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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 등에게 시해된 경종/芒種節末候反舌無聲5日 (陰5/11)己亥

solpee 2021. 6. 19. 15:44

《唐紀59 敬宗 寶曆 元》〈乙巳, 825年〉

 

 ⑫. 황상이 여산의 온천탕으로 가고자 하였는데, 좌복야 이강과 간의대부 장중방등이 여러 차례 간언하였으나 듣지 않았고, 습유 장권여가 자신전 아래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간하였다.

 ⑫. 上欲幸驪山溫湯,左僕射李絳、諫議大夫張仲等屢諫不聽,拾遺張權輿伏紫宸殿下,叩頭諫曰︰

 

 "옛날 주의 유왕이 여산으로 갔다가 견융에게 살해되었고, 진 시황은 여산에 장사되고 나서 나라가 망하였으며, 현종은 여산을 궁궐로 하니 안록산이 난을 일으켰고, 선황께선 여산으로 행차하셨다가 향년이 길지 못하셨습니다."

 「昔周幽王幸驪山,爲犬戎所殺;〈《世本》︰周幽王愛褒姒,褒姒不好笑,王欲其笑萬方,終不笑。幽王爲烽燧,有寇至則舉烽火,諸侯悉至而無寇,褒姒乃大笑。幽王悅之,爲數舉烽火。其後不信,諸侯益不至。西夷犬戎攻幽王,王舉烽徵兵,兵莫至,遂殺幽王驪山下。〉秦始皇葬驪山,國亡;玄宗宮驪山而祿山亂;先帝幸驪山,享年不長。」〈事並見前《紀》。〉

 

 황상이 말하였다.

 "여산이 이처럼 흉한가? 내가 마땅히 한 번 가서 저 사람 말을 시험해야겠다.

 11월 21일에 온천탕으로 행차하였다가, 그날로 궁궐에 되돌아 오면서 좌우에게 말하였다.

 "저들 머리 조아렸던 사람이 말한 것이 어찌 충분히 믿을 만하겠는가?"

 上曰︰「驪山若此之凶邪?我宜一往以驗彼言。」十一月,庚寅,幸溫湯,卽日還宮,謂左右曰︰「彼叩頭者之言,安足信哉!」〈史言敬宗荒縱而愎諫。

 

《唐紀59 敬宗 寶曆 2》〈丙午, 826年〉

 

 ⑰.  11월, 황상이 즐겁게 노는 것에 절도가 없었고, 여러 소인배들과 허물없이 가까이 하며 격구를 즐기고 수박을 좋아하였는데, 금군과 여러 도가 다투어 역사를 바쳤고, 또 전 1만 민을 내원에 주며 역사를 불러 모으도록 하여 낮과 밤으로 곁을 떠나지 않도록 하였는데, 또 깊은 밤에 스스로 여우와 너구리 잡는 것을 좋아하였다.

 ⑰. 上遊戲無度,狎暱羣小,〈暱,尼質翻。〉善擊毬,好手搏,〈好,呼到翻;下同。〉禁軍及諸道爭獻力士,又以錢萬緡付內園令召募力士,晝夜不離側;〈離,力智翻。〉又好深夜自捕狐狸。

 

 성격이 좁고 급하여 역사기 혹 은총을 믿고 겸손하지 아니하면 번번이 귀양을 보내고 적몰하였으며, 환관이 조그만 잘못을 저지르면, 자칫하다가는 종아리를 맞는 매질을 받았으므로, 모두 원망하며 두려워하였다.

 性復褊急,〈復,扶又翻。〉力士或恃恩不遜,輒配流、籍沒;宦官小過,動遭捶撻,皆怨且懼。

 

 12월 8일에 황상이 밤 사냥을 하고 궁궐로 돌아와서 환관인 유극명· 전무정· 허문단 그리고 격구장군인 소좌명· 왕가헌· 석종관· 염유직 등 28명과 더불어 술을 마셨다. 황상이 술에 취하여 방으로 들어가 갱의를 하는데, 전 위에 있는 촛불이 갑자기 꺼지며 소좌명 등이 황상을 방 안에서 시해(18)하였다.

 十二月,辛丑,上夜獵還宮,與宦官劉克明、田務澄、許文端及擊毬軍將蘇佐明、王嘉憲、石從寬、閻惟直等二十八人飲酒。上酒酣,入室更衣,〈更,工衡翻。〉殿上燭忽滅,蘇佐明等弒上於室內。〈年十八。〉

 

 유극명 등이 황상의 뜻이라고 고쳐서 말하며, 한림학사 노수에게 명하여 유언으로 남기는 제서를 초하도록 하고, 絳王 이오로 하여금 권구당군국사를 맡게 하였다. 9일에 유제를 선포하며, 강왕이 자신전의 밖에 있는 행랑채에서 재상과 대신들을 만났다.

 劉克明等矯稱上旨,命翰林學士路隋草遺制,以絳王悟權句當軍國事。〈絳王悟,憲宗子。句,古侯翻。當,丁浪翻。〉壬寅,宣遺制,絳王見宰相百官於紫宸外廡。

 

 유극명 등은 내시 가운데 권력을 잡은 사람들을 바꾸어 세워 놓고자 하니, 이에 추밀사 왕수징· 양승화· 중위 위종간·  양수겸이 논의하여 확정하고, 위병들로 하여금 江王 이함을 맞이하여 궁궐로 들이도록 하고, 좌·우신책·비룡의 군사를 징발하여 나아가서 적의 무리를 토벌하여 목을 베었다. 유극명은 우물로 달아났는데, 끌고나와 목을 베었다. 絳王 이오는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에게 해를 당하였다.

 克明等欲易置內侍之執權者,於是樞密使王守澄、楊承和、中尉魏從簡、梁守謙定議,〈唐末謂兩樞密、兩中尉爲四貴。〉以衞兵迎江王涵入宮,〈自十六宅迎入宮也。〉發左‧右神策、飛龍兵進討賊黨,盡斬之。克明赴井,出而斬之。絳王爲亂兵所害。

 

 이때 일이 갑자기 일어났으므로 왕수징은 한림학사 위처후가 옛날의 일을 넓게 훤히 알고 있어서 하룻저녁에 일을 처리하면서 모두 그와 함께 논의하였다. 왕수징 등이 조정의 안팎에 호령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이유로 삼을 만한 말을 찾지 못하였다. 위처후가 말하였다.

 "명분을 바로 하여 죄로 토벌한다면, 의에 있어서 어찌 의심을 하겠으며, 어찌 어그러진 것을 의지하여 숨기거나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時事起蒼猝,守澄以翰林學士韋處厚博通古今,一夕處置,皆與之共議。〈處,昌呂翻。〉守澄等欲號令中外,而疑所以爲辭。處厚曰︰「正名討罪,於義何嫌;安可依違,有所諱避!」

 

 또 물었다.

 "강왕은 마땅히 어떻게 천조해야 하는가?"

 위처후가 말하였다.

 "내일 아침에 마땅히 왕의 교령을 조정의 안과 밖으로 널리 알려서 이미 궁궐 안의 어려움을 평정하였다고 하십시오. 그런 뒤에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세 번 표문을 올려 나아갈 것을 권하게 하고, 태황태후가 책봉을 하는 명을 내리게 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게하십시오."

 又問︰「江王當如何踐阼?」處厚曰︰「詰朝,當以王敎布告中外以已平內難。〈詰,去吉翻。難,乃旦翻。〉然後羣臣三表勸進,以太皇太后令册命卽皇帝位。」

 

 당시 모두 그의 말을 따랐는데, 이때 다시 유사에게 물어볼 겨를이 없어서 무릇 백가지의 예의와 법이 모두 위처후에게서 나왔지만 화합하여 마땅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當時皆從其言,時不暇復問有司,〈復,扶又翻。〉凡百儀法,皆出於處厚,無不叶宜。

 

 10일에 배도를 섭총재로 하였다. 백관이 자신전 박의 행랑채에서 강왕을 알현하였는데, 왕이 흰 상복을 입고 눈물을 흘렸다.

 11일에 여러 군사를 소양원에서 접견하였다. 조귀진 등 여러 술사들은 경종 때에 아첨하여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어서 모두 영남이나 변방의 따으로 귀양을 보냈다.

 癸卯,以裴度攝冢宰。百官謁見江王於紫宸外廡,〈見,賢遍翻。〉王素服涕泣。甲辰,見諸軍使於少陽院。〈少陽院,以地望準之,當在宮城東北隅,太子居之,亦謂之東宮。今按閣本《大明宮圖》︰少陽院在浴堂殿東,其北又有溫室、宣徽、清思、太和、珠鏡等殿,不正在宮城東北隅也。《考異》曰︰魏謩《文宗實錄》,見軍使事承見百官下,不云別日。今從《敬宗實錄》。〉趙歸眞等諸術士及敬宗時佞幸者,皆流嶺南或邊地。

 

 12일에 문종이 즉위하였고, 이름을 李昻으로 고쳤다. 15일에 어머니 소씨를 높여 황태후로 삼았고, 황태후를 보력태후로 삼았다. 이떄 곽태후는 흥경궁에서 거주하였고, 왕태후는 의안전에서 거주하였으며, 소태후는 대내에서 거주하였다.

 乙巳,文宗卽位,更名昂。〈更,工衡翻。〉戊申,尊母蕭氏爲皇太后,王太后爲寶曆太后。是時,郭太后居興慶宮,王太后居義安殿,蕭太后居大內。

 

 황상은 성격이 효성스럽고 조심성이 깊어 세 궁을 모시기를 하나 같이 하였는데, 매번 진귀하고 특이한 물건을 손에 넣으면 먼저 교묘에 올렸고, 다음으로 세 궁을 받들었으며, 그런 뒤에 올려 들어오게 하였다. 소태후는 민(복주) 사람이다.

 上性孝謹,事三宮如一,〈自此以後,凡言上者,皆文宗也。〉每得珍異之物,先薦郊廟,次奉三宮,然後進御。蕭太后,閩人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