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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남절도사 성예(成汭)/白露節初候鴻雁萊5日(陰8/5)壬戌

solpee 2021. 9. 10. 16:50

 

《唐紀80 宗 天福 3年》〈癸亥, 903年

 

 ⑲. 무창절도사 두홍이 주전충에게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주전충은 그의 장수인 한경을 파견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섭구에 주둔하게 하고, 사자를 파견하여 형남절도사 성예· 무안절도사 마은· 무정절도사 뇌언위에게 말하게 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두홍을 구원하게 하였다.

 ⑲. 杜洪求救於朱全忠,全忠遣其將韓勍將萬人屯灄口,〈勍,渠京翻。〉遣使語荊南節度使成汭、武安節度使馬殷、武貞節度使雷彥威,〈語,牛倨翻。曰語者,無朝廷詔敕,以意諭之。〉令出兵救洪。

 

 성예는 주전충이 강대한 것을 두려워하고, 또 강· 화의 땅을 침범하여서 스스로의 영역을 넓히려고 하여, 수군 10만을 출동시켜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갔다.

 성예는 큰 전함을 만들었는데 3년이 걸려 완성하였으며, 그 규모가 부서와 같으니, 그것을 '화주재'라 부르고, 그 나머지는 그것들을 '재산'· '절해'· '벽랑' 과 같은 것들이 매우 많았다,

 汭畏全忠之強,且欲侵江、淮之地以自廣,發舟師十萬,沿江東下。汭作巨艦,三年而成,〈艦,戶黯翻。〉制度如府署,謂之「和舟載」,〈署,廨舍也;言其舟長闊,和荊州皆載其上。「舟」,當作「州」。〉〈【章︰十二行本正作「州」;乙十一行本同。〉其餘謂之「齊山」、「截海」、「劈浪」之類甚衆。〈齊山,言其高也。截海,言其長也。劈浪,言其輕疾也。劈,匹歷翻。〉

 

 장서기 이정이 간하였다.

 "지금 매 전함에 갑옷을 갖춘 군사 1천 명을 싣고, 쌀은 그것의 배를 실었는데, 천천히 하거나 급히 하거나 간에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오왕의 군사는 빠르고 가벼워서 함께 각축을 벌이기가 어렵고, 무릉과 장사는 모두 우리의 원수인데 어찌 뒤돌아보게 될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掌書記李珽諫曰︰〈珽,他鼎翻。〉「今每艦載甲士千人,稻米倍之,緩急不可動也。吳兵剽輕,〈剽,匹妙翻。輕,苦定翻。〉難與角逐;武陵、長沙,皆吾讎也;〈武陵,謂雷彥威。長沙,謂馬殷。〉豈得不爲反顧之慮乎!

 

 날랜 장수를 파견하여 장차 파릉에 주둔하게 하고 대군이 그들과 강 언덕을 마주보게 하면서 성벽을 굳게 하여 싸우지 않으면 한 달이 넘지 않아서 오왕의 군사는 식량이 다하고 스스로 도망치게 하여 악주의 포위가 풀어지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성예는 듣지 않았다. 이정은 이증의 5대손이다.

 不若遣驍將屯巴陵,〈《九域志》︰巴陵東北至鄂州三百五十里。〉大軍與之對岸,堅壁勿戰,不過一月,吳兵食盡自遁,鄂圍解矣。」〈楊行密時封吳王,故謂其兵爲吳兵。〉汭不聽。珽,憕之五世孫也。〈李憕,天寶之末死於安祿山之難。珽後歸中原,仕於梁。

 

 ㉒. 성예가 행군하여 아직 악주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마은은 대장 허덕훈을 파견하여 수군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뇌언위는 그의 장수인 구양사를 파견하여 수군 3천여 명을 거느리고 형강구에서 만나 비어있는 틈을 타서 강릉을 습격하게 하니, 5월 10일에 그곳을 함락시켜서 그곳의 사람들과 재화를 모두 약탈해가지고 떠났다. 장사들은 그들의 가족을 잃어버려 싸울 의지를 가지지 못했다.

 ㉒. 成汭行未至鄂州,馬殷遣大將許德勳將舟師萬餘人,雷彥威遣其將歐陽思將舟師三千餘人會於荊江口,〈大江自蜀東流入荊州界,謂之荊江。荊江口,卽洞庭之水與大江之水會處。〉乘虛襲江陵,庚戌,陷之,盡掠其人及貨財而去。將士亡其家,皆無鬬志。〈此言成汭之將士也。〉

 

 이신복은 그들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가벼운 배를 타고 앞으로 가서 그들을 엿보고, 제장들에게 말하였다.

 "저들의 전함은 비록 많지만 서로 이어져 있지 않아서 제압하기 쉬울 것이니, 마땅히 급하게 그들을 공격해야 할 것이다."

 李神福聞其將至,自乘輕舟前覘之,〈覘,丑廉翻,又丑豔翻。〉謂諸將曰︰「彼戰艦雖多而不相屬,易制也,〈屬,之欲翻。易,以豉翻。〉當急擊之!」

 

 12일에 이신복이 그의 장수인 진배와 양융을 파견하여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성예를 군산에서 맞아서 쳐서 그들을 대파하고,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서 그의 함대를 불사르니, 사졸들이 모두 무너지고, 성예는 물에 뛰어들어 죽었으며(성예는 888년 4월에 형남을 점거 16년 간 존속하다 소멸됨), 그의 전함 200척을 노획하였다. 한경이 그 소식을 듣고 역시 군사를 이끌고 떠났다.

 壬子,神福遣其將秦裴、楊戎將衆數千逆擊汭於君山,〈君山在洞庭湖中,方六十里,亦名洞庭之山。《巴陵志》曰︰湘君所遊,故曰君山。將,卽亮翻。〉大破之,因風縱火,焚其艦,士卒皆潰,汭赴水死,〈僖宗文德元年,成汭襲據荊南,至是敗亡。《考異》曰︰《新紀》︰「彥威之弟彥恭陷江陵。」今從《編遺錄》。《舊紀》及薛居正《五代史》、《十國紀年》皆云︰「汭未至鄂渚,江陵已陷,將士亡其家,皆無鬬志。」按《新紀》、《十國紀年》皆云︰「壬子,汭敗死。」壬子,此月十二日也,而《編遺錄》云二十二日陷江陵,今不取。《北夢瑣言》云天祐中汭死,尤誤也。〉獲其戰艦二百艘。〈艘,蘇遭翻。〉韓勍聞之,亦引兵去。

 

 허덕훈이 돌아오면서 악주를 지나는데, 자사 등진충이 문을 열고 쇠고기와 술을 마련하여 호군하였고, 허덕훈이 화복의 이해를 가지고 타이르자, 등진충은 드디어 전 가족을 들어서 장사로 이주(이로서 886년 12월에 등진사가 악주를 점거한 이후 그 동생 등진충이 계속 16년 간 할거하다가 마은에게 귀속)시켰다.

 許德勳還過岳州,刺史鄧進忠開門具牛酒犒軍,德勳諭以禍福,進忠遂舉族遷于長沙。〈僖宗光啓二年,鄧進思取岳州,傳弟進忠,至是而亡。《考異》曰︰《馬氏行年記》︰「天復三年,自荊南振旅還,遂入岳州,降刺史鄧進思。」《九國志‧楚世家》︰「天祐二年七月,岳州刺史鄧進忠帥其衆來降。」《許德勳傳》云︰「天祐二年,領兵略地荊南,還經岳州,刺史鄧進忠以城歸附。」《新紀》全用《九國志》年月。《湖湘故事》言︰「開平中,收荊南回,進忠以城降。」又載何致雍《天策寺碑銘》云︰「乃克桂林,乃襲荊渚,彼岳之陽,旋師而取。」天祐二年十月,朱全忠謀討襄州趙匡凝,九月,克襄州,始命楊師厚攻荊南。然則七月許德勳何繇略地荊南!蓋《九國志》之誤。天復三年,成汭敗死,德勳及雷彥威襲江陵,還取岳州,與何致雍《碑》意略同,故以《行年記》爲據。〉

 

 마은은 허덕훈을 악주자사로 삼고, 등진충을 형주자사로 삼았다.

 뇌언위는 교활하고 잔인하며 부친의 기풍을 가지고 있어서 항상 배를 띄워 이웃의 경게에서 불사르고 약탈하니, 형과 악 사이에는 거의 사람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馬殷以德勳爲岳州刺史,以進忠爲衡州刺史。

雷彥威狡獪殘忍,有父風,〈獪,古外翻。雷彥威父滿。〉常泛舟焚掠鄰境,荊、鄂之間,殆至無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