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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唐의 稱藩/辛丑䄵冬至節末候水泉動2日(음11/30)乙卯.

solpee 2021. 12. 31. 04:31

《後周紀5 太祖 德 5年》 (戊午, 958)

 

 . 황상은 전함을 이끌어서 회하에서 장강으로 들어가게 하려고 하였으나 북신언에 막혀서 건너지 못하자, 초주 서북에 있는 관수를 뚫어서 그 길을 통하게 하려고 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시찰하게 하였는데, 돌아와서 지형으로 보아서 불편하며 공력을 계산하면 대단히 많이 들 것이라고 하였다.

 ⑤. 上欲引戰艦自淮入江,阻北神堰,不得渡;〈北神鎭在楚州城北五里,吳王夫差溝通江、淮,後人於此立堰者,以淮水低,溝水高,防其洩也。舟行渡堰入淮。今號為平水堰。艦,戶黯翻;下同。〉欲鑿楚州西北鸛水以通其道,〈今楚州城西老鸛河是也。〉遣使行視,還言地形不便,計功甚多。〈行,下孟翻。還,從宣翻,又如字。〉

 

 황상이 스스로 가서 이를 보고 규획을 주며 초주의 민부를 발동하여 이것을 파게 하자 열흘 만에 완성하여 공력을 쓴 것은 아주 줄어들었고 큰 배가 수백 척 모두 장강에 도달하게 하니 당인들이 크게 놀라서 귀신이라고 생각하였다.

 上自往視之,授以規畫,發楚州民夫浚之,旬日而成,用功甚省,巨艦數百艘皆達于江,〈艘,蘇遭翻。〉唐人大驚,以為神。

 

 ⑥. 봄, 정월 10일에 정해군을 점령하고 오월로 통하는 길이 비로소 열렸다. 이보다 먼저 황제는 좌간의대부인 장안 사람 윤일취 등을 파견하여 오월에 사자로 가게 하였는데, 그들에게 말하였다.

 "경은 지금 떠나서 비록 바다에 배를 타고 가지만 돌아올 때쯤에는 회남이 이미 평정되어 마땅히 육로로 돌아올 뿐이오."

 이미 그리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⑥. 壬辰,拔靜海軍,始通吳越之路。〈先是,唐於海陵之東境置靜海都鎭制置院,西至海陵二百七十五里。宋白曰:靜海軍本揚州狼山鎭地,南唐於狼山北立靜海制置院,周得之,建靜海軍,尋升為通州。〉先是帝遣左諫議大夫長安尹日就等使吳越,語之曰:「卿今去雖汎海,比還,淮南已平,當陸歸耳。」〈自靜海軍東南至江口,於狼山之西渡江登陵,抵福山鎭,則蘇州常熟縣界,吳越之境也。先,悉薦翻。語,牛倨翻。此,必利翻。〉已而果然。

 

 ⑱. 3월 10일에 황상은 영난진에 가서 누차강 입구에 갔는데, 수군을 파견하여 당의 군사를 치게 하여 그들을 겨파하였다. 황상이 당의 전함 수백 척이 동포주에 정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장차 바다 입구로 가서 소와 항으로 가는 길목을 옥죄려고 하여 전전도우후인 모용연쇠를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게 하고, 우신무통군 송연악은 수군을 거느리고 강을 좇아서 내려가게 하였다.

 ⑱. 辛卯,上如迎鑾鎭,〈迎鑾鎭,本唐之白沙也。吳主楊溥至白沙,閱舟師,徐溫自金陵來見,因以白沙為迎鑾鎭。白沙之地,本屬江都,唐分江都置永貞縣,吳為迎鑾鎭,宋為眞州。〉屢至江口,遣水軍擊唐兵,破之。上聞唐戰艦數百艘泊東蔀州,將趣海口扼蘇、杭路,〈東閊洲,在泰州東南大江中,元是海嶼沙島之地。宋白曰:東閊洲在通州東南,通州海門縣界。閊,音布。「州」,當作「洲」。〉遣殿前都虞候慕容延釗將步騎,右神武統軍宋延渥將水軍,循江而下。

 

 13일에 모용연쇠가 주문을 올려서 당의 군사를 동포주에서 크게 격파하였다고 하니, 황상은 이중진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여주로 가게하였다. 

 당주는 황상이 강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끝내 남쪽으로 건너올 것이 두려워서 또 다시 명호를 수치스럽게 내려서 칭번을 하면서 마침내 병부시랑인 진각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가게 하여, 자리를 태자 이홍기에게 물려주게 해 달라고 청하고, 중국의 명령을 듣게 해달라고 하였다.

 甲午,延釗奏大破唐兵於東閊州;上遣李重進將兵趣廬州。〈唐末,楊行密自廬州起,旣建國,遂為重鎭。周師渡淮,舒、蘄、黃先皆款附,獨廬未下,蓋宿兵多,周師不敢輕犯也。趣,七喻翻。〉

唐主聞上在江上,恐遂南渡,又恥降號稱蕃,乃遣兵部侍郎陳覺奉表,〈《考異》曰:《十國紀年》:「遣樞密使陳覺奉表。」《實錄》載其表云:「今遣左諫議大人、兵部侍郎臣陳覺躬聽敕命。」蓋當時所假之官耳。今從之。〉請傳位於太子弘冀,使聽命於中國。

 

 이때에 회남에는 오직 여· 서· 기· 황만이 점령되지 않았는데, 15일에 진각이 영난에 도착하여 주의 군사가 강성한 것을 보고 황상에게 아뢰기를, '청컨대 사람을 파견하여 강을 건너가게 하여 표문을 얻어다가 네(여, 서, 기, 황)주의 땅을 헌납하고 강을 구획하여 경계로 삼고 군사 황동을 쉬게 하십시오.' 하였는데, 그 말씨가 아주 애절하였다.

 황상이 말하였다.

 "짐이 본래 군사를 일으킨 것은 단지 강의 북쪽을 차지하려는 것이었는데, 너희 주군이 나라를 들어서 내부할 수 있다면 짐이 다시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진각이 절하고 감사하며 물러났다.

 時淮南惟廬、舒、蘄、黃未下,〈蘄,渠希翻。〉丙申,覺至迎鑾,見周兵之盛,白上,請遣人渡江取表,獻四州之地,畫江為境,以求息兵,江取表,獻四州之地,畫江為境,以求息兵,辭指甚哀。上曰:「朕本興師止取江北,爾主能舉國內附,朕復何求!」〈復,扶又翻。〉覺拜謝而之退。

 

 16일에 진각이 그의 부속인 합문승지 유승우를 파견하여 금릉에 가게 해달라고 청하니, 황상이 당주에게 편지를 내렸는데, 이르기를, '황제가 공손하게 강남국주에게 문안합니다.'라고 하여 그를 위로하며 받아들였다.

 17일에 오월에서 주문을 올려서 '상직지휘사· 처주자사인 소가천과 수주 자사 노언수를 파견하여서 전함 400척과 사졸 1만7천 명을 가지고서 통주의 남안에 주둔하였다.'고 하였다.

 丁酉,覺請遣其屬閤門承旨劉承遇如金陵,上賜唐主書,稱「皇帝恭問江南國主」,慰納之。

戊戌,吳越奏遣上直〈【章:乙十一行本「直」下有「都」字;孔本同。】〉指揮使.處州刺史邵可遷、秀州刺史路彥銖以戰艦四百艘、士卒萬七千人屯通州南岸。〈周旣克靜海軍,置通州。通州南岸蘇州常熟縣福山鎭之地,卽東晉之南沙也。〉

 

 당주가 다시 유승우를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왔는데 '당국주'라고 하면서 강북에 있는 네 개의 주를 바치고 매년 공물 10만을 보내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강북은 모두 평정되었고, 주 14개와 현 60개를 얻었다.

 唐主復遣劉承遇奉表稱唐國主,請獻江北四州,歲輸貢物十〈【章:乙十一行本「十」上有「數」字;孔本同。】〉萬。於是江北悉平,得州十四,縣六十。〈光、壽、廬、舒、蘄、黃、滁、和、濠、泗、楚、揚、泰、通十四州。〉

 

 19일에 황상은 당주에게 편지를 내려 보내어 타일렀다.

 "강에 이어있는 여러 군과 양절· 호남· 형남의 군대는 나란히 철수하여 돌아가고, 그 가운데 여· 기· 황 세 도 역시 군사를 가까운 근교로 거두어 들이라. 저들 장사와 가족들이 길에 나서는 것을 기다려서 사람을 파견하여 장교를 불러서 성읍을 그들에게 교부하도록 하라. 강에 있는 주함 가운데는 반드시 왕래할 필요가 있는 것은 나란히 북쪽 장안으로 가서 이를 끌어가도록 하라."

 20일에 진각이 가겠다고 인사를 하니 또 당주에게 편지를 하사하여 타이르기를, '반드시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줄 것은 없다.'고 하였다.

 庚子,上賜唐主書,諭以:「緣江諸軍及兩浙、湖南、荊南兵並當罷歸,其廬、蘄、黃三道,亦令斂兵近外。〈謂周所遣進攻廬、蘄、黃之軍也。近外,謂近郊之外。〉俟彼將士及家屬就道,可遣人召將校以城邑付之。〈將,卽亮翻。校,戶敎翻。〉江中舟艦有須往來者,並令就北岸引之。」〈凡唐舟艦在北岸者,皆許令引就南岸。〉辛丑,陳覺辭行,又賜唐主書,諭以不必傳位於子。

 

 21일에 황상은 영난에서 다시 양주로 갔다.

 22일에 오월과 형남의 군사들에게 조서를 내려서 각기 본래의 도로 귀환하라 하였으며, 전홍숙에게 호군할 비단 3만 필을 하사하고 고보융에게는 1만 필을 주었다.

 23일에 보신군을 여주에 설치하고 우룡무통군인 조광찬으로 절도사를 삼았다.

 25일에 당주가 풍연기를 파견하여 銀· 絹· 錢· 茶· 榖을 합하여 100만을 바쳐 호군하였다.

 壬寅,上自迎鑾復如揚州。

癸卯,詔吳越、荊南軍各歸本道;賜錢弘俶犒軍帛三萬匹,高保融一萬匹。〈吳越軍臨南沙,荊南軍至鄂州,各犒之使罷歸。犒,苦到翻。〉

甲辰,置保信軍於廬州,以右龍武統軍趙匡贊為節度使。

丙午,唐主遣馮延己獻銀、絹、錢、茶、榖共百萬以犒軍。〈銀兩、絹匹、錢貫、茶斤,榖石,各以萬計,其數共為百萬。〉

 

 28일에 송연악에게 명령하여 수군 3천을 거느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순회하며 경계하게 하였다.

 29일에 옛날 회남절도사였던 양행밀과 옛날 승부절도사였던 서온 등의 묘는 나란히 헤아려서 수호를 지급하라고 칙령을 내렸으며, 그리고 강남의 여러 신하들으리 며로써 강북에게 있는 것은 역시 장리에게 위탁하여 때뭊추어 검사하고 관리하게 하였다.

 30일에 당주는 그의 임여공인 서요를 파견하여 자기를 대신하여 축수하였다.

 己酉,命宋延渥将水军三千溯江巡警。

庚戌,敕故淮南節度使楊行密、故昇府節度使徐溫等墓並量給守戶;〈削其僭諡,存其故鎭。昇府卽金陵。金陵,唐之昇州,故曰昇府。〉其江南羣臣墓在江北者,亦委長吏以時檢校。〈長,知兩翻。〉

辛亥,唐主遣其臨汝公徐遼代己來上壽。〈言奉酒上壽,非聖節也。帝生於九月二十四日。上,時掌翻。

 

 ⑲. 이 달에 변구를 준설하여 하의 물을 끌어서 회하에 이르게 하니, 이에 강과 회의 배가 비로소 소통하게 되었다.

 ⑲. 是月,浚汴口,導河流達于淮,於是江、淮舟懢始通。〈此卽唐時運路也。自江、淮割據,運漕不通,水路湮塞,今復浚之。

 

 ㉘. 5월 남당주는 주의 휘를 피하려고 이름을 이경으로 고쳤다. 명령을 내려서 제라는 명호를 제거하고 국주라고 칭하게 하였고, 무릇 천자의 의례와 제도는 모두 내리고 덜어내고 연호를 없애고 주의 정삭을 사용하고, 이어서 태묘에 고하였다. 좌복야· 동평장사인 풍연기를 파직시켜서 태자태부로 삼고, 문하시랑· 동평장사인 엄속을 소부로 하였고, 추밀사· 병부시랑인 진각을 파직시켜서 본래의 관직(병부시랑)만을 지키게 하였다.

 ㉘. 唐主避周諱,更名景。〈避周信祖諱也。更,工衡翻。〉下令去帝號,稱國主,凡天子儀制皆有降損,去年號,用周正朔,〈去,羌呂翻。《考異》曰:《世宗實錄》、薛《史》,顯德二年乙卯十一月伐淮南;唐之保大十三年也。三年正月、四年二月、十月三幸淮南。五年戊午三月,江北平,唐之交泰元年也。而《江南錄》誤以保大十五年事合十四年。十五年丁巳改交泰,五月去帝號,明年乃顯德五年,又明年卽建隆元年,中間實少顯德六年。《江南錄》最為差誤,其記李昇復姓,亦先一年。他事倣此,不可考按。故世宗取淮南年月,專以《實錄》及薛《史》為據。〉仍告于太廟。左僕射、同平章事馮延己罷為太子太傅,門下侍郎、同平章事嚴續罷為少傅,樞密使、兵部侍郎陳覺罷守本官。

 

 애초에, 풍연기는 중원을 빼앗을 대책을 당주에게 설명하였는데 이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풍연기는 일찍이 열조가 군사 활동을 거두는 것을 좀스러운 것이라고 비웃고서 말하였다.

 "안륙에서 잃은 것은 겨우 수천의 군사인데 이 때문에 철식하며 한탄한 것이 열흘이었으니 이는 농사짓는 영감의 아는 범위입니다. 어찌 족히 더불어 크게 이루겠습니까? 지금의 황상처럼 욎에다 군사 수만 명을 드러내 놓고도 격구를 하고 연회를 열어 평일과 다름없이 즐기는 것이 얼마나 진짜 영명한 군주입니까?"

 初,馮延己以取中原之策說唐主,由是有寵。延己嘗笑烈祖戢兵為齷齪,〈說,式芮翻。戢,則立翻。齷,於角翻。齪,敕角翻。〉曰:「安陸所喪纔數千兵,為之輟食咨嗟者旬日,〈謂晉高祖天福五年李承裕安州之敗。事見二百八十二卷。喪,息浪翻。為,于偽翻。〉此田舍翁識量耳,安足與成大事!豈如今上暴師數萬於外,而擊毬宴樂無異平日,眞英主也!」

 

 풍연기와 그 무리들의 담론은 항상 천하를 자기의 책임이라고 하며 서로 주고 받았다. 한림학사인 상몽석이 누차 풍연기 등이 들뜨고 허탄하여 믿을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당주가 듣지 않으니 상몽석이 말하였다.

 "간사한 말은 충성스러운 것과 비슷하니 폐하께서 깨닫지 않으시면 나라는 반드시 망합니다."

 延己與其黨談論,常以天下為己任,更相唱和。〈樂,音洛。更,工衡翻。和,戶臥翻。〉翰林學士常夢錫屢言延己等浮誕,不可信;〈誕,徒旱翻。〉唐主不聽,夢錫曰:「奸言似忠,陛下不悟,國必亡矣!」

 

 주의 신하로 복종하게 되자 풍연기의 무리들은 서로 더불어 말하면서 어떤 사람이 주는 위대한 조정이라고 하였는데, 상몽석은 크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제공께서는 항상 군주를 요· 순으로 만들겠다고 하더니 어떤 뜻으로 오늘에는 스스로 작은 조정이라고 하시오?"

 무리들이 잠자코 있었다.

 及臣服於周,延己之黨相與言,有謂周為大朝者,夢錫大笑曰:「諸公常欲致君堯、舜,何意今日自為小朝邪!」衆默然。〈朝,直遙翻。〉

 

 당주가 내부하자 황제는 단지 그들의 사자를 통하여 편지를 하사하고 일찍이 사자를 파견하여 그 날에 가게 하는 일이 없었다.

 29일에 비로소 태복경 풍연로와 위위소경인 종모에게 명령하여 당에 사자로 가게하고 어의와 옥대 등과 호군할 비단 10만과 아울러 금년의 欽天曆을 하사하였다.

 自唐主內附,帝止因其使者賜書,未嘗遣使至其國。己酉,始命太僕卿馮延魯、衞尉少卿鍾謨使于唐,〈二人者,本怕唐臣。〉賜以御衣、玉帶等及犒軍帛十萬,并今年欽天曆。〈犒,苦到翻。是年正月,始行王朴所上欽天曆。〉

 

 유승우가 금릉에서 돌아오면서 당주는 진각으로 하여금 황제에게 말하게 하여 '강남에는 노전(鹵田: 소금 밭)이 없어서 해릉감을 남쪽에 귀속시켜서 군사들에게 공급하게 하여 주기'를 원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해릉은 강북에 있으니 섞여 살게 하기 어렵다. 마땅히 별도로 처리하겠다."

 이에 이르러서 조서를 내려서 매년 소금 30만 곡을 지출하여 강남에 공급하게 하였고, 포로로 잡은 강남의 사졸은 점점 돌려보냈다.

 劉承遇之還自金陵也,〈見上三月。還,從宣翻,又如字。〉唐主使陳覺白帝,以江南無鹵田,〈海濱鹹鹵,可以煮鹽。鹵田,今謂之傼地。鹵,郎古翻。傼,古斬翻。〉願得海陵〈【章:乙十一行本「陵」下有「鹽」字;孔本同;退齋校同。】〉監南屬以贍軍。帝曰:「海陵在江北,難以交居,〈言難使周之官吏與唐之官吏雜居也。〉當別有處分。」〈處,昌呂翻。分,扶問翻。〉至是,詔歲支鹽三十萬斛以給江南,所俘獲江南士卒,稍稍歸之。

 

 ㉛. 가을, 7월 7일에 처음으로 '大周刑統(대주형통: 후주의 법전으로957년 5월 완성 송대까지 사용되었다.)을 시행하였다.

 ㉛. 秋,七月,丙戌,初行大周刑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