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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誨의 실각과 처형/寒露節(10:39)初候鴻雁來賓(기러기 온다)2日(陰9/4)庚寅

solpee 2021. 10. 8. 16:57

《後唐紀6 明宗 長興 元年》〈庚寅, 930年〉

 

 54. 석경당이 촉을 정벌하면서 아직 공로가 없었는데, 사자들 가운데 군대의 앞에서 와서 대부분 길이 험하고 좁아서 군사들이 전진시키기가 심히 어려우며 관우의 사람들은 양식을 운반하는 데에 지쳐서 산골짜기로 숨어들기도 하고 모여서 도적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황상이 이를 걱정하며 12월 23일에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누가 나의 일을 처리해줄 사람인가? 내 마땅히 스스로 출정해야할 뿐이다."

 안중회가 말하였다.

 "신의 직위는 기밀에 참여하는 것인데 군대의 위엄이 떨쳐지지 못한것은 신의 죄이니, 신이 청컨대 스스로 가서 전투를 독려하게 해 주십시오."

 황상이 이를 허락하였다.

 54. 石敬瑭征蜀未有功,使者自軍前來,多言道險狹,進兵甚難,關右之人疲於轉餉,往往竄匿山谷,聚為盜賊。上憂之,壬子,謂近臣曰:「誰能辦吾事者!吾當自行耳。」安重誨曰:「臣職忝機密,軍威不振,臣之罪也,臣請自往督戰。」上許之。

 

 안중회는 즉시 하직 인사를 하고, 24일에 드디어 떠나서 하루에 수백리를 달렸다.

 서방의 번진들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전백과 꼴 그리고 양식이 밤낮으로 수레에 실려 이주로 가니, 사람들과 가축들 가운데 산골짜기에 넘어져 죽은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重誨即拜辭,癸丑,遂行,日馳數百里。西方藩鎮聞之,無不惶駭。〈陝州保義軍,華州鎮國軍,同州匡國軍,耀州順義軍,鳳翔,山南西道,皆西方藩鎮也。〉錢帛、芻糧晝夜輦運赴利州,人畜斃踣於山谷者不可勝紀。〈踣,蒲北翻。勝,音升。〉

 

 당시에 황상이 이미 안중회를 멀리하였고, 석경당은 본래 서정을 하고자 하지 아니하였는데, 안중회가 황상의 곁을 떠나게 되자, 마침내 감히 누차 표문을 올려서 주청하고 논의하면서 촉을 토벌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황상도 자못 그것을 그럴 것이라고 여겼다.

 時上已疏重誨,石敬瑭本不欲西征,及重誨離上側,〈離,力智翻。〉乃敢累表奏論,以為蜀不可伐,上頗然之。

 

《後唐紀6 明宗 長興 2年》〈辛卯, 931年〉

 

 ⑤. 애초에, 봉상절도사 주홍소는 안중회에게 아첨하며 섬겨서 연속해서 큰 진을 얻었다.

 안중회가 봉상을 지나가자 주홍소가 말머리에서 영접하여 절을 하며 부사에 묵게 하였으며, 침실로 인도하여 들이고서 처와 자식들은 둘러싸고 절을 하게 하였으며, 술과 음식을 받들어 올리는데 예의가 심히 공손하였다.

 안중회가 주홍소를 위하여 울면서 말하였다.

 "참소하는 사람들이 교묘하게 꾸며대어서 거의 벗어나지 못할 뻔 하였는데, 주상께서 밝게 살피신 것에 의지하여서 종족을 지킬 수 있었소."

 ⑤. 初,鳳翔節度使朱弘昭諂事安重誨,連得大鎮。重誨過鳳翔,弘昭迎拜馬首,館於府舍,〈館,古玩翻。〉延入寢室,妻子羅拜,奉進酒食,禮甚謹。重誨為弘昭泣言:「讒人交構,幾不免,賴主上明察,得保宗族。」〈為,于偽翻。讒人,謂李行德、張儉等,事見上年。〉

 

 안중회가 이미 떠나가자 주홍소가 즉시 주문을 올렸다.

 "안중회가 원망을 하며 악담을 하였으니 행영에 도착하게 해서는 아니 되며 석경당의 병권을 탈취할까 두렵습니다."

 또 석경당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였다.

 "안중회는 행동거지가 맹랑하니 만약 군영 앞에 도착하면 장수와 사졸들이 의심하고 놀라워하여 싸우지도 아니하고 스스로 궤산할까 두려운데, 의당 그를 맞아서 저지하십시오."

 석경당이 크게 두려워서 즉시 말씀을 올렸다.

 "안중회가 도착하면 인심에 변화가 있을까 두려우니 의당 신소히 징소하여 돌아가게 하십시오."

 重誨既去,弘昭節奏「重誨怨望,有惡言,不可令至行營,恐奪石敬瑭兵柄。」又遺敬瑭書,言「重誨舉措孟浪,〈遺唯季翻。孟浪,猶言張大而無拘束也。〉若至軍前,恐將士疑駭,不戰自潰,宜逆止之。」敬瑭大懼,即上言:「重誨至,恐人情有變,宜急徵還。」

 

 선휘사 맹한경이 서방에서부터 돌아와서 역시 안중회의 허물과 악행을 말하지 조서를 내려서 안중회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2월 1일에 석경당은 수와 낭이 이미 함락되었고 양식 운송이 계속되지 못하자 군영을 불태우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군전이 맹지상에게 보고하였는데 맹지상이 그 편지를 숨기고 조계량에게 말하였다.

 "북군이 점차 전진하니 어찌 하겠소?"

 조계량이 말하였다.

 "면주를 지나지 못하고 반드시 도망갈 것입니다."

 맹지상이 그 연고를 물으니, 말하였다.

 "우리는 평안하고 저들은 피로하며, 저들 현군은 1천 리나 들어왔고, 양식은 다 떨어졌으니, 도망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宣徽使孟漢瓊自西方還,亦言重誨過惡,有詔召重誨還。

二月,己丑朔,石敬瑭以遂、閬既陷,糧運不繼,燒營北歸。軍前以告孟知祥,〈軍前,謂趙廷隱、李肇之軍。〉知祥匿其書,謂趙季良曰:「北軍漸進,柰何﹖」季良曰:「不過綿州,必遁。」知祥問其故,曰:「我逸彼勞,彼懸軍重,糧盡,能無遁乎!」〈史言懸軍涉險,糧道不繼,為敵人所窺。〉知祥大笑,以書示之。

 

 

 ⑥. 안중회가 삼천에 도착하였는데, 조속히 돌아오라는 조서를 받았으며, 봉상을 지나면서 주홍소가 받아들이지 않자, 안중회는 두려워서 말을 달려 동쪽으로 갔다.

 ⑥. 安重誨至三泉,得詔亟歸;過鳳翔,硃弘昭不内,重誨惧,馳騎而東。

 

 ⑨. 13일에 추밀사· 겸중서령인 안중회를 호국절도사로 삼았다. 조봉이 황상에게 말하였다.

 "안중외는 폐하의 가신이며 그 마음은 끝내 주군을 배반하지 않았을 것이나 다만 두루 방어할 수 없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참소를 당한 것이니, 폐하께서 그의 마음을 살피지 아니하시면 죽는 것은 몇 날 남아있지 않습니다."

 ⑨. 辛丑,以樞密使兼中書令安重誨為護國節度使。〈安重誨還,未至京師而除河中,不容入朝也。〉趙鳳言於上曰:「重誨陛下家臣,其心終不叛主,但以不能周防,為人所讒;陛下不察其心,死〈【章:十二行本「死」上有「重誨」二字;乙十一行本同。】〉無日矣。」上以為朋黨,不悅。〈考趙鳳前後所言,誠有黨有重誨之心。明宗已察見其情,而趙鳳言之不已,乃所以速其死也。

 

 ⑯. 황제가 이미 안중회에게서 중추업무를 해제하고 나자 마침내 이종가를 불러 울면서 말하였다.

 "안중회의 생각과 같이 되었다면 네가 어찌 다시 나를 알현할 수 있었겠는가?"

 3월 8일에 이종가를 좌위대장군으로 삼았다.

 ⑯. 帝既解安重誨樞務,乃召李從珂,泣謂曰:「如重誨意,汝安得復見吾!」〈安重誨欲殺從珂事見上元年。〉丙寅,以從珂為左衛大將軍。

 

 ㉚. 호국절도사· 겸중서령인 안중회가 마음으로 스스로 불안해하다가 표문을 올려 치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윤5월 3일에 제서를 내려서 태자태사로 치사하게 하였다. 이날에 그의 아들인 안승찬과 안중서는 하중으로 도망갔다.

 ㉚. 護國節度使兼中書令安重誨內不自安,表請致仕;閏月,庚寅,制以太子太師致仕。是日,其子崇贊、崇緒逃奔河中。

 

 9일에 보의절도사 이종장을 호국절도사로 삼았다.

 11일에 보군지휘사 약언조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하중으로 향하게 하였다.

 안승찬이 하중에 도착하자 안중회가 놀라며 말하였다.

 "너희들이 어떻게 올 수 있었느냐?"

 이미 그렇게 하고 나서 말하였다.

 "내가 이를 알진대 이는 그분의 뜻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였을 뿐이다. 내가 죽음을 가지고 순국하는데 무릇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느냐?"

 마침내 두 아들을 붙잡아서 표문을 올리고 압송하여 대궐에 가게 하였다.

 壬辰,以保義節度使李從璋為護國節度使。甲午,遣步軍指揮使藥彥稠將兵趣河中。〈搖於讒口,遣藥彥稠以兵討安重誨。〉

安崇贊等至河中,重誨驚曰:「汝安得來﹖」既而曰:「吾知之矣,此非渠意,為人所使耳。〈渠,猶言其也。〉吾以死徇國,夫復何言!」〈夫,音扶。復,扶又翻。〉乃執二子表送詣闕。

 

 다음날에 어떤 중사가 도착하여 안중회를 보자 오랫동안 통곡하였다. 안중회가 그 연고를 묻자 중사가 말하였다.

 "사람들은 영공이 다른 뜻을 갖고 있다고 말하여 조정에서 이미 약언조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도착하였습니다."

 안중회가 말하였다.

 "내가 나라의 은덕을 입은 것은 죽어도 갚을 수 없는데 감히 다른 뜻을 가지다니! 국가를 더욱 번거롭게 하고 군사를 발동하게 되어 주상에게 걱정을 끼쳤으니 죄가 더욱 무겁게 되었다."

 안숭찬 등이 섬에 도착하였는데 조서를 내려서 옥에 가두라고 하였다.

 明日,有中使至,見重誨,慟哭久之;重誨問其故,中使曰:「人言令公有異志,朝廷已遣藥彥稠將兵至矣。」重誨曰:「吾受國恩,死不足報,敢有異志!更煩國家發兵,貽主上之憂,罪益重矣。」崇贊等至有陝,有詔繫獄。

 

 황성사 곽광업은 평소 안중회를 미워하였는데 황제가 파견하여 하중으로 가서 그를 살피게 하면서 말하였다.

 "안중회가 과연 다른 뜻을 가졌다면 그를 죽여라."

 곽광업이 하중에 도착하자 이종장이 갑옷을 입은 군사들을 데리고 그의 집을 포위하고 스스로 들어가서 안중회를 만나보고 뜰아래에서 절을 하였다.

 안중회가 놀라서 계단에서 내려와 답배하니, 이종장이 벌떡 일어나서 그의 머리를 내리쳤고, 처인 장씨가 놀라서 구원하자 역시 그를 쳐서 죽였다.

 皇城使翟光鄴素惡重誨,〈惡,烏路翻。〉帝遣詣河中察之,曰:「重誨果有異志則誅之。」〈史言帝無決然殺重誨之旨。郭崇韜之死亦猶是也。上無道揆,下無法守,無怪乎爾。〉光鄴至河中,李從璋以甲士圍其第,自入見重誨,拜于庭下。重誨驚,降階答拜,從璋奮撾擊其首;妻張氏驚救,亦撾殺之。〈考異曰:五代史闕文:「李從璋奮撾擊重誨于地,重誨曰:『重誨死無恨,但不與官家誅得潞王,他日必為朝廷之患。』言終而絕。」按重誨自以私憾欲殺從珂,當是時從珂未有跋扈之跡,重誨何以知其為朝廷之患!此恐是清泰篡立之後,人譽重誨者造此語,未可信也。〉

 

 주문이 도착하자 12일에 조서를 내려서 안중회가 맹지상· 동장· 전류를 이간한 것을 안중회의 죄로 삼았고, 또 그가 스스로 회남을 공격하여 병권을 잡으려고 도모하였다고 무고하고, 원래 수행하였던 사람을 파견하여 몰래 두 아들을 본도에 돌아오게 하였다 하고 이에 두 아들을 나란히 죽였다.

 奏至,己亥,下詔,以重誨離間孟知祥、董璋、錢鏐為重誨罪,〈間,古莧翻。離間事並見上。〉又誣其欲自擊淮南以圖兵柄,〈因邊彥溫所告而誣之。〉遣元隨竊二子歸本道;并二子誅之。

 

 

 ㉛. 19일에 황제는 서천진주관 소원과 동천정군 유징을 파견하여 각기 본진으로 돌아가게 하고, 안중회가 명령을 오로지하였으므로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게 하였고, 지금 이미 처형되어 죽었다고 타이르게 하였다.

 ㉛. 丙午,帝遣西川進奏官蘇愿、東川軍將劉澄各還本鎮,諭以安重誨專命,興兵致討,今已伏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