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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唐의 紫金山전투/辛丑䄵大䨮節末候荔挺出(타래붓꽃의 싹이 나온다)4日(음11/17)壬寅

solpee 2021. 12. 19. 16:50

《後周紀4 太祖 德 4年》 (丁巳, 957)

 

 ③. 주의 군사들이 수춘을 포위하여서 해를 이어도 아직 점령하지 못하였는데 성 안에서는 먹을 것이 다하였다. 제왕 이겨달은 호주에서 응원사· 영원절도사인 허문진과 도군사인 변호, 북면초토사 주원이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회수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곳을 구원하게 하니 자금산에 진을 친 것이 10여 개의 영채를 마치 구슬을 이어 놓은 것처럼 늘어 놓았다. 성안의 봉화로 아침저녁으로 서로 호응하고, 또 용도를 건축하여 수춘까지 다다르게 하고 양곡을 운반하여 그들에게 먹이려고 하였는데, 실처럼 이어진 것이 수십 리였다. 

 ③. 周兵圍壽春,連年未下,〈前年十一月,周兵始攻壽州。〉城中食盡。齊王景達自濠州遣應援使、永安節度使許文稹、都軍使邊鎬、北面招討使朱元將兵數萬,泝淮救之,軍於紫金山,列十餘寨如連珠,與城中烽火晨夕相應,又築甬道抵壽春,〈甬,余拱翻。〉欲運糧以饋之,綿亙數十里。

 

 장차 수춘에 이르려고 하는데, 이중진이 맞아서 공격하여 그들을 대파하니 죽은 자가 5천 명이었고 그들의 영채 두 곳을 빼앗았다. 1월 19일에 이중진이 보고하였다.

 20일에 조서를 내려서 다음 달에 회수로 행차하겠다고 하였다.

 將及壽春,李重進邀擊,大破之,死者五千人,奪其二寨。丁未,重進以聞。戊申,詔以來月幸淮上。

 

 유인섬이 변호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무리를 인솔하고 결전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제왕 이경달이 허락하지 않으니 유인섬은 분하고 우울하여 병이 되었다. 그의 어린 아들인 유승간이 밤중에 배를 타고서 회하를 건너 북쪽으로 가려다가 소교에게 잡혔다. 유인섬이 그를 요참하라고 명령하였는데,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감히 구해내려고 하지 못하였지만 감군사 주정구가 중문에서 그를 구해내려고 통곡하였지만 유인섬은 허락하지 않았다.

 劉仁贍請以邊鎬守城,自帥眾決戰;〈帥,讀曰率。〉齊王景達王許,仁贍憤邑成疾。其幼子崇諫夜泛舟渡淮北,為小校所執,〈校,戶教翻。〉仁贍命腰斬之,左右莫敢救,監軍使周廷構哭於中門以救之;仁贍不許。

 

 주정구가 다시 그 부인에게 구해낼 것을 요구하였더니, 부인이 말하였다.

 "첩이 유승간을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군법에는 사사로움이 있을 수 없고 명예와 절개는 이지러뜨릴 수 없는 것인데, 만약에 그를 용서한다면 유씨는 충성스럽지 않은 집안이 되는 것이니, 첩과 공이 무슨 얼굴로 장사들을 보겠습니까?"

 그를 목 베라고 재촉하여 명령하고서 장례를 치렀다. 장사들은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廷構復使永救於夫人,〈復,扶又翻。使,疏吏翻。〉夫人曰:「妾於崇諫非不愛也,然軍法不可私,名節不可虧;若貸之,則劉氏為不忠之門,妾與公何面目見將士乎!」趣命斬之,然後成喪。〈趣,讀曰促。〉將士皆感泣。

 

 의논하는 사람들은 당의 원병이 오히려 강하여서 대부분이 군사를 철수하자고 청하였고 황제는 이들을 의심하였다. 이곡이 집에서 병이 들어 누워 있었는데, 2월 8일에 황제가 범질과 왕부로 하여금 가서 그와 더불어 모의하라고 하였더니, 이곡이 상소문을 올렸다.

 "수춘은 위태롭고 곤란해 있어서 격파되는 것은 아침이나 저녁에 놓여 잇으니, 만약에 난가가 친히 정벌을 나선다면 장사들은 다투어 분발하고 원병들은 떨며 두려워할 것이며 성 안에서는 망할 것을 알 것이니, 반드시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議者以唐援兵尚強,多請罷兵,帝疑之。李穀寢疾在第,二月,丙寅,帝使范質、王溥就與之謀,穀上疏,以為:「壽春危困,破在旦夕,若鑾駕親征,則將士爭奮援兵震恐,城中知亡,必可下矣!」上悅。

 

 

 ⑤. 2월 16일에 왕박을 권동경유수· 겸판개봉부사로 삼고, 삼사사인 장미를 대내도순검으ㅗ 삼으며, 시위도우후인 한통을 경성내오도순검으로 삼았다.

 ⑤. 甲戌,以王朴權東京留守兼判開封府事,以三司使張美為大內都巡檢,以侍衛都虞候通為京城內外都巡檢。

 

 17일에 황제는 대량을 출발하였다. 이보다 먼저 주는 당과 싸웠는데, 당의 수군은 날카롭고 민첩하여 주인들이 그들을 대적할 수 없어서 황제는 매번 이를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수춘에서 돌아와서는 대량성 서쪽의 변수 옆에 저함 수백 척을 만들어 놓고 당의 항복한 병졸에게 명령하여 북쪽 사람들에게 수전을 가르치도록 하엿는데 몇 달 뒤에는 종횡으로 들락날락하게 되어 거의 당의 군사를 이길 만하였다.

 乙亥,帝發大梁。先是周與唐戰,〈先,悉薦翻。〉唐水軍銳敏,周人無以敵之,帝每以為恨。返自壽春,於大梁城西汴水側造戰艦數百艘,〈艦,戶黯翻。艘,蘇遭翻。〉命唐降卒教北人水戰,數月之後, 縱橫出沒,〈縱,子容翻。〉殆勝唐兵。

 

 이에 이르러서 우교위대장군 왕환에게 명령하여 수군 수천을 거느리고 민하에 연한 영수에서 회수로 들어가게 하니, 당인들이 이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27일에 황제는 하체에 도착하였으며, 3월 2일 밤에 황제는 회하를 건너서 수춘 성 아래에 이르렀다.

 至是命名驍衛大將軍王環將水軍數千自閔河沿潁入淮,〈丁度曰:閔河,本曰琵琶溝,今名蔡汀。潁,潁河也,註詳見後卷 蔡河下。今按蔡河自東京戴樓門入京城,出宣化水門,投東南下,經陳州,至蔡口,入潁河。潁河自嵩山發源,由潁昌至鹿邑界,過蔡河口,與蔡河合流,經順昌府 潁上縣,至西正陽,入淮河。〉唐人見之大驚。

乙酉,帝至下蔡;三月,己丑夜,帝渡淮,抵壽春城下。

 

 3일 아침에 몸소 갑주를 이고 자금산의 남쪽에 진을 치고, 조광윤에게 명령하여 당의 선봉인 영채와 산 북쪽에 잇는 한 개의 영채를 공격하게 하여 모두 이것들을 격파하고 목을 베고 붙잡은 것이 3천여 급이었고 그들의 용도를 끊었는데, 이로부터 당의 군사들은 수미가 서로 구원할 수 없게 되었다. 저녁이 되어 황제는 군사를 나누어 여러 영채를 지키게 하고 하채로 돌아왔다.

 庚寅旦,躬擐甲胄,〈擐,音宦。〉軍於紫金山南,命太祖皇帝擊唐先鋒寨及山北一寨,皆破之,斬獲三千餘級,斷其甬道,〈斷,音短。〉由是唐兵首尾不能相救。至暮,帝分兵守諸寨,還下蔡。

 

 

 ⑥. 당의 주원은 공로를 믿고 자못 원수의 통제를 어겼는데, 진각은 주원과 틈이 생기자 누차 표문을 올려서 주원이 반복하여 군사를 거느리게 할 수 없다고 하니, 당주는 무창절도사 양수충으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양수충이 호중 도착하자 진각이 제왕 이경달의 명령을 가지고 주원을 불러서 호주에 와서 일을 계획하자고 하여 장차 그의 군사를 뺏으려고 하였는데, 주원이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자살하려고 하였지만 문하에 있던 손님인 송기가 주원에게 유세하였다.

 ⑥. 唐朱元恃功,頗違元帥節度;〈朱元恃其復舒、和之功也。〉陳覺與元有隙,屢表元反覆,不可將兵,唐主以武昌節度使楊守忠代之。守忠至濠州,覺以齊王景達之命,召元至濠州計事,將奪其兵;元聞之,憤怒,欲自殺,門下客宋垍說元曰:

 

 "대장부가 어디에 간들 부귀하지 아니하겠냐만, 어찌하여 반드시 처자식을 위하여 죽습니까?"

 3월 4일에 주원은 선봉호채사 주인용 등과 더불어 영채의 1만여 명을 들어가지고 항복하였는데, 비장인 사후경이 좇지 않자 주원이 그를 죽였다.

 「大丈夫何往不富貴,何必為妻子死乎!」〈垍,其冀翻。說,式芮翻。為,于偽翻。〉辛卯夜,元與先鋒壕寨使朱仁裕等舉寨萬餘人降;裨將時厚卿不從,元殺之。

 

 황제는 그 남은 무리들이 강의 흐름을 타고서 동쪽으로 가다가 무너질 것을 고려하여 급히호첩좌상도지휘사 조조에게 명령하여 순군 수천을 거느리고 회수를 따라서 내려가게 하였다.

 5일 아침에 황제는 조보에 진을 치고 제장들은 당의 자금산에 있는 영채를 치게 하여 그들을 대파하였고 죽이거나 잡은 것이 1만여 명이었으며, 허문진· 변호· 양수충을 사로잡았다.

 帝慮其餘眾沿流東潰,遽命虎捷左廂都指揮使趙晁〈五代會要:廣元年,改侍衛馬軍曰龍捷左、右軍,步軍曰虎捷左、右軍。晁,直遙翻。〉將水軍數千沿淮而下。壬辰旦,帝軍于趙步,〈趙步在淮河北岸水濱泊舟之地。人坎岸為道以上下,謂之步。趙步,以趙氏居其地而得名。今自壽春花下靨鎮沿淮東下百餘里,得趙步灘,又東逕梁城灘北,齊、梁控扼之地也。淮水中有梁城灘,又東二十五里至洛河口。〉諸將擊唐紫金山寨,大破之,殺獲萬餘人,擒許文稹、邊鎬、楊守忠。

 

 나머지 무리는 과연 회수를 따라서 동쪽으로 달아나니 황제는 조보에서부터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북쪽 하안을 좇아서 그들을 추격하였고, 제장들은 보병과 기병을 가지고 남안을 따라서 그들을 추격하였으며, 수군은 중류에서부터 내려가니 당의 군사들은 싸우다 물에 빠져 죽은 것과 항복한 ㅅ람이 거의 4만 명이었고 얻은 배와 양곡 그리고 무기는 10만을 헤아렸다.

 餘眾果沿淮東走,帝自趙步將騎數百循北岸追之,諸將以步騎循南岸追之,水軍自中流而下,唐兵戰溺死及降者殆四萬人,獲船艦糧仗以十萬數。

 

 포시에 황제는 말을 달려 형산홍에 도착하였는데, 조보에서 200여 리 떨어지 곳이었다. 이날 밤 진회군에서 묵었는데 6일에 따르던 관리들이 비로소 도착하였다. 유인섬은 원병이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목메어 탄식하였다.

 晡時,帝馳至荊山洪,〈湔山,在濠州鍾離縣西八十三里,即梁武帝築堰之地。今懷遠軍正治荊山。〉距趙步二百餘里。是夜,宿鎮淮軍,〈鎮淮軍,時置於渦口。〉癸酉,從官始至。〈從,才用翻。〉劉仁贍聞援兵敗,扼吭歎息。〈吭,苦郎翻。〉

 

 7일에 가까운 곳에 있는 현의 정부들을 징발하여 진회구에 성을 쌓아서 두 개의 성을 만들었는데 회수를 끼고서 하채에 있는 무량을 그 사이로 옮겨서 호와 수가 서로 응원하는 길을 옥죄게 하였다. 마침 회수의 물이 불어서 당의 호주도감인 팽성 사람 곽정위가 수군으로 회수를 거슬러 올라와서 대비하지 않은 것을 습격하고 부량을 불 지르려고 하였는데, 우룡무통군 조광찬이 이를 엿보아서 알고 군사를 매복시켜서 그들을 맞아서 쳐서 격파하였다.

 甲午,發近縣丁夫〈【章:十二行本「夫」下有「數千」二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城鎮淮軍,為二城,夾淮水,徙下蔡浮梁於其間,扼濠、壽應援之路。會淮水漲,唐濠州都監彭城郭廷謂以水軍泝淮,欲掩不備,焚浮梁;右龍武統軍趙匡贊覘知之,〈覘,丑廉翻,又丑豔翻。〉伏兵邀擊,破之。

 

 당의 제왕인 이경달과 진각은 모두 호주에서 달아나서 금릉으로 갔고, 오직 정강지휘사 진덕성만이 군사를온전히 하여 돌아갔다.

 11일에 회남 절도사인 향훈을 무년절도사· 겸회남도행영도감으로 삼고 군사를 거느리고 진회군을 지키게 하였다.

 12일에 황상은 진회군에서 다시 하채로 갔다.

 경자이레 유인섬에게 조서를 내려서 스스로 화복을 선택하게 하였다.

 唐齊王景達及陳覺皆自濠州奔歸金陵,惟靜江指揮使陳德誠全軍而還。〈陳德誠,誨之子也。還,從宣翻,又如字。〉

戊戌,以淮南節度使向訓為武寧節度使、淮南道行營都監,將兵戍鎮淮軍。

己亥,上自鎮淮軍復如下蔡。庚子,賜劉仁贍詔,使自擇禍福。

 

 당주는 스스로 제장들을 거느리고 주를 막는 일을 논의하니 중서사인 교광순이 상소하여 간절하게 간언을 하였더니, 당주는 무리들을 저상시킨다고 생각하여 무주로 유배시켰다.

 당주가 신위통군 주광업과 유존충에게 수어방략을 물었는데 주광업이 나은의 시를 읊어 말하였다.

 "시절이 오면 천지도 몯가 힘을 합치는데, 운수가 가버리면 영웅도 자유롭지가 않네."

 유존충은 주광업의 말이 그러하다고 여겼다. 당주는 화가 나서 주광업을 깎아내려서 무주부사로 삼고 유존충을 요주로 유배시켰다. 이미 그렇게 하였으나 끝내 감히 스스로 가지는 않았다.

 唐主議自督諸將拒周,中書舍人喬匡舜上疏切諫,唐主以為沮眾,流撫州。〈沮,在呂翻。〉唐主問神衛統軍朱匡業、劉存忠以守禦方略,匡業誦羅隱詩曰:「時來天地皆同力,運去英雄不自由。」存忠以匡業言為然。唐主怒,貶匡業撫州副使,流存忠於饒州。既而竟不敢自行。

 

 17일에 황제는 수춘성의 북쪽에서 요병(사열)을 하였다. 당의 청회절도사· 겸시중인 유인섬은 병이 심하여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19일에 감군사 주정구와 영전부사인 손우 등이 유인섬의 표문을 지어서 사자를 보내어 이를 받들고 와서 항복하였다.

 甲辰,帝耀兵于壽春城北。唐清淮節度使兼侍中劉仁贍病甚,不知人,丙午,監軍使周廷構、營田副使孫羽等作仁贍表,遣使奉之來降。

 

 20일에 황제는 유인섬에게 조서를 내리고 합문사인 만년 사람 장보속을 파견하여 성에 들어가서 유시를 선포하게 하니 유인섬의 아들인 유숭양이 다시 나와서 사죄하였다.

 21일에 황제는 갑병을 크게 벌려 놓고 수춘성의 북쪽에서 항복을 받았는데 주정구 등은 유인섬을 마주 들고 성을 나왔지만, 유인섬은 누워서 일어날 수가 없자 황제는 위로하며 상을 내리어 다시 성에 들어가서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丁未,帝賜仁贍詔,遣閤門使萬 年張保續入城宣諭,仁贍子崇讓復山謝罪。戊申,帝大陳甲兵,受降於壽春城北,廷構等昇仁贍出城,〈昇,音余,又羊茹翻。〉仁贍臥不能起,帝慰勞賜賚, 〈勞,力到翻。賚,來代翻。〉復令入城養疾。〈復,扶又翻。考異曰:實錄:「時仁贍臥疾已亟,遂翻然納款,而城內諸軍萬計,皆屏息以聽其命。」又曰:「仁 贍輕財重士,法令嚴肅,故能以一城之眾連年拒守。逮其來降,而其下無敢竊議者,斯亦一時之名將也。」歐陽史:「三月,仁贍病甚,已不知人,其副使孫羽詐為仁贍書,以城降。世宗命昇仁贍至帳前,嗟歎久之,賜以玉帶、御馬,復使入城養疾。是日,制曰:『劉仁贍盡忠所事,抗節無虧,前代名臣,幾人可比!予之南伐,得爾為多。』乃拜仁贍檢校太尉兼中書令、天平軍節度使。仁贍不能受命而卒。世宗追封彭城郡王,以其子崇讚為懷州刺史。李景聞仁贍卒,亦贈太師。」又曰:「仁贍既殺其子以自明矣,豈有垂死而變節者乎!」今周世宗實錄載仁贍降書,蓋其副使孫羽等所為也。當世宗時,王環為蜀守秦州,攻之久不下,其後力屈而降,世宗頗嗟其忠,然止以為大將軍。視世宗待二人之薄厚而考制書,乃知仁贍非降者也。今從之。〉

 

 23일에 수주의 치소를 하채로 옮기고 주의 경계 안에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사람 이하의 사람을 사면하였다. 주의 백성들 가운데 당의 문서를 받고서 산림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나란히 불러서 다시 업무에 복귀하게 하고 죄를 묻지 말게 하였고, 일찍이 그들이 살상한 것이 있다 하여도 원수를 갚는 소송을 핮 말게 하였다. 옛날에 내린 정령 가운데 백성들에게 불편하게 한 것은 본주에서 조목조목 만들어서 상주하게 하였다.

 庚戌,徙壽州治下蔡,〈壽州,宋升為壽春府,至今治下蔡縣,而壽春故縣自為縣,在淮水之南,西北距下蔡二十五里。高宗南渡,復於壽州舊治壽春縣建安豐軍,以為控扼之地,蓋地險所在,通古今不能易也。宋白曰:下蔡,古之蔡國,吳之州來。左傳「蔡成公遷于州來,謂之下蔡」,是也,漢為下蔡縣;梁於硤石山築城以拒魏,即今縣城也。〉赦州境死罪以下。州民受唐文書聚山林者,並召令復業,勿問罪;有嘗為其殺傷者,毋得讎訟。曏日政令有不便於民者,令本州條奏。

 

 24일에 유인섬을 천평절도사· 겸중서령으로 삼았는데, 제서에 쓴 말의 대략이다.

 "맡은 바 일에 충성을 다하고 대항하는 절개에 아무런 흠집이 없으니 시대의 이름난 신하 거운데 몇 사람이나 비교될오! 짐이 배반자를 정벌함에 너를 얻은 것이 큰 수확이다."

 이날 죽으니 작위를 축가로 하사하여 팽성군왕이라 하였다. 당주가 이 소식을 듣고, 역시 태사를 충직하였다. 황제는 다시 청회군은 충정군이라 하여 유인섬의 절개를 기렸고, 우우림 통군 양신을 충정절도사· 동평장사로 삼았다.

 辛亥,以劉仁贍為天平節度使兼中書令,制辭略曰:「盡忠所事,抗節無虧,前代名臣,幾人堪比!朕之伐叛,得爾為多。」是日,卒,追賜爵彭城郡王。唐主聞之,亦贈太師。帝復以清淮軍為忠正軍〈楊氏以壽州置忠正軍,後改清淮軍,今復為忠正軍以旌劉仁贍之節。按薛史:唐明宗天成二年,詔昇壽州為忠正軍。長興二年閏五月己丑,升廬州為昭順軍。八月癸酉,升州為昭信軍。宋白續通典曰:壽州,後唐天成元年升為順化軍節度。今並存之,以俟博考。〉以旌仁贍之節,以右羽林統軍楊信為忠正節度使、同平章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