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槿堂體本(5/2)/壬寅穀雨末候戴勝降於桑桐花風3日(陰4/2)乙卯.

solpee 2022. 5. 2. 13:36

槿堂體本(5/2)

☞. 生蟲蛆一爲公與相潭潭府中居問之何《勸學文·淸嵐 柳錫用》因爾學與不學歟金璧雖重寶費用難貯

木之就規矩在梓匠輪輿人之能爲人由腹有詩書詩書勤乃有不勤腹空虛欲知學之力賢愚同一初由其不能學所
入遂異閭兩家各生子提孩巧相如少長聚嬉戱不殊同隊魚年至十二三頭角稍相疏二十漸乖張淸溝映汚渠三十
骨格成乃一龍一猪飛黃騰踏去不能顧蟾蜍一爲馬前卒鞭背生蟲蛆一爲公與相潭潭府中居問之何因爾學與不
學歟金璧雖重寶費用難貯儲學問藏之身身在則有餘君子與小人不繫父母且不見公與相起身自犁鋤不見三公
後寒饑出無驢文章豈不貴經訓乃菑畬潢潦無根源朝滿夕已除人不通古今馬牛而襟裾行身陷不義況望多名譽
時秋積雨霽新凉入郊墟燈火稍可親簡編可卷舒豈不旦夕念爲爾惜居諸恩義有相奪作詩勸躊躇
大正丁巳孟秋爲 惜堂先生囑 漢陽七十三翁 淸嵐 柳錫用 欽書

 나무가 각재나 원형이 되는 것은 목수에게 달려 있고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머리에 시서가 들어서이다. 학문은 부지런하면 얻게 되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텅 비게 된다. 학문의 힘을 알아보면, 어려서는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가 다르지 않다. 배우지 못한다면 마침내 들어가는 문이 다르기 때문이지, 예를 들면 두 집에 각각 아들을 둔 경우에 안아주고 어를 때는 묘하게도 서로 같았고 좀 커서 함께 놀 때에도 떼 지어 노는 물고기 무리 같이 같았다. 열두서너 살이 되면 두각이 서로 달라지기 시작하고, 스무 살이 되면 점점 벌어져서 맑은 물에 비치고, 더러운 물에 비치는 것 같다. 삼십이면 골격이 다 이루어져서 마침내 한명은 용이고, 다른 한 명은 돼지다. 준마인 황비로 박차 오르며 두꺼비 같은 둔한 말은 돌아도 안 본다. 한 사람은 말 앞의 마부가 되어 등에 채찍 맞아 아물 날이 없고 한 사람은 재상이 되어 크고 넓은 관청에서 일한다. 왜 그럴까? 무슨 이유인가? 배우고 배우지 않은 차이 때문이다. 금과 구슬은 비록 귀중한 보배지만 써버리면 저축하기 어렵다. 학문은 몸에 지니게 되니 몸이 있는 한 남음이 있다.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부모에게 달려 있는 것 아니니 귀한 벼슬에 있는 재상이, 쟁기와 호미로 농사짓는 곳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는가? 삼공의 후손이라도, 춥고 굶주려 외출할 때 나귀도 없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문장이 어찌 귀하지 않은가? 경서의 가르침은 곧 전답과 같은 것이다. 물이 넘쳐나도, 장마 물은 근원이 없으니 아침에 찼다가 저녁에 없어진다. 사람이 고금의 지식에 통달하지 못하면 마소에 옷을 입혀 놓은 것과 같다. 일상생활에서도 불의에 빠지기 쉬운데 하물며 명예가 많기를 바라겠는가? 네가 떠나는 때는 가을이라 장맛비 개고 새로 시원한 바람 교외에서 불어오니 등잔불을 점차 가까이하고 책을 열고 읽어볼 만하다. 어찌 아침저녁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너 자신을 위해서 세월을 아까워하여라. 은혜와 의리는 둘 다 지키기 어려워 내가 시를 지어 너의 망설임을 권면하노라.

☞. 今愁, 心遠天地寬, 把酒憑欄, 聽玉笛梅花.

题湖北省武汉黄鹤楼联:心遠天地寬,把酒憑欄,听玉笛梅花此时落否?我辞江汉去,推窓寄慨,问仙人黄鹤何日归来。黄鹤飞去且飞去,白云可留不可留.

☞. 龍行虎步.

☞. 龍驤虎步.

☞. 人生得一知己足矣, 斯世當以同懷視之. 《魯迅》

  '洛文' 魯迅의 筆名, 凝은 瞿秋白의 筆名. 一知는 瞿秋白을 가리킴.

 这是鲁迅先生书赠瞿秋白的一幅对联。意思是说:人的一生如果能够得到一个知己就足够了,在这个世界上我将把你看做自己的同胞兄弟一样。先生称瞿秋白为知己,此联堪称古今咏颂友谊之绝唱。

“士为知己者死,女为悦己者容”出自战国·佚名《战国策·赵策一》中的一段话。

意思是:男人愿意为赏识自己、了解自己的人献身,女人愿意为欣赏自己、喜欢自己的人精心妆扮。

节选原文:晋毕阳之孙豫让,始事范中行氏而不说,去而就智伯,智伯宠之。及三晋分智氏,赵襄子最怨智伯,而将其头以为饮器。豫让遁逃山中,曰:“嗟乎!士为知己者死,女为悦己者容。吾其报智氏之仇矣。”

译文:最初,晋国侠客毕阳的孙子豫让给范、中行氏做大臣,但并未受到重用,于是他就投效智伯,得到宠信。后来韩、赵、魏三国瓜分了智伯的土地。其中赵襄子最痛恨智伯,把智伯的头盖骨拿来作饮器。这时豫让逃到山里说:“唉!志士为了解自己的人而牺牲,女子为喜欢自己的人而打扮,所以我一定要替智伯复仇。”

☞. 朱雀橋邊野草,烏衣巷口夕陽斜。舊時王謝堂前燕,飛入尋常百姓家。烏衣巷 ‧ 劉禹錫

 주작교 언저리에 온갖 들꽃 흐드러지고, 오의항 입구에 석양이 비꼈구나. 그 옛날 왕도와 사안의 집에 드나들던 제비들, 이제는 백성들 집에 예사로이 날아든다.

☞. 厚德其道可養氣.

☞. 歲不我與. 岁不我与[suì bù wǒ yǔ]

Time and tide wait for no man/时间不等待我们。嗟叹时机错过,追悔莫及。亦谓时间不多,须抓紧时机.

☞. 人間事了須先退, 不待霜毛漸滿簪. 《無題· 寇准》

 [其一] 曾讀前書笑古今, 愧隨流俗共浮沉。終期直道扶元氣, 肯爲虛名役片心。

 글 읽고 세상사 비웃다가 부치하여 따르니 부끄럽다. 끝내 바른 도 세워야지 헛된 이름 애써 쫓을까.

​ [其二]默坐野禽啼晝景, 閉門官柳長春陰。人間事了須先退, 不待霜毛漸滿簪. 

 말 없이 앉으니 낮 새 울고, 문 닫으니 뜰 버들 그늘도 길다. 뜻 이루면 어서 물러나야지, 비녀 가득 차도록  흰 머리 기다릴까

☞. 鍾王書法南宮畵, 韓孟文風北海尊.

鍾王: 鍾繇和王羲之. 南宮: 北宋 书画家米芾,曾官礼部员外郎,因称。韓孟: 韓愈和孟郊. 北海: 孔融 北海太守, 建安七子之一.

☞.☞.

☞. 君問歸期未有期, 巴山夜雨漲秋池. 何當共翦西窓燭, 却話巴山夜雨時.《夜雨寄北· 李尙隱》

 그대는 돌아올 날 언제냐고 물어 왔지만, 파산의 밤비가 가을 연못에 넘치는 걸 보고 있소.
언제 둘이서 서창의 등잔 심지를 자르면서, 이 밤비를 보며 외로웠던 내 심정을 되새기게 될는지.

☞. 山上靑松君子節, 水中蓮葉佳人香.

☞. 慙君能衛足, 嘆我遠移根. 白日如分照, 還歸守故園. 《流夜郞題葵葉· 李白》    

 그대 능히 발목 지킴 봄애 부끄럽고, 내가 멀리 뿌리 옮김 한탄스러워. 밝은 해 만일 고르게 비추이면, 고향에 돌아가 논밭을 지키겠네. 

  衛足:    衛足不如葵: 『春秋左傳』 成公 17년조에, 慶克이 聲孟子와 간통한 사실을 안 鮑莊子가 이를 國武子에게 고하니 국무자가 경극을 꾸짖었다. 이를 안 경극의 부인이 국무자에게 참언을 올렸으므로 포장자가 다리를 끊기는 형벌을 받았는데, 이에 대해 공자가 평하기를, ‘포장자의 지혜는 해바라기만 못하다. 해바라기는 오히려 잎으로 해를 가려 제 발인 뿌리 부분을 보호한다.’ 라고 했다'

大唐故金氏夫人墓銘

前知桂陽監將仕郞侍御史內供奉李璆夫人京兆金氏墓誌銘幷序
鄕貢進士崔希古撰 翰林待詔承奉郞守建州長史董咸書篆
太上天子有國泰宗陽號少昊氏金天卽吾宗受氏世祖厥後派疏枝
分有昌有徽蔓衍四天下亦已多已衆遠祖諱日磾自龍庭歸命西漢
仕武帝愼名節陟拜侍中常侍封秺亭侯自秺亭已降七葉軒紱燉煌
繇是望係京兆郡史籍敍載莫之與京必世後仁徵驗斯在及漢不見
德亂離瘼矣握粟去國避時屆遠故吾宗違異於遼東文宣王立言言
忠信行篤敬雖之蠻貌其道亦行今復昌熾吾宗於遼東 夫人曾祖
諱原得皇贈工部尙書祖諱忠義皇翰林待詔檢校左散騎常侍少府
監內中尙使 父諱公亮皇翰林待詔將作監承充內作判官祖父文
武餘刃究平子觀象規模運公輸如神機技乃貢藝 金門共事六朝
有祿有位善始令終先夫人隴西李氏搢紳厚族夫人卽 判官次女
柔順利貞稟受自然女工婦道服勤求舊及歸李氏中外戚眷咸號賢
婦夫人無嗣撫訓前夫人男三人過人己子將期積善豊報豈謂天命
有筭脩短定分綿遘疾瘵巫扁不攻咸通五年五月貳拾玖日終于嶺
表享年卅三端公追昔平生尙存同體經山河視若平川不避艱儉堅
心臨 柩遂歸世域嗣子敬玄次子敬謨次子敬元並哀毁形容遠侍
靈櫬追號网極敬玄等支殘扶喘謹備禮文以咸通五年十二月七日
遷神于萬年縣滻川鄕上傅村歸世塋域夫人 親叔翰林待詔前昭
王傅 親兄守石淸道率府兵曹參軍聯仕 金門丞家嗣業希古與
夫人兄世舊追惻有作因以請銘 銘曰 天地不仁 先死陶鈞
孰是孰非 無踈無親 不饗積行 不永大命 豈伊令淑 亦罹
賢聖 遘此短辰 遊岱絶秦 大道已矣 萬化同塵

 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世祖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西漢에 투항하시어 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그를 발탁해 侍中과 常侍에 임명하고 秺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했으나 그 道를 역시 행하니,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