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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의 몽진/立夏節末候王瓜生2日(음4/5)甲子

solpee 2021. 5. 15. 15:29

《唐紀34 肅宗 志德 元載》〈丙申, 756年〉

 

 ③. .............상략.......................

 ③. 郭子儀、李光弼還常山,〈還,從宣翻,又音如字。〉史思明收散卒數萬踵其後。子儀選驍騎更挑戰,〈驍,堅堯翻。騎,奇寄翻。更,工衡翻。挑,徒了翻。〉三日,至行唐,〈卽漢南行唐縣,屬常山郡。《九域志》︰在郡北五十五里。〉賊疲,乃退。子儀乘之,又敗之於沙河。〈沙河在新樂、行唐二縣之間。敗,補邁翻。〉蔡希德至洛陽,安祿山復使將步騎二萬人北就思明,〈復,扶又翻。將,卽亮翻,又音如字。〉又使牛廷玠發范陽等郡兵萬餘人助思明,合五萬餘人,而同羅、曳落河居五分之一。子儀至恆陽,思明隨至,〈恆,戶登翻。〉子儀深溝高壘以待之;賊來則守,去則追之,晝則耀兵,夜斫其營,賊不得休息。數日,子儀、光弼議曰︰「賊倦矣,可以出戰。」〈《考異》曰︰《河洛春秋》以此爲光弼語,《汾陽家傳》作子儀語,蓋二人共議耳。〉壬午,戰于嘉山,〈據《舊史‧安祿山傳》︰嘉山在常山郡東。魏收《地形志》︰中山郡上曲陽縣有嘉山。上曲陽,卽唐之恆陽也。《考異》曰︰《實錄》云「六月壬午」,按《長曆》,六月癸未朔;壬午,五月二十九日也。《汾陽家傳》、《舊‧祿山傳》亦云「六月,戰嘉山」。《河洛春秋》云︰「六月二十五日,光弼破賊於嘉山。」今從《實錄》而改其月。〉大破之,斬首四萬級,捕虜千餘人。思明墜馬,露髻跣足步走,至暮,杖折槍歸營,〈折,而設翻。〉奔于博陵;光弼就圍之,軍聲大振。於是河北十餘郡皆殺賊守將而降。〈將,卽亮翻;下同。降,戶江翻;下同。《考異》曰︰《河洛春秋》云︰「五月,蔡希德從東都見祿山,祿山又與馬步二萬人,至邢州,取堯山、招慶,射趙州東界,效曲、鼓、鹿城間,渡洿池水,入無極,至定州。牛介從幽州占歸、檀、幽、易,兼大同、紇、蠟共萬餘人,帖思明。思明軍旣壯,共五萬餘人;其中精騎萬人,悉是同羅、曳落河,精於馳突。光弼以十五萬衆頓軍恆陽,樵採往來,人有難色,召有策者試之。時趙州司戶參軍先臣亡父包處遂上書與光弼曰︰『思明用軍,惟將勁悍,觀其布措,實謂無謀。昔秦、趙爭山,先居者勝,豈不爲勞逸勢倍,高下相懸。今宜重出軍人有膂力者五萬,被甲兩重,陌刀各二。東有高山甚大,先令五千甲士於山上設伏,後出二千人山東取糧。賊見必追之,則奔山上。伏兵馬與一百面鼓,應山上避賊百姓,壯者亦與器械,令隨大軍;老弱者令居險固守,遙爲聲援。賊必圍山攻之;城內出五萬人,擇將二人統之,各領二萬,一將於南面,一將於城北門出。賊營悉在山東,其軍夜出,長去賊三十里行;廣張左右翼,以天曉合圍。其軍每二十五爲隊,每隊置旗兩口,鼕鼕鼓子一具,圍落纔合,則動鼓子;賊必不測人之多少。然於城東門出軍一萬人,布掌底陳,山上亦擊鼓而下,齊攻之,必克勝。』光弼尤然此計,乃出朔方計會,出人取糧。賊果然來襲,卽奔山上。至六月二十五日,依前計大破賊於嘉山陣,斬首數萬餘級,生擒數千。思明落馬步遁;至暮,拄折槍歸營。希德中槍索,押衙劉旻斫斷而走。生擒得旻。至二十六日,覆陣。二十七日,有詔至恆陽,云潼關失守,駕幸劍南。」包諝專欲歸功其父,而他書皆無之。今不取。〉漁陽路再絕,〈漁陽,卽謂范陽也。范陽郡,幽州。其後又分置薊州漁陽郡,二郡始各有分界。然范陽節度盡統幽、易、平、檀、嬀、燕等州,賊之根本實在范陽也。唐人於此時多以范陽、漁陽通言之,白居易詩所謂「漁陽鼙鼓動地來」,是以范陽通爲漁陽也。前此顏杲卿以常山返正,漁陽路絕矣;杲卿敗而復通。今郭、李破史思明,故再絕。〉賊往來者皆輕騎竊過,多爲官軍所獲,將士家在漁陽者無不搖心。

祿山大懼,召高尚、嚴莊詬之曰︰「汝數年敎我反,以爲萬全。今守潼關,數月不能進,北路已絕,諸軍四合,吾所有者止汴、鄭數州而已,萬全何在?汝自今勿來見我!」尚、莊懼,數日不敢見。田乾眞自關下來,爲尚、莊說祿山曰︰〈爲,于僞翻。說,式芮翻;下密說同。〉「自古帝王經營大業,皆有勝敗,豈能一舉而成!今四方軍壘雖多,皆新募烏合之衆,未更行陳,〈更,工衡翻。行,戶剛翻。陳,讀曰陣。〉豈能敵我薊北勁銳之兵,何足深憂!尚、莊皆佐命元勳,陛下一旦絕之,使諸將聞之,誰不內懼!若上下離心,臣竊爲陛下危之!」祿山喜曰︰「阿浩,汝能豁我心事。」卽召尚、莊,置酒酣宴,自爲之歌以侑酒,待之如初。阿浩,乾眞小字也。〈爲,于僞翻。《考異》曰︰《祿山事迹》作「阿法」,今從《唐曆》、《統紀》、《舊傳》。〉祿山議棄洛陽,走歸范陽,計未決。

是時,天下以楊國忠驕縱召亂,莫不切齒。又,祿山起兵以誅國忠爲名,王思禮密說哥舒翰,使抗表請誅國忠,〈說,式芮翻。《考異》曰︰《玄宗實錄》云︰「或勸翰︰『留兵二萬守關,悉以精銳回誅楊國忠,此漢挫七國之計也,公以爲何如?』翰心許之,未發。有客泄其謀於國忠,國忠大懼。」按翰若回兵誅國忠,則正與祿山無異。思禮勸翰抗表言國忠罪猶不敢,況敢舉兵乎!事必不然。且翰雖心許,他人安得知之!正由翰按兵不進,故國忠及其黨疑懼,恐翰回兵誅之,其實翰無此心也。若果欲誅國忠,則安肯慟哭出關乎!《幸蜀記》云︰「翰使王思禮至陝郡,見賊僞御史中丞、無敵將軍、平西大使崔乾祐,令傳檄與祿山,數其干紀亂常,背天逆理,且曰︰『若面縛而來,束身歸死,赦爾九族,罪爾一身。如更屈強王師,遲疑未決,大軍一鼓,玉石俱焚。爾審思之,悔無及矣。』」按翰與乾祐方對壘相攻,思禮軍中大將,豈可使齎罵祿山之檄詣乾祐乎!必無此理。今不取。〉翰不應。思禮又請以三十騎劫取以來,至潼關殺之,翰曰︰「如此,乃翰反,非祿山也。」或說國忠︰「今朝廷重兵盡在翰手,翰若援旗西指,〈說,式芮翻。援,于元翻。〉於公豈不危哉!」國忠大懼,乃奏︰「潼關大軍雖盛,而後無繼,萬一失利,京師可憂,請選監牧小兒三千於苑中訓練。」〈時監牧、五坊、禁苑之卒,率謂之小兒。〉上許之,使劍南軍將李福德等領之。又募萬人屯灞上,令所親杜乾運將之,〈將,卽亮翻。〉名爲禦賊,實備翰也。翰聞之,亦恐爲國忠所圖,乃表請灞上軍隸潼關;六月,癸未,召杜乾運詣關,因事斬之;國忠益懼。

會有告崔乾祐在陜,兵不滿四千,皆羸弱無備,〈此祿山之用間也。陜,失冉翻。〉上遣使趣哥舒翰進兵復陜、洛。〈趣,讀曰促;下以義推。〉翰奏曰︰「祿山久習用兵,今始爲逆,豈肯無備!是必羸師以誘我,若往,正墮其計中。〈羸,倫爲翻。誘,羊久翻。〉且賊遠來,利在速戰;官軍據險以扼之,利在堅守。況賊殘虐失衆,兵勢日蹙,將有內變;因而乘之,可不戰擒也。要在成功,何必務速!今諸道徵兵尚多未集,請且待之。」郭子儀、李光弼亦上言︰「請引兵北取范陽,覆其巢穴,質賊黨妻子以招之,〈上,時掌翻。質,音致。〉賊必內潰。潼關大軍,唯應固守以弊之,不可輕出。」國忠疑翰謀己,言於上,以賊方無備,而翰逗留,將失機會。上以爲然,續遣中使趣之,項背相望。翰不得已,撫膺慟哭;丙戌,引兵出關。〈逗,音豆。使,疏吏翻。趣,讀曰促。《考異》曰︰《幸蜀記》曰︰「賊將崔乾祐於陜郡西潛鋒蓄銳,臥鼓偃旗,而偵者奏云,賊全無備。上然之。」又曰︰「玄宗久處太平,不練軍事,旣被國忠眩惑,中使相繼督責於公,不得已,撫膺慟哭久之,乃引師出關。國忠又令杜乾運領所募兵於馮翊境上,潛備哥舒公。公曰︰『今軍出關,勢十全矣。更置乾運於側以爲疑軍,人心憂疑,卽不俟見賊,吾軍潰矣。必當併之以除內憂。』遂令衙前總管叱萬進追軍,誡之曰︰『若不受追,卽便斬頭來。』乾運果不敢赴。進詐詞如欲叛哥舒,竊請見。乾運遂喜,遽見之。與語,進忽抽佩刀曰︰『奉處分,取公頭。』乾運驚懼。其左右悉新招募者,悉投仗散走,進遂斬乾運,攜首至於軍門,衆皆攝氣,乃統其軍赴關。」按翰若擅殺乾運而奪其軍,則是已反也,朝廷安能趣之出關乎!蓋奏乞以其軍隸潼關,朝廷已許之,翰召乾運受處分,或有所違拒,因託軍法以斬之耳。凌準《邠志》云︰「郭子儀、李光弼將進軍,聞朝廷議出潼關,圖復陜、洛,二公議曰︰『哥舒公老疾昏耄,賊素知諸軍烏合,不足以戰。今祿山悉銳南馳宛、洛,賊之餘衆盡委思明,我且破之,便覆其巢。質叛徒之族,取祿山之首,其勢必矣。若潼關出師,有戰必敗。關城不守,京室有變,天下之亂,何可平之!』乃陳利害以聞,且請固關無出。」《唐曆》︰「會偵人自陜至,云︰『崔乾祐所將衆不滿四千,不足圖也。』上大悅。」《舊‧翰傳》︰「翰旣斬乾運,心不自安,又素有風疾,至是頗甚,軍中之務不復躬親,委政於行軍司馬田良丘。良丘復不敢專斷,敎令不一,頗無部伍。其將王思禮、李承光又爭長不叶,人無鬬志。」今兼采之。〉

己丑,遇崔乾祐之軍於靈寶西原。〈靈寶縣更名,見二百十五卷天寶元年。〉乾祐據險以待之,南薄山,北阻河,隘道七十里。庚寅,官軍與乾祐會戰。〈薄,伯各翻。隘,烏介翻。《考異》曰︰《肅宗實錄》︰「乙酉,翰與乾祐會戰。」《舊傳》︰「四日,次靈寶西原。八日,與賊交戰。」《新傳》︰「丙戌,次靈寶西原。庚寅,與乾祐戰。」按翰軍旣遇賊,必不留四日然後戰。《玄宗實錄》︰「丙戌,翰出關。己丑,遇賊。庚寅,戰。」此近是,今從之。《幸蜀記》亦然。〉乾祐伏兵於險,翰與田良丘浮舟中流以觀軍勢,見乾祐兵少,趣諸軍使進。王思禮等將精兵五萬居前,龐忠等將餘兵十萬繼之,翰以兵三萬登河北阜望之,鳴鼓以助其勢。〈少,始紹翻。趣,讀曰促。將,卽亮翻,又音如字。〉乾祐所出兵不過萬人,什什伍伍,散如列星,或疏或密,或前或卻,官軍望而笑之。乾祐嚴精兵,陳於其後。兵旣交,賊偃旗如欲遁者,官軍懈,不爲備。須臾,伏兵發,賊乘高下木石,擊殺士卒甚衆。道隘,士卒如束,槍槊不得用。翰以氈車駕馬爲前驅,欲以衝賊。日過中,東風暴急,乾祐以草車數十乘塞氈車之前,縱火焚之。〈乘,繩證翻。塞,悉則翻。《考異》曰︰《幸蜀記》曰︰「野中先有官草,積數十堆,因風焚之。」今從《舊傳》。〉煙焰所被,〈被,皮義翻。〉官軍不能開目,妄自相殺,謂賊在煙中,聚弓弩而射之。〈射,而亦翻。〉日暮,矢盡,乃知無賊。乾祐遣同羅精騎自南山過,出官軍之後擊之,官軍首尾駭亂,不知所備,於是大敗;或棄甲竄匿山谷,或相擠排入河溺死,囂聲振天地,賊乘勝蹙之。後軍見前軍敗,皆自潰,河北軍望之亦潰。〈【章︰十二行本「潰」下有「瞬息間兩岸皆空」七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退齋校同。】〉〈河北軍,翰所自將者也。〉翰獨與麾下數百騎走,自首陽山西渡河入關。〈首陽山當是首山,衍「陽」字。首山在蒲州河東縣界,與湖城縣之荊山隔河相對。〉關外先爲三塹,皆廣二丈,深丈,〈廣,古曠翻。深,式浸翻。〉人馬墜其中,須臾而滿;餘衆踐之以度,〈踐,息淺翻。〉士卒得入關者纔八千餘人。辛卯,乾祐進攻潼關,克之。

翰至關西驛,揭牓收散卒,欲復守潼關。〈復,扶又翻。〉蕃將火拔歸仁等以百餘騎圍驛,入謂翰曰︰「賊至矣,請公上馬。」翰上馬出驛,歸仁帥衆叩頭曰︰「公以二十萬衆一戰棄之,何面目復見天子!〈帥,讀曰率。復,扶又翻。〉且公不見高仙芝、封常清乎?〈謂軍敗必誅也。事見上卷上年。〉請公東行。」翰不可,欲下馬。歸仁以毛縶其足於馬腹,及諸將不從者,皆執之以東。〈將,卽亮翻;下同。〉會賊將田乾眞已至,遂降之,俱送洛陽。〈降,戶江翻。〉安祿山問翰曰︰「汝常輕我,〈事見二百十六卷天寶十一載。〉今定何如?」翰伏地對曰︰「臣肉眼不識聖人。今天下未平,李光弼在常山,李祗在東平,〈李祗,卽謂吳王祗。〉魯炅在南陽,〈炅,古迥翻。〉陛下留臣,使以尺書招之,不日皆下矣。」祿山大喜,以翰爲司空、同平章事。謂火拔歸仁曰︰「汝叛主,不忠不義。」執而斬之。翰以書招諸將,皆復書責之。祿山知不效,乃囚諸苑中。〈東都苑中也。〉潼關旣敗,於是河東、華陰、馮翊、上洛防禦使皆棄郡走,〈河東郡,蒲州。華陰郡,華州。馮翊郡,同州。上洛郡,商州。華,戶化翻。〉所在守兵皆散。

是日,翰麾下來告急,上不時召見,〈見,賢遍翻。〉但遣李福德等將監牧兵赴潼關。及暮,平安火不至,〈《六典》︰唐鎭戍烽候所至,大率相去三十里。每日初夜,放煙一炬,謂之平安火。時守兵已潰,無人復舉火。〉上始懼。壬辰,召宰相謀之。楊國忠自以身領劍南,聞安祿山反,卽令副使崔圓陰具儲偫,以備有急投之,〈相,息亮翻。令,力丁翻。使,疏吏翻。偫,直里翻。〉至是首唱幸蜀之策。上然之。

 

 6월, 11일에 양국충이 백관을 조당에 모아 놓았는데 두렵고 부끄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책략을 물으니 모두 '예예'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양국충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안록산의 반란 일으킬 상황을 알린 지 이미 10년이었지만, 황상이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일은 재상의 잘못이 아닙니다."

 의장이 내려가자 사민은 놀라면서 어지럽게 달아낫으나 갈 곳을 알지 못하였으며 저자거리와 마을은 쓸쓸하였다. 양국충은 한국부인과 괵국부인으로 하여금 궁궐에 들어가 황상에게 촉으로 들어가기를 권하도록 하였다.

 癸巳,國忠集百官於朝堂,惶懅流涕;〈朝,直遙翻;下同。懅,巨魚翻,急也。〉問以策略,皆唯唯不對。〈唯,于癸翻。〉國忠曰︰「人告祿山反狀已十年,上不之信。今日之事,非宰相之過。」仗下,〈朝罷,則左右三衞立仗者皆休下。〉士民驚擾奔走,不知所之,市里蕭條。國忠使韓、虢入宮,勸上入蜀。

 

 12일에 백관 가운데 조현한 사람은 열에 한둘도 없었다. 황상은 근정루에 올라 제서를 내렸는데, '친히 정벌하려고 한다.'고 하였으나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믿지 않았다. 경조윤 위방진을 어사대부로 겸 치돈사로 삼았는데, 경조소윤인 영창 사람 최광원을 경조윤으로 삼고 서경유수로 충임하였으며, 장군 변령성으로 하여금 궁전의 빗장과 열쇠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甲午,百官朝者什無一二。上御勤政樓,下制,云欲親征,聞者皆莫之信。以京兆尹魏方進爲御史大夫兼置頓使;京兆少尹靈昌崔光遠爲京兆尹,充西京留守;將軍邊令誠掌宮闈管鑰。

 

 검남절도사 영왕 이교가 장차 진수하는 곳에 가겠다는 구실을 붙여서 본도에 명령하여 식량과 비품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날 황상은 의장을 북내로 옮겼다. 이미 저녁이 되자 용무대장군 진현례로 하여금 6군을 정돈하고 다스리도록 하엿으며 동전과 비단을 후하게 내리고 마구간의 말 900여 필을 가려 뽑도록 하였는데 외부의 사람들은 모두가 그덧을 알지 못하였다.

 託以劍南節度大使潁王璬將赴鎭,令本道設儲偫。〈璬,公了翻。偫,直里翻。〉是日,上移仗北內。〈唐都長安,以太極宮爲西內,大明宮爲東內,興慶宮爲南內,北內當在玄武門內。又以地望言之,則自興慶宮移仗歸大明宮,興慶宮在南,大明宮在北,故亦謂大明宮爲北內。《考異》曰︰《幸蜀記》︰「上遣中使曹仙領千人擊鼓於春明門外,又令燒閑廐草積,煙焰燎天。上將乘馬,楊國忠諫,以爲︰『當謹守宗祧,不可輕動。』韋見素力爭,以爲︰『賊勢逼近,人心不固,陛下不可不出避狄。國忠暗與賊通,其言不可聽。』往返數四,上乃從見素議。加魏方進御史大夫,充前路知頓使。」按賊陷潼關,鑾輿將出,人心已危,豈有更擊鼓燒草以驚之!國忠久蓄幸蜀之謀,見素乃其所引,豈得上前有此爭論!此蓋宋巨欲歸功見素,事乃近誣。今不取。〉旣夕,命龍武大將軍陳玄禮整比六軍,〈比,毗寐翻。〉厚賜錢帛,選閑廐馬九百餘匹,外人皆莫之知。

 

 13일에 날이 밝자 황상은 오직 귀비의 자매· 황제의 아들· 비· 공주· 황제의 손자· 양국충· 위견소· 위방진· 진현례 그리고 가까이 하는 환관· 궁인들과 더불어 연추문을 나갔는데 비· 공주· 황제의 손자 가운데 궁전 밖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버리고 떠났다. 황상이 좌장을 지나가자 양국충은 그것을 태워버리기를 청하며 말하였다.

 乙未,黎明,上獨與貴妃姊妹、皇子、妃、主、皇孫、楊國忠、韋見素、魏方進、陳玄禮及親近宦官、宮人出延秋門,〈延秋門,唐長安禁苑之西門也。程大昌《雍祿》有《漢唐要地參出圖》,唐禁苑西北,包漢長安故城。未央宮,唐後改爲通光殿;西出卽延秋門。《考異》曰︰《幸蜀記》云︰「丙申,百官尚赴朝。」此乙未日事,宋巨誤也。〉妃、主、皇孫之在外者,皆委之而去。上過左藏,〈藏,徂浪翻。〉楊國忠請焚之,曰

 

 "역적이 지키게 할 것 없습니다."

 황상은 근심하며 말하였다.

 "역적들이 왔다가 얻지 못하면 반드시 다시 백성들에게 거둘 것이다. 그것을 주는 것만 같지 못하다. 나의 어린 백성들을 거듭 곤란하도록 만들지 마라."

 이날 백관 가운데에는 여전히 조현하러 들어온 사람이 있었는데 궁전의 문에 도착하자 여전히 누성을 들었고 삼위의 의장도 엄숙하였다고 하였다.

 ︰「無爲賊守。」上愀然曰︰「賊來不得,必更斂於百姓;不如與之,無重困吾赤子。」〈史記玄宗有君人之言。愀,子小翻。斂,力贍翻。〉是日,百官猶有入朝者,至宮門,猶聞漏聲,三衞立仗儼然。〈唐朝會之制︰三衞番上,分爲五仗,號衙內五衞。一曰供奉仗,以左、右衞爲之。二曰親仗,以親衞爲之。三曰勳仗,以勳衞爲之。四曰翊仗,以翊衞爲之。五曰散手仗,以親、勳、翊衞爲之。平明,傳點畢,內門開,百官入立班,皇帝升御坐,金吾將軍一人奏左、右廂內外平安,通事舍人贊,宰相、兩省官再拜升殿,內謁者承旨喚仗,左、右羽林將軍勘以木契,自東西閤而入。朝罷,皇帝步入東序門,然後放仗。內外仗隊,七刻乃下。常參輟朝日,六刻卽下。〉

 

 문이 이미 열리고 나자 궁인들이 어지럽게 나왔으며 안팎이 소란스럽게 밀쳤으나 황상이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왕공과 사민들은 나가 달아나 숨었고, 산골짜기에 살던 빈천한 백성은 다투어 궁전과 왕공들의 저택에 들어와 황금과 보물을 도둑질하여 가져갔는데, 어떤 사람은 당나귀를 타고 전각에까지 올랐다.

  門旣啓,則宮人亂出,中外擾攘,不知上所之。於是王公、士民四出逃竄,山谷細民爭入宮禁及王公第舍,盜取金寶,或乘驢上殿。

 

 또 좌장에 속한 대녕고를 불살랐다. 최광원과 변령성이 사람들을 이끌고 불을 끄고 또 사람들을 모아 부와 현의 관원을 대신하게 하고 그곳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는데 10여 명을 죽이자 마침내 조금씩 평정되었다. 최광원은 그의 아들을 파견하여 동쪽으로 가서 안록산을 만나게 하였고, 변령성 또한 궁전의 열쇠를 그에게 바쳤다.

 又焚左藏大盈庫。崔光遠、邊令誠帥人救火,〈帥,讀曰率。〉又募人攝府、縣官分守之,殺十餘人,乃稍定。光遠遣其子東見祿山,令誠亦以管鑰獻之。

 

 황상이 편교(함양)를 지나가자 양국충은 사람을 시켜 다리를 태우도록 하였다. 황상이 말하였다.

 "사인과 서인이 각기 역적을 피하여 살기를 바라는데 어찌하여 그 길을 끊는가."

 내시감 고력사를 남기어 불을 끄고 오도록 하였다. 황상은 환관 왕낙경을 파견하여 앞에 가도록 하여 군현에 알려서 머무를 곳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식사를 할 시간에 함양의 망현궁에 도착하였는데, 왕락경은 현령과 더불어 달아났으므로 중사가 징소하였으나 이민 가운데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上過便橋,楊國忠使人焚橋。上曰︰「士庶各避賊求生,柰何絕其路!」留內侍監高力士,使撲滅乃來。〈玄宗始置內侍監,秩三品,以高力士及袁思藝爲之。撲,普卜翻。〉上遣宦者王洛卿前行,告諭郡縣置頓。食時,至咸陽望賢宮,〈咸陽縣,在京城西四十里。望賢宮,在縣東。〉洛卿與縣令俱逃,中使徵召,吏民莫有應者。

 

 해가 정오를 향하였으나 황상이 아직 먹지를 못하였으므로 양국충은 스스로 호떡을 사서 바쳤다. 이에 백성들이 다투어 거친 쌀로 지은 밥을 바쳤는데 보리와 콩을 섞었지만 황제의 손자들은 다투어 손으로 그것을 움켜쥐고 먹어서 잠깐 사이에 다 떨어졌으나 아직도 배가 부를 수가 없었다. 황상은 그 값을 다 갚고 그들을 위로하였다.

 무리는 모두 통곡하였고 황상 또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부로 곽종근이 말씀을 올렸다.

 日向中,上猶未食,楊國忠自市胡餅以獻。〈胡餅,今之蒸餅。高似孫曰︰胡餅,言以胡麻著之也。崔鴻《前趙錄》︰石虎諱胡,改胡餅曰麻餅。《緗素雜記》曰︰有鬻胡餅者,不曉名之所謂,易其名曰爐餅。以爲胡人所啗,故曰胡餅也。〉於是民爭獻糲飯,〈糲,盧達翻,粗也。〉雜以麥豆;皇孫輩爭以手掬食之,須臾而盡,猶未能飽。〈《考異》曰︰《唐曆》︰「至望賢頓,御馬病。上曰︰『殺此馬,拆行宮舍木煮食之。』衆不忍食。」《幸蜀記》︰「至望賢宮,行從皆飢。上入宮,憩於樹下,怫然若有棄海內之意。高力士覺之,遂抱上足,嗚咽開諭,上乃止。」《肅宗實錄》︰「楊國忠自入市,衣袖中盛胡餅,獻上皇。」《天寶亂離記》︰「六月十一日,大駕幸蜀,至望賢宮,官吏奔竄。迨曛黑,百姓有稍稍來者。上親問之︰『卿家有飯否?不擇精粗,但且將來。』老幼於是競擔挈壺漿,雜之以麥子飯,送至上前。先給兵士,六宮及皇孫已下,咸以手掬而食。頃時又盡,猶不能飽。旣乏器用,又無釭燭,從駕者枕藉寢止,長幼莫之分別;賴月入戶庭,上與六宮、皇孫等差異焉。」按上九日幸蜀,溫畬云「十一日」,非也。餘則兼采之。〉上皆酬其直,慰勞之。〈勞,力到翻。〉衆皆哭,上亦掩泣。有老父郭從謹進言曰︰

 

 "안록산이 화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품은 것은 진실로 하루가 아니었습니다. 역시 대궐에 가서 그가 모의한 것을 알린 사람이 많았으나 폐하께서는 때때로 그들을 죽여서 그의 간사하게 반역하는 것을 만족시키고 폐하가 播越(파천, 몽진)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서 돌아가신 대왕께서는 충성스럽고 훌륭한 사람을 끌어 들여서 총명함을 넓히는데 힘썼는데 대개 이를 위한 것입니다.

 「祿山包藏禍心,固非一日;亦有詣闕告其謀者,陛下往往誅之,〈事見上卷上年。〉使得逞其姦逆,致陛下播越。是以先王務延訪忠良以廣聰明,蓋爲此也。

 

 신은 송경이 재상이었을 때에 자주 직언을 올렸고 천하 사람들은 그 사람에 힘입어서 평안하였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근래로부터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말하는 것을 꺼렸고 오직 아부하며 받아들여지기만을 취하였는데, 이리하여서 대궐문 밖의 일은 폐하께서 모두 알 수 없었습니다. 초야에 있는 신은 반드시 오늘날과 같은 일이 있을 것을 안 지 오래이나 다만 아홉 겹에 삼엄하고 깊숙하여 작은 마음들이 위로 전달할 길이 없었습니다. 일이 여기게 이르지 않았다면 신이 어찌 폐하의 얼굴을 보고 그것을 하소연할 수 있었겠습니까?"

 臣猶記宋璟爲相,數進直言,天下賴以安平。〈爲,于僞翻。數,所角翻。〉自頃以來,在廷之臣以言爲諱,惟阿諛取容,是以闕門之外,陛下皆不得而知。草野之臣,必知有今日久矣,但九重嚴邃,區區之心無路上達。事不至此,臣何由得睹陛下之面而訴之乎!」

 

 황상이 말하였다.

 "이것은 짐의 불찰이며 후회해도 다시 따라잡을 수가 없소."

 그를 위로하고 타일러서 보냈다.

 잠시 후 상식이 어선을 들고 오자 황상은 먼저 시종하는 관리에게 하사하도록 명령하였으며 그렇게 한 후에 그것을 먹었다. 군사들로 하여금 흩어져서 촌락에서 먹을 것을 찾도록 하고 未時로 약속하였다가 모두 모여서 떠났다.

 上曰︰「此朕之不明,悔無所及。」慰諭而遣之。俄而尚食舉御膳而至,〈尚,主也。主御膳之官,有奉御,有直長。「而」,一作「以」。〉上命先賜從官,〈從,才用翻;下時從同。〉然後食之。令軍士散詣村落求食,期未時皆集而行。

 

 밤이 반쯤 지나서야 마침내 금성(興平)에 도착하였다. 현령 역시 도망하였고 현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 몸을 빼어 달아났으나 마시고 먹는 그릇은 갖추어져 있어서 병사들은 그것을 가지고 자급할 수 있었다. 이때 따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달아났고 내시감 원사예 역시 도망하였다. 역 안에는 등불이 없어서 사람들이 서로 베개를 삼아 잠을 잤으며 귀천은 다시 분별할 방법이 없었다. 왕사례가 동관으로부터 도착하자 비로소 가서한이 사로잡힌 것을 알았고, 왕사례를 하서·농우절도사로 삼고, 즉시 진수하는 곳으로 가서 흩어진 병사를 거두고 합쳐서 동쪽 토벌을 기다리도록 하였다.

 夜將半,乃至金城。〈金城縣,屬京兆,本始平縣,中宗景龍二年送金城公主降吐蕃至此,更名金城,在京城西八十五里。〉縣令亦逃,縣民皆脫身走,飲食器皿具在,士卒得以自給。時從者多逃,內侍監袁思藝亦亡去。驛中無燈,人相枕藉而寢,貴賤無以復辨。〈枕,卽任翻。藉,慈夜翻。復,扶又翻。〉王思禮自潼關至,始知哥舒翰被擒;以思禮爲河西、隴右節度使,卽令赴鎭,收合散卒,以俟東討。

 

 14일에 마외역에 도착하였는데 장사들은 굶주리고 피곤하여 모두 분해하고 화를 냈다. 진현럐는 화란이 양국충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생각하여 그를 주살하려고 하였는데, 동궁의 환관인 이보국을 통하여 이 사실을 태자에게 알렸으나 태자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마침 토번의 사자 20여 명이 양국충의 말을 막고 먹을 것이 없는 것을 가지고 하소연하였고, 양국충은 아직 대답도 하지 못하였는데 군사들이 외치며 말하였다.

 丙申,至馬嵬驛,〈《金人疆域圖》︰馬嵬驛,在京兆興平縣。〉將士飢疲,皆憤怒。陳玄禮以禍由楊國忠,欲誅之,因東宮宦者李輔國以告太子,太子未決。會吐蕃使者二十餘人遮國忠馬,訴以無食,國忠未及對,軍士呼曰︰

 

 "양국충이 호족 오랑캐와 더불어 반란을 모의하였다."

 어떤 사람이 활을 쏘아그의 안장을 맞추었다. 양국충은 달아나 서문 안에 도착하였으나 병사가 뒤를 쫓아 그를 죽여 사지를 가르고, 그 창으로 그의 마리를 매달아 역문 박에 걸었으며, 아울러 그의 아들인 호부시랑 양훤과 한국부인· 진국부인을 죽였다.

 「國忠與胡虜謀反!」或射之,中鞍。國忠走至西門內,〈馬嵬驛之西門也。呼,火故翻。射,而亦翻。中,竹仲翻。〉軍士追殺之,屠割支體,以槍揭其首於驛門外,幷殺其子戶部侍郎暄及韓國、秦國夫人。

 

 어사대부 위방진이 말하였다.

 "너희들이 어찌 감히 재상을 해쳤는가?"

 무리는 또 그를 죽였다. 위견소는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밖으로 나왔다가 난병들에게 채찍을 맞앗는데, 뇌에서 나온 피가 땅에 흘렀다. 무리가 말하였다.

 "위상공을 해치지 마라."

 그를 구원하여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御史大夫魏方進曰︰「汝曹何敢害宰相!」衆又殺之。韋見素聞亂而出,爲亂兵所檛,腦血流地。衆曰︰「勿傷韋相公。」救之,得免。

 

 군사들이 역을 포위하자 황상은 떠들석한 소리를 듣고 밖에 무슨 일인가를 물으니, 좌우에 잇는 사람들은 양국충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대답하였다. 황상은 지팡이를 짚고 신발을 신고 역의 문으로 나와 병사들을 위로하고 대오를 거두도록 하였으나 병사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황상이 고력사를 시켜서 이들에게 묻게 하자, 진현례가 대답하였다.

 "양국충은 반란을 일으키려고 꾀하였고 귀비는 적당하게 모시지 못하였으니, 바라건데 폐하께서는 은정을 베어내시고 법을 바르게 하십시오."

 황상이 말하엿다.

 "짐이 마땅히 스스로 이를 처리하겠다."

 軍士圍驛,上聞諠譁,問外何事,左右以國忠反對。上杖屨出驛門,慰勞軍士,令收隊,軍士不應。上使高力士問之,玄禮對曰︰「國忠謀反,貴妃不宜供奉,願陛下割恩正法。」上曰︰「朕當自處之。」〈處,昌呂翻。〉

 

 문 안으로 들어가 지팡이에 의지하여 머리를 수그리고 섰다. 오래 지난 후 경사조록 위악이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지금 무리들이 화를 내고 범접하기 어려워서 안위가 경각에 달려있으니, 바라건데, 폐하께서는 속히 결정하십시오!"

 이어서 머리를 바닥에 조아려서 피를 흘렸다. 황상이 말하였다.

 "귀비는 항상 깊은 궁궐에 있었는데, 어찌 양국충의 모반을 알았겠는가?"

 고력사가 말하였다.

 入門,倚杖傾首而立。久之,京兆司錄韋諤前言曰︰〈京兆府司錄參軍,正七品上。武德初,改州主簿曰錄事參軍,掌正違失,涖符印;開元元年改曰司錄。〉「今衆怒難犯,〈引《左傳》鄭子產之言。〉安危在晷刻,願陛下速決!」因叩頭流血。上曰︰「貴妃常居深宮,安知國忠反謀?」高力士曰︰

 

 "귀비는 진실로 죄가 없지만 그러나 장수와 병사들이 이미 양국충을 죽였는데 귀비가 페하의 좌우에 있었으니 어찌 감히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깊이 그것을 생각하십시오. 장사들이 편안해지면 폐하는 편안해집니다."

 황상은 마침내 고력사에게 명하여 귀비를 불당으로 끌어내게 하여 목매어 죽게 하였다.

 시체를 수레에 실어 역의 뜰에 도착하여 진현례 등을 불러 들어와 살피게 하였다. 진현례 등이 마침내 투구를 벗고 갑옷을 벗고서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내려달라고 청하니, 황상은 그들을 위로하고 병사들을 타이르도록 시켰다.

 「貴妃誠無罪,然將士已殺國忠,而貴妃在陛下左右,豈敢自安!願陛下審思之,將士安則陛下安矣。」〈將,卽亮翻;下同。〉上乃命力士引貴妃於佛堂,縊殺之。輿尸寘驛庭,召玄禮等人視之。玄禮等乃免冑釋甲,頓首請罪,上慰勞之,〈勞,力到翻。〉令曉諭軍士。

 

 진현례 등은 모두 만세를 불렀으며 두 번 절하고 나갔고 이에 비로소 대오를 정돈하여 가는 계책을 만들었다. 위악은 위견소의 아들이다. 양국충의 처인 배유와 그의 어린 아들인 양희 그리고 괵국부인과 그부인의 아들인 배휘는 모두 달아나 진창에 도착하였는데, 현령 설경선 이사를 인솔하고 뒤를 쫓아가 잡아서 그들을 죽였다.

 玄禮等皆呼萬歲,再拜而出,於是始整部伍爲行計。諤,見素之子也。國忠妻裴柔〈裴柔,故蜀倡也。〉與其幼子晞及虢國夫人、夫人子裴徽皆走,至陳倉,縣令薛景仙帥吏士追捕,誅之。〈帥,讀曰率;下同。〉

 

 15일에 황상이 곧 마외를 떠나려고 하는데, 조정의 신하 가운데 오직 위견소 한 사람뿐이어서 마침내 위악을 어사중승으로 삼고 치돈사에 충임하였다. 장사가 모두 말하였다.

 "양국충이 모반하였고 그의 장리가 모두 촉에 있으니 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서와 농우로 가기를 청하였고, 어떤 사람은 영무에 가기를 청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태원으로 가기를 청하였고, 또는 경사로 돌아갈 것을 말하였다. 황상의 속마음은 촉으로 들어가는데 있었으나 무리의 마음을 어길까 걱정하여 끝내 향할 곳을 말하지 않았다. 위악이 말하였다.

 丁酉,上將發馬嵬,朝臣惟韋見素一人,乃以韋諤爲御史中丞,充置頓使。〈朝,直遙翻。使,疏吏翻。〉將士皆曰︰「國忠謀反,其將吏皆在蜀,不可往。」或請之河、隴,或請之靈武,或請之太原,〈之,往也。〉或言還京師。上意在入蜀,慮違衆心,竟不言所向。韋諤曰︰

 

 "경사로 돌아간다면 응당 역적을 막을 대비가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은 병사가 적어서 동쪽으로 향하여 가는 것은 쉽지 않으니 부풍에 도착하여 서서히 거취를 꾀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황상이 무리에게 물으니 무리들은 그런 것으로 여겨서 마침내 이를 좇았다. 떠나게 되자 부로가 모두 길을 막고 남아있기를 청하며 말하였다.

 "궁궐은 폐하의 집이고 능침은 페하의 분묘인데 지금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還京,當有禦賊之備。今兵少,未易東向,〈易,以豉翻。〉不如且至扶風,徐圖去就。」〈《考異》曰︰《幸蜀記》曰︰「上意將幸西蜀,有中使常清奏曰︰『國忠久在劍南,又諸將吏或有連謀,慮遠防微,須深詳議。』中官陳全節奏曰︰『太原城池固莫之比,可以久處,請幸北京。』中官郭希奏曰︰『朔方地近,被帶山河,鎭遏之雄,莫之與比。以臣愚見,不及朔方。』中使駱承休奏曰︰『姑臧一郡嘗霸中原,秦、隴、河、蘭皆足徵取,且巡隴右,駐蹕涼州,翦彼鯨鯢,事將取易。』左右各陳其意見者十餘輩。高力士在側而無言。上顧之曰︰『以卿之意,何道堪行?』力士曰︰『太原雖固,地與賊鄰,本屬祿山,人心難測。朔方近塞,半是蕃戎,不達朝章,卒難敎馭。西涼懸遠,沙漠蕭條,大駕順動,人馬非少,先無備擬,必有闕供,賊騎起來,恐見狼狽。劍南雖窄,土富人繁,表裏江山,內外險固;以臣所料,蜀道可行。』上然之。卽除韋諤御史中丞,充置頓使。」今從《唐曆》。〉上詢於衆,衆以爲然,乃從之。及行,父老皆遮道請留,曰︰「宮闕,陛下家居,陵寢,陛下墳墓,今捨此,欲何之?」

 

 황상은 그것 때문에 고삐를 만지면서 오래 있었고 마침내 태자로 하여금 뒤에서 부로를 위로하도록 시켰다.

 부로가 이어서 말하였다.

 "지존께서 이미 머물려고 하지 않으시니 아무개들은 자제를 인솔하고 전하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 역적을 격파하고 장안을 빼앗기를 원합니다. 만약에 전하께서 지존과 더불어 모두 촉으로 들어가시면 중원에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누구를 주군으로 삼도록 만드시겠습니까?"

 잠시 사이에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럿다.. 태자는 안된다고 하면서 말하였다.

 "지존께서 먼 곳에서 험한 고난을 무릅쓰시는데 내가 어찌 차마 아침 저녁으로 그 자우를 떠날 수 있겠는가? 또한 나는 아직 면전에서 작별을 하지 않았으니 응당 돌아가 지존께 보고하고 전진할지 멈출지를 품신하겠소."

 上爲之按轡久之,乃令太子於後宣慰父老。父老因曰︰「至尊旣不肯留,某等願帥子弟從殿下東破賊,取長安。〈帥,讀曰率。〉若殿下與至尊皆入蜀,使中原百姓誰爲之主?」須臾,衆至數千人。太子不可,曰︰「至尊遠冒險阻,吾豈忍朝夕離左右。〈離,力智翻。〉且吾尚未面辭,當還白至尊,更稟進止。」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빼내어 서쪽으로 가려고 하였다.

 건녕왕 이담은 이보국과 더불어 말 재갈을 잡고 간하였다.

 "역적의 호족이 대궐을 침범하여 사해가 나뉘어 무너졌는데 인심을 따르지 않으면 무엇으로 부흥하시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지존을따라 촉에 들어가고 만약 도적의 병사들이 잔도를 불태워 끊어 버리면 중원의 땅은 팔짱을 끼고 도적에게 주는 것이 됩니다.

 涕泣,跋馬欲西。〈還,從宣翻。跋馬者,勒馬使回轉也。跋,蒲撥翻。〉建寧王倓〈倓,徒甘翻。〉與李輔國執鞚諫曰︰「逆胡犯闕,四海分崩,不因人情,何以興復!今殿下從至尊入蜀,若賊兵燒絕棧道,〈鞚,苦貢翻。棧,士限翻。〉則中原之地拱手授賊矣。

 

 인심이 이미 떠나고 나면 다시 합칠 수 없으니 비록 다시 여기에 이르고자 하나 그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서북쪽에서 변경을 지키는 병사를 거두어들이고 곽자의와 이광필을 하북에서 부르고 그들과 더불어 힘을 합하여 동쪽으로 가서 역적을 토벌하여 양경에서 이겨서 되찾고, 사해응 깎아내어 평정하여 사직으로 하여금 위태로웠으나 다시 안정되도록 만들고, 종묘로 하여금 훼손되었으나 다시 보존토록 만들며, 궁궐을 쓸고 제거하여 지존을 맞이하는 것만 같지 아니하니, 어찌 큰 효도가 아니겠습니까? 하필 사소하게 따뜻한 것을 서늘하게 하려 하여 아녀자가 연모하는 마음을 만드십니까?"

 人情旣離,不可復合,雖欲復至此,其可得乎!〈復,扶又翻,又音如字。〉不如收西北守邊之兵,召郭、李於河北,與之倂力東討逆賊,克復兩京,削平四海,使社稷危而復安,宗廟毀而更存,掃除宮禁以迎至尊,豈非孝之大者乎!何必區區溫凊,爲兒女之戀乎!」〈《記》曰︰凡爲人子,冬溫而夏凊,昏定而晨省。凊,七政翻。《考異》曰︰《舊‧宦者傳》︰「李靖忠啓太子,請留,張良娣贊成之。」按太子獨還宣慰百姓,良娣不在旁,何以得贊成留計!今不取。《天寶亂離記》︰「大駕至岐州,上取褒斜路幸蜀,儲皇取彭原路抵靈武。」此誤也。〉

 

 광평왕 이숙 또한 태자에게 머물 것을 권하였다.

 부로들은 모두 태자의 말을 잡으니 갈 수가 없었다. 태자는 마침내  이숙으로 하여금 말을 달려가 황상에게 보고하도록 시켰다. 황상은 말고삐를 잡아매고 태자를 기다렸으나 오래도록 도착하지 않자 사람을 시켜 정탐하도록 하엿는데, 돌아와 상황을 보고하자, 황상이 말하였다.

 "하늘아!"

 廣平王俶亦勸太子留。〈俶,昌六翻。〉父老共擁太子馬,不得行。太子乃使俶馳白上。上總轡待太子,久不至,使人偵之,〈偵,丑鄭翻。〉還白狀,上曰︰「天也!」

 

 마침내 후군 2천 명과 비룡구의 말을 나누어 태자를 좇도록 하고, 또 장사들에게 유시하였다.

 "태자는 어질고 효성스러워 종묘를 받들 만하니 너희들은 태자를 잘 보좌하라."

 또 태자에게 유시하였다.

 "너는 부지런히 하면서 나를 걱정하지 마라. 서북에 있는 여러 호족들은 내가 평소 후하게 그들을 안무하였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乃分後軍二千人及飛龍廐馬從太子,〈仗內六廐,飛龍廐爲最上乘馬。〉且諭將士曰︰「太子仁孝,可奉宗廟,汝曹善輔佐之。」〈將,卽亮翻。〉又諭太子曰︰「汝勉之,勿以吾爲念。西北諸胡,吾撫之素厚,汝必得其用。」

 

 태자는 남쪽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내러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내어 울 따름이었다. 또 동궁의 나인들을 태자에게 보내도록 시키고 또 뜻을 밝혀 황제의 자리를 전하려고 하였으나 태자는 받지 않았다. 이숙과 이담 모두 태자의 아들이다.

 太子南向號泣而已。〈上已南邁,而太子留在後,故南向號泣。號,戶刀翻。〉又使送東宮內人於太子,〈張良娣在軍中,自此搆建寧之禍。〉且宣旨欲傳位,太子不受。俶、倓,皆太子之子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