였다. 별가 하반이 생각하였다.

 "둔전병은 불과 500~600명뿐이니 갑작스럽게 배 만드는 일을 할 수 없고, 뒤에 만드는 배가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앞서 만들었던 것은 이미 썩어버릴 것입니다. 마땅히 여러 군의 병사들을 소집하여 도합 1만여 명으로 그것을 만들게 한다면 연말이면 다 완성시킬 수가 있습니다.

 왕준이 먼저 상황을 알리고 회보를 기다리려고 하였는데 하반이 말하였다.

 ⑤. 夏,詔濬罷屯田軍,大作舟艦。〈艦,戶黯翻。〉別駕何攀以爲「屯田兵不過五六百人,作船不能猝辦,後者未成,前者已腐。宜召諸郡兵合萬餘人造之,歲終可成。」濬欲先上須報,〈上,時掌翻。〉攀曰:

 

 "조정에서 갑자기 1만 명을 소집한다는 보고를 받는다면 반드시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자적으로 소집하여 만들다가 만약에 이것이 각하되더라도 일은 이미 이루고 있게 하여 형세로 보아 중지할 수 없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왕준이 이를 좇아서 하반으로 하여금 주함을 만드는 도구들을 관리하게 하였다. 이에 큰 배를 만들었는데, 배의 길이가 120보(1步6尺×1尺24.2cm×120=174.24m)이고 2천여 명을 태울 수 있으며, 배에는 나무로 성을 만들고 망루를 만들어 놓고 사방의 성문을 열어놓으면 그 위에 말을 달리며 왕래할 수 있었다.

 「朝廷猝聞召萬兵,必不聽;不如輒召,輒,專也。設當見卻,功夫已成,勢不得止。」濬從之,令攀典造舟艦器仗。於是作大艦,長百二十步,長,直亮翻。受二千餘人,以木爲城,起樓櫓,開四出門,其上皆得馳馬往來。《考異》曰:《華陽國志》云:「咸寧二年三月,濬受詔作船。」按濬《表》云「作船七年」,則《國志》不可據也。

 

그때 배를 만드는 나무 부스러기가 강을 덮으면서 내려갔는데 오의 건평 태수인 오군 사람 오언이 흘러가는 나무 부스러기를 부워서 오 황제에게 보고하며 말하였다.

 "진은 반드시 우리 오를 공격할 계획을 갖고 있으니 의당 건평에 군사를 늘리시어 그 요충지를 막게 하여야 합니다."

 오황은 따르지 않았다. 이에 오언은 마침내 쇠사슬을 강에 가로질러 설치하여 강의 뱃길을 차단하였다.

 時作船木柹,蔽江而下,柹,芳廢翻。《說文》曰:削木札樸也。字本作「柿」,詳見《辨誤》。吳建平太守吳郡吾彥建平郡,漢南郡之巫縣,吳主權分置宜都郡;吳主休永安三年,分宜都立建平郡,領信陵、興山、秭歸、沙渠四縣。杜佑曰:建平今巴東郡,吳置建平郡於秭歸。《姓譜》:吾,本己姓,夏昆吾氏之後。取流柹以白吳主曰:「晉必有攻吳之計,宜增建平兵以塞其衝要。」塞,悉則翻。吳主不從。彥乃爲鐵鎖橫斷江路。斷,丁管翻。爲後王濬燒斷鐵鎖張本。

 

 왕준은 비록 중앙의 명 령을 받아서 병사를 모집하였으나, 호부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광한 태수인 돈황 사람 장효가 왕준의 종사관을 잡아들여서 그 죄를 열거하여 상부에 보고하였다. 황제가 장효를 불러서 돌려보내며 나무랐다.

 "어찌 보고하지 않고 비밀리에 바로 종사관을 잡아들인단 말이오?"

 장효가 말하였다.

 "촉·한은 먼 지역 입니다. 유비도 일찍이 이 방법을 채용하였기에 바로 잡아들인 것입니다. 신이 오히려 너무 가볍게 처리하였습니다." 황제는 그가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王濬雖受中制募兵,而無虎符;廣漢太守敦煌張斅收濬從事列上。敦,徒門翻。斅,胡敎翻。上,時掌翻。帝召斅還,責曰:「何不密啓而便收從事?」斅曰:「蜀、漢絕遠,劉備嘗用之矣。輒收,臣猶以爲輕。」帝善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