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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周 世宗의 治跡/辛丑秊大䨮節(06:57)初候鶡旦不鳴1日(陰11/4)己丑

solpee 2021. 12. 6. 15:51

《後周紀3 太祖 德 2年》 (乙卯, 955)

 

 ②. 정난절도사 이이흥은 절덕의를 역시 절도사로 삼았으므로 작와 동등한 반열에 있게 되자 이를 수치로 생각하여 길을 막고 주의 사자를 통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정월 13일에 황상이 재상에게 모의하였더니, 대답하였다.

 "하주는 변방에 있는 진이니 조정에서는 그동안 매번 우대하고 관용하였으며, 부주는 치우쳐있고 작아서 얻거나 잃거나 간에 경중에 관계되지 않으니, 또 의당 이이흥을 안무하여야 하며 전체적으로는 대체를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②. 定難節度使李彝興〈李彝興,即彝殷也,避宋朝宣祖廟諱,始改名彝興。史以後來所更名書之。難,乃旦翻。〉以折德扆亦為節度使,與己並列,恥之,〈夏州自唐以來,為緣邊大鎮,李氏又世襲節度使。府州,漢氏方置節鎮,折氏父子又晚出,故恥與並列。〉塞路不通周使。〈塞,悉則翻。〉癸未,上謀於宰相,對曰:「夏州邊鎮,朝廷自來每加優借,府州褊小,得失不繫重輕,且宜撫諭彝興,庶全大體。」

 

 황상이 말하였다.

 "절덕의는 수년 전부터 충성을 다하고 힘을 합쳐서 유씨를 막았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를 버리겠소! 또 하주는 오직 양과 말만을 생산하여 백가지 물건을 바꾸어 쓰는데 모두 중국만을 우러러 보고 있으니 내가 만약에 그를 끊어 버리면 저들은 어떻게 할 수 있겠소?"

 마침내 공봉관인 제장진을 파견하여 조서를 싸가지고 가서 그를 나무라니, 이이흥은 황공하여 사죄하였다.

 上曰:「德扆數年以來,盡忠刃力以拒劉氏,柰何一旦棄之!且夏州惟產羊馬,貿易百貨,悉仰中國,〈貿,音茂。仰,牛向翻。〉我若絕之,彼何能為!」乃遣供奉官齊藏珍齎詔書責之,〈風俗通云:凡氏之興九事,氏於國者,齊、魯、宋、衛是也。余按左傳衛有大夫齊氏,此豈氏於國乎﹖〉彝興惶恐謝罪。

 

 

 ④. 21일에 처음으로 한림학사와 양성의 관리로 하여금 영과 녹을 천거하게 하였는데, 관직을 제수하는 날에 이어서 천거한 사람의 성명을 써 두게 하였고, 만약에 탐오하거나 관직의 수행에서 실패하였다면 나란히 연좌시키게 하였다.

 ④. 辛卯,初令翰林學士、兩省官舉令、錄;除官之日,仍署舉者姓名,若貪穢敗官,並當連坐。〈敗補邁翻。〉

 

 

 ⑤. 거란은 晉· 漢 이래로 누차 하북을 노략질하였는데, 경무장한 기병이 깊이 들어와서 번리의 경계가 없어지니 들녘에 사는 백성들은 매번 죽거나 약탈로 곤욕을 치렀다. 사건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은 심과 기 사이에는 호로하가 있는데, 가로로 수백 리에 걸쳐서 있으니 이를 준설할 수 있다면 그들이 달려드는 것을 한계 지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달 초에 충무절도사 왕언초와 창신절도사 한통에게 조서를 내려서 군사와 민부를 거느리고 호로하를 준설하고 이안구에 성을 쌓고 군사를 남겨서 이를 지키라고 하였다.

 ⑤. 契丹自晉、漢以來屢寇河北,輕騎深入,無藩籬之限,郊野之民每困殺掠。言事者稱深、冀之間有胡盧河,橫亙數百里,可浚之以限其奔突;〈胡盧河,俗謂之葫蘆河,即衡漳水,在東光縣西三十里。〉是月,詔忠武節度使王彥超、彰信節度使韓通〈周改曹州威信軍為彰信軍,避太祖諱也。〉將兵夫浚胡盧河,築城於李晏口,留兵戍之。〈冀州蓨縣東北有李晏鎮,時築城屯軍,以為靜安軍。按薛史,其軍南距冀州百里,北距深州三十里,夾胡盧河為壘。將即亮翻。〉

 

 황제가 덕주 자사 장장영을 불러서 변방을 지킬 계책을 물었더니 장장영이 요해처를 갖추어 진술하고 수병을 늘어놓으라고 청하였다. 변방 사람들 가운데 날래고 용감한 사람을 모집하여 그들의 품급을 후하게 하여 스스로 그들을 거느리고서 편리한 대로 토벌하여 치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황제는 모두 이를 좇아서 장장영을 연변순검초수도지휘사로 삼았다.

 帝召德州刺史張藏英,問以備邊之策,藏英具陳地形要害,請列置戍兵,募邊人驍勇者,厚其稟給,自請將之,隨便宜討擊;帝皆從之,以藏英為沿邊巡檢招收都指揮使。

 

 장영영이 관부에 도착하고 나서 몇 달 만에 모집하여 1천여 명을 얻었다. 왕언초 등이 가서 공역하는 것을 시찰하다가 일찍이 거란 사람들에게 포이 되었는데 장장영이 모집한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그들을 쳐서 대파하였다. 이로부터 거란 사람들은 감히 호로하를 건너지 못하였다.

 藏英到官數月,募得千餘人。王彥超等行視役者,〈行,下孟翻。〉嘗為契丹所圍;藏英引所募兵馳擊,大破之。自是契丹不敢涉胡盧河,河南之民始得休息。〈此河南,謂胡盧河之南也。〉

 

 

 ⑧. 2월 23일에 여러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려서 잘잘못을 극단적으로 말하라고 하였는데, 그 대략이다.

 "짐은 경· 대부들의 재능에 대하여 다 알 수 없고, 마주하여도 다 알 수가 없는데, 만약에 그 말을 채택하여 그 행동을 보고 그 뜻을 심사하고 그 충성심을 살피지 아니한다면 어찌 그릇과 지략의 옅고 깊음을 보아서 임용하는 것이 마땅한지 아닌지를 알겠는가?

 ⑧. 壬戌,詔群臣極言得失,其略曰:「朕於卿大夫才不能盡知,面不能盡識;若不采其言而觀其行,〈行,下孟翻。〉燔其意而察其忠,則何以見器略之淺深,知任用之當否!〈當,丁浪翻。〉

 

 만약에 이를 말하여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죄는 나에게 있는 것이고, 만약에 이를 요구하여도 말하지 않는다면 허물은 장차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若言之不入,罪實在予;苟求之不言,咎將誰執!」

 

 

 ⑭. 황상이 재상들에게 말하였다.

 "짐은 매번 잘 다스리는 방법을 생각할 때마다 아직도 그 요점을 얻지 못하여서 잠자고 먹을 때에도 잊지를 못하오. 또 당과 진 이래로 오· 촉· 유· 병에는 모두 교화가 막혀 있어서 아직은 통일할 수가 없으니, 의당 가까운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위군난위신불이론'과 '개변책'을 각기 한 편씩 저술하게 하여 짐이 장차 살피려고 하오."

 ⑭. 上謂宰相曰:「朕每思致治之方,未得其要,寢食不忘。〈治,直吏翻。〉又自唐、晉以來,吳、蜀、幽、并皆阻聲教,未能混壹,〈吳,李氏;蜀,孟氏;幽入於契丹;并為北漢。〉宜命近臣著為君難為臣不易論及開邊策各一篇,朕將覽焉。」

 

 비부랑중 왕박이 대책을 올렸다.

 "중국이 오· 촉· 유· 병을 잃은 것은 모두 도를 잃었음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지금 반드시 먼저 잃어버린 원인을 보아야 하는 것은 그런 다음에 이곳을 찾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比部郎中王朴獻策,〈比,音毗。〉以為:「中國之失吳、蜀、幽、并,皆由失道。〈梁失吳;後唐得蜀而復失之;晉失幽;周失并。〉今必先觀所以失之之原,然後知所以取之之術。

 

 그 처음에 잃을 적에는 군주가 아둔하고, 신하는 사악하며, 병사들은 교만하고 백성들은 피곤하고, 간사슬운 무리들이 안에서 열을 올리고, 무부는 밖에서 횡행하여 적은 것으로 인하여 크게 되며, 미미한 것이 쌓여서 드러나게 되니 그렇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其始失之也,莫不以君暗臣邪,兵驕民困,姦黨內熾,武夫外橫,〈潢,戶孟翻。〉因小致大,積微成著。今欲取之,莫若反其所為而已。

 

 무릇 현명한 사람을 나아가게 하고, 불초한 사람을 물러나게 하는 것은 그 재주를 거둬들이기 위함인데, 은혜로 구휼하고 진실하게 믿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묶기 위함이고, 공로를 이룬 사람에게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은 그들의 힘을 다 쏟게 하기 위함이며, 사치한 것을 버리고 쓰는 것을 절약하는 것은 그 재물을 풍성하게 하기 위함이고, 때에 맞추어 부리고 거둬들이는 것을 적게 하는 것은 그 백성들을 커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夫進賢退不肖,所以收其才也;恩隱誠信,所以結其心也;〈隱,卹也。〉賞功罰罪,所以盡其力也;去奢節用,所以豐其財也;〈去,羌呂翻。〉時使薄斂,所以阜其民也。〈時使者,使之以時也。斂,力贍翻。〉

 

 여러 재주있는 사람이 이미 모여지고, 정치적인 일들이 이미 잘 다스려지며, 재물의 쓸 것이 이미 충분하고, 사민이 이미 붙어있기를 기다리고, 그런 다음에 들어서 이를 사용하면 공로는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저편 사람들이 우리가 반드시 빼앗을 형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들의 정황을 아는 사람이면 간첩이 되기를 원할 것이고, 그들의 산천을 아는 사람이면 향도가 되기를 원할 것이니,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귀부하고 나면 하늘의 뜻으 반드시 좇을 것입니다.

 俟群才既集,政事既治,財用既充,士民既附,然後舉而用之,功無不成矣!彼之人觀我有必取之勢,則知其情狀者願為間諜,知其山川者願為鄉導,〈間,古莧翻;下伺間同。諜,達協翻。鄉,讀曰嚮。〉民心既歸,天意必從矣。

 

 무릇 공격하여 빼앗는 도리는 반드시 그 가운데 쉬운 것을 먼저 처리하는 것입니다. 당과 우리는 경계를 맞댄 것이 거의 2천 리나 되는데, 그 형세는 쉽게 시끄럽게 됩니다. 이를 시끄럽게 하는 것은 당연히 아무런 대비가 없는 곳에서 시작하여야 하는데 동쪽을 대비하고 있으면 서쪽을 시끄럽게 하고, 서쪽을 대비하고 있으면 동쪽을 시끄럽게 하면 서쪽에서는 반드시 분주하게 다니며 이를 구원할 것입니다. 분주하게 다니는 사이에 그들의 텅 빈 곳과 알찬 곳 그리고 강한 곳과 약한 곳을 알게 되고 그런 다음에 알찬 곳을 피하고 텅 빈 곳을 치며 강한 곳을 피하여 약한 곳을 치는 것입니다.

 아직은 반드시 대규모로 거병하지 말고 또 경무장한 군사들로써 이들을 시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凡攻取之道,必先其易者。唐與吾接境幾二千里,其勢易擾也。〈唐與中國以淮為境,自淮源東至海幾二里。易,以豉翻。〉擾之當以無備之處為始,備東則擾西,備西則擾東,彼必奔走而救之。奔走之間,可以知其虛實強弱,然後避實擊虛,避強擊弱擊弱。未須大舉,且以輕兵擾之。

 

 남쪽 사람들은 나약하고 겁이 많아서 작은 경계할 일이 있다고 들어도 반드시 모든 군사를 가지고 이를 구원할 것입니다. 군사가 자주 출동하면 백성들은 피곤해지고 재물은 고갈되며 모든 군사를 다 동원하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터 빈 틈을 타서 그곳을 빼앗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강북에 있는 여러 주는 장차 모두 우리가 소유하게 됩니다. 이미 강북을 얻는다면 저들의 백성을 이용하게 되며, 우리들의 방법을 시행하면 강남 역시 쉽게 빼앗습니다. 강남을 얻게 되면 영남과 파촉은 격문을 전하기만 하여도 평정됩니다.

 南人懦怯,聞小有警,必悉師以救之。師數動則民疲而財竭,〈數,所角翻。〉不悉師則我可以乘虛取之。如此,江北諸州將悉為我有。〈帝之取江北,王朴之計也。〉既得江北,則用彼之民,行我之去法,江南亦易取也。得江南則嶺南、巴蜀可傳檄而定。〈時劉氏據嶺南,孟氏據巴蜀,王朴欲乘勝勢以先聲下之。〉

 

 남방이 이미 평정되었다면 연 지역도 반드시 바람을 바라보고 내부하게 되는데, 만약에 그것이 이르지 않는다면 군사를 옮겨서 이를 공격하면 멍석을 말듯이 평정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동에서는 반드시 죽겠다는 오랑캐들이어서 은혜와 신의를 가지고 유혹할 수 없으니, 마땅히 강한 군사를 가지고서 그들을 통제해야 하는데, 그러나 저들은 고평에서 실패하면서부터 힘이 다하고 기운이 막혀서 반드시 아직은 능히 변경의 근심거리가 될 수 없으니, 의당 또 뒤에 도모해야 하는데, 천하가 이미 평정되기를 기다리고 그런 다음에 틈새를 살피다가 한 번에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南方既定,則燕地必望風內附;〈時契丹跨有燕地。燕,於賢翻。〉若其不至,移兵攻之,席卷可平矣。〈卷,讀如捲。凡兵之動,知敵之主,此以其時契丹主言之也。〉惟河東必死之寇,〈言北漢據河東,與周為世仇也。〉不可以恩信誘,〈誘,音酉。〉當以強兵制之,然彼自高平之敗,〈事見上卷上年三月。〉力竭氣沮,必未能為邊患,宜且以為後圖,俟天下既平,然後伺,一舉可擒也。〈是後世宗用兵以至宋朝削平諸國,皆如王朴之;言惟幽燕不可得而取,至於宣和,則舉國以殉之矣。伺,相吏翻。〉

 

 지금 사졸들은 날카롭게 훈련되어 있고 갑병은 준비되어 있으며 여러 아랫사람들은 법을 두려워하며 제장들은 힘을 다하고 있으니, 1년 후면 군대를 출동시킬 수 있으며, 의당 여름과 가을에서부터 차곡차곡 축적하여 변경을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今士卒精練,甲兵有備,群下畏法,諸將效力,期年之後可以出師,〈期,讀曰朞。〉宜自夏秋蓄積實邊矣。」〈蓄積於邊上以為用兵之備。〉

 

 황상은 기뻐게 이것을 받아들였다. 이때에 여러 신하들은 대부분 일상적인 것을 지키며 편안하게 넘어가고자 하였으므로 대답할 것들 가운데서 취할 수 있는 것은 적었지만 오직 왕박은 정신이 높고 기상이 강하며 지모도 있고 단안을 내릴 수 있었으니, 무릇 계획한 것을 모두 황상의 뜻에 맞았으므로 황상은 이로부터 그의 기상과 지식을 중히 여겼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간의대부로 승진하였고, 지개봉부사가 되었다.

 上欣然訥之。 時群臣多守常偷安,所對少有可取者,〈少,詩沼翻。〉惟朴神峻氣勁,有謀能斷,〈斷,丁亂翻。〉凡所規畫,皆稱上意,〈稱,尺證翻。〉上由是重其氣 〈【章:十二行本「氣」作「器」;乙十一行本同;孔本同;退齋校同。】〉識,末幾,遷左諫議大夫,知開封府事。〈開封在輦轂下,事繁職重。史言世宗屬任王 朴自此而重。然朴先事上於潛藩,其君臣相得亦有素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