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櫛風沐雨[zhìfēngmùyǔ]: 갖은 고생/穀雨節 中候鳴鳩拂其羽 酴釄(도미)風2日(陰3/15)甲辰

solpee 2021. 4. 25. 16:26

《唐紀22 則天后 聖曆 元年》〈戊戌, 698年

 

 

 ④. 무승사와 무삼사는 태자가 되기를 구하여 자주 사람을 보내 태후에게 유세하도록 하였다.

 "옛날부터 천자가 다른 성으로 후계자를 삼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태후의 뜻이 결정되지 않았다.

 적인걸이 매번 조용히 태후에게 말하였다.

 ④. 武承嗣、三思營求爲太子,數使人說太后曰:「自古天子未有以異姓爲嗣者。」太后意未決。狄仁傑每從容言於太后曰:

 

 "문황제(태종)께서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비로 목욕을 하며, 몸소 창끝과 화살촉을 무릅쓰고 천하를 평정하여 이를 자손에게 전하였습니다. 대제(고종)께서는 두 아드님을 폐하께 의탁하셨습니다. 

 「文皇帝櫛風沐雨,親冒鋒?,以定天下,傳之子孫。〈數,所角翻。說,輸芮翻。從,千容翻。太宗諡文皇帝。〉大帝以二子託陛下。〈高宗諡天皇大帝。二子,謂廬陵王及皇嗣也。〉

 

 폐하께서 지금 마침내 다른 성에게로 이것을 옮기려고 하시는 것은 마침내 하늘의 뜻이 아님이 없겠습니까? 게다가 고모와 조카 사이는 어머니와 아들 사이와 비교하면 누가 더 가깝겠습니까? 폐하께서 아들을 세우면 천만 년 뒤에도 태묘에 모셔져 제사를 올리고 무궁하도록 뒤를 이을 것이지만, 조카를 세우신다면 아직 조카가 천자가 되어가지고 태묘에 고모의 신주를 모셔놓고 제사를 올렸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陛下今乃欲移之他族,無乃非天意乎!且姑姪之與母子孰親?〈太后之於承嗣、三思,姑姪也。於廬陵王、皇嗣,母子也。〉陛下立子,則千秋萬歲後,配食太廟,承繼無窮;立姪,則未聞姪爲天子而祔姑於廟者也。」

 

 태후가 말하였다.

 "이는 짐의 집안일이니, 경은 참여하여 알려고 하지 마라."

 적인걸이 대답하였다.

 "제왕 된 사람은 사해를 집안으로 삼으니, 사해 안에서 누가 신첩이 아니고 어느 것인들 폐하의 집안일이 아니겠습니까? 군주는 으뜸가는 머리이며 신하는 다리와 팔이니, 뜻으로는 몸과 함께 하는데, 하물며 신은 재상의 자리에 갖추고 있으면서 어찌 참여하여 알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 태후에게 권하여 여릉왕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太后曰:「此朕家事,卿勿預知。」仁傑曰:「王者以四海爲家,四海之內,孰非臣妾,何者不爲陛下家事!君爲元首,臣爲股肱,義同一體,況臣備位宰相,豈得不預知乎!」又勸太后召還廬陵王。〈廬陵王,光宅元年遷均州,垂拱元年遷房州。〉

 

 왕방경과 왕급선도 역시 이를 권하였다. 태후는 속으로 조금씩 깨달아갔다. 다른 날 또 적인걸에게 말하였다.

 "짐의 꿈에 커다란 앵무새의 날개가 모두 꺾였는데, 무슨 일인가?"

 대답하였다.

 "武라고 한 것은 폐하의 성이며, 두 날개는 두 아들입니다. 폐하께서 두 아들을 일으키면, 곧 두 날개가 움직일 것입니다."

 태후가 이로부터 무삼사와 무승사를 세우려는 뜻을 없이 하였다.

 王方慶、王及善亦勸之。太后意稍寤。他日,又謂仁傑曰:「朕夢大鸚鵡兩翼皆折,何也?」〈折,而設翻。〉對曰:「武者,陛下之姓,兩翼,二子也。陛下起二子,則兩翼振矣。」太后由是無立承嗣、三思之意。

 

 손만영이 유주를 포위하면서 격문을 조정으로 보냈다.

 "어찌 우리 여릉왕을 돌아가게 하지 않는가?"

 길욱이 장역지·장창종과 더불어 모두 공학감공봉이 되었는데, 장역지 형제는 그를 허물없이 가까이 하였다. 길욱이 두 사람에게 조용히 유세하였다.

 "공의 형제가 귀하고 총애를 받는 것이 이와 같은데, 덕을 쌓은 일로써 이를 얻은 것이 아니니 천하 사람들이 곁눈으로 보며 이를 가는 일이 많습니다. 천하에 큰 공을 세운 것이 없고서야 어찌 스스로 온전하겠습니까? 가만히 공을 위하여 이것을 걱정합니다."

 孫萬榮之圍幽州也,移檄朝廷曰:「何不歸我廬陵王?」吉頊與張易之、昌宗皆爲控鶴監供奉,〈是年置控鶴監以處近倖。〉易之兄弟親狎之。頊從容說二人曰:「公兄弟貴寵如此,非以德業取之也,天下側目切齒多矣。不有大功於天下,何以自全?竊爲公憂之!」〈爲,于僞翻;下屢爲、復爲同。〉

 

 두 사람이 두려워서 눈물을 흘리면서 계책을 물었다. 길욱이 말하였다.

 "천하의 사대부와 서민들은 당의 덕을 아직 잊지 않고 있으며, 모두 다시 여릉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상께서 춘추가 높으시니 대업은 반드시 넘겨주는 바가 있을 것인데, 무씨의 여러 친왕들에게는 위촉할 뜻을 두시지 않았습니다. 공은 어찌하여 황상에게 여릉왕을 세우라고 조용히 권하여 백성들이 바라는 것과 연결하지 않으십니까? 이와 같이 하면 화를 면할 뿐만 아니라, 또한 부유함과 귀함을 오랫동안 지킬 것입니다."

 二人懼,流涕問計。頊曰:「天下士庶未忘唐德,咸復思廬陵王。〈復,扶又翻。〉主上春秋高,大業須有所付;武氏諸王非所屬意。〈屬,之欲翻。〉公何不從容勸上立廬陵王以繫蒼生之望!如此,非徒免禍,亦可以長保富貴矣。」

 

 두 사람이 그렇다고 여기고, 틈을 타서 여러 차례 태후에게 이것을 말하였다. 태후는 꾀가 길욱에게서 나온 것을 알고 마침내 불러서 물었는데, 길욱이 다시 태후를 위하여 이해를 구체적으로 진술하자, 태후의 뜻이 마침내 정해졌다.

 二人以爲然,承間屢爲太后言之。〈間,古莧翻。〉太后知謀出於頊,乃召問之,頊復爲太后具陳利害,太后意乃定。〈《考異》曰:世有《狄梁公傳》,

云李邕撰,其辭鄙誕,殆非邕所爲。其言曰:「后納諸武之議,將移宗社,擬立武三思爲儲副,遷廬陵王於房陵。諸武陰計,日夜獻謀曰:『陛下姓武,合立武氏,未有天子而取別姓將爲後者也。』天后旣已許,禮問羣臣曰:『朕年齒將衰,國無儲主,今欲擇善,誰可當之?朕雖得人,終在羣議。』諸宰臣多聞計定,言皆希旨;仁傑獨退立,寂無一言。天后問曰:『卿獨無言,當有異見。』公曰:『有之。臣上觀乾象,無易主之文;中察人心,實未厭唐德。』天后曰:『卿何以知之?』公曰:『頃者匈奴犯邊,陛下使梁王三思於都市召募,一月之外,不滿千人。後廬陵王踵之,未經二旬,數盈五萬。以此觀之,人心未去。陛下將欲繼統,非廬陵王,餘實非臣所知。』天后震怒,命左右扶而去之。」按廬陵王爲河北元帥,在立爲太子後,且當是時睿宗爲皇嗣,若仁傑請以廬陵王繼統,則是勸太后廢立也。此固未可信。或者仁傑以廬陵母子至親而幽囚房陵,勸召還左右,則有之矣。《談賓錄》曰:「聖曆二年,臘月,張易之兄弟貴寵逾分,懼不全,請計於天官侍郎吉頊。頊曰:『公兄弟承恩深矣,非有大功於天下,自古罕有全者。唯有一策,苟能行之,豈止全家,亦當享茅土之封耳;除此之外,非頊所謀。』易之兄弟泣請之。頊曰:『天下思唐德久矣,主上春秋高,武氏諸王殊非所屬意。公何不從容請立廬陵,以繫生人之望?』易之乃承間屢言之,則天意乃易;旣知頊首謀,乃召問頊。頊曰:『廬陵、相王皆陛下之子,高宗切託於陛下,唯陛下裁之。』則天意乃定。」《御史臺記》曰:「則天置控鶴府,頊與易之、昌宗同於府供奉,與昌宗親狎。昌宗自以貴寵踰分,懼不全,請計於頊,」云云,如《談賓錄》。蓋太后寵信諸武,誅鉏李氏,雖己子廬陵亦廢徙房陵,故仁傑勸召還左右,以強李氏,抑諸武耳。張、吉非能爲唐社稷謀也,欲求己利耳。若仍立皇嗣,則己有何功!故勸太后立廬陵爲太子,而太后從之。然則欲召還廬陵者,仁傑之志也;立爲太子者,張、吉之謀也。《談賓》言聖曆二年及以頊爲天官侍郎,《臺記》謂睿宗爲相王,則皆誤也。《新‧狄仁傑傳》云:「張易之嘗從容問自安計。仁傑曰:『唯勸迎廬陵王可以免禍。』」計仁傑亦安肯與易之深言此事!《狄梁公傳》又云:「後經旬,召公入,曰:『朕昨夜夢與人雙陸,頻不見勝,何也?』對曰:『雙陸不勝,蓋爲宮中無子。此是上天之意,假此以示陛下,安可久虛儲位哉?』天后曰:『是朕家事,斷在胸中,卿豈合預焉!』仁傑對曰:『臣聞王者以天下爲家,四海之內,悉爲臣妾,何者不爲陛下家事!君爲元首,臣爲股肱,臣安得不預焉!』又命扶出,竟不納。」按於時皇嗣在宮中,不得言無子及久虛儲位也。《朝野僉載》云:「則天曾夢一鸚鵡,羽毛甚偉,兩翅俱折。以問宰臣,羣公默然。內史狄仁傑曰:『鵡者,陛下姓也。兩翅折者,陛下二子廬陵、相王也。陛下起此二子,兩翅全也。』魏王承嗣、武三思連項皆赤。後契丹反,圍幽州,檄朝廷曰:『還我廬陵、相王來!』則天乃憶狄公之言,謂之曰:『卿曾爲我占夢,今乃應矣。朕欲立太子,何者爲得?』仁傑曰:『陛下內有賢子,外有賢姪,取捨詳擇,斷在宸衷。』則天曰:『我自有聖子,承嗣、三思是何疥癬!』承嗣等懼,掩耳而走。卽降敕追廬陵。河內王等奏,不許入城,龍門安置。賊徒轉盛,陷沒冀州。則天急,乃立廬陵王爲太子,充元帥。初,募兵無有應者,聞太子行,北邙山頭兵滿,無容人處;賊自退散。」按是時睿宗未爲相王。又仁傑若言內有賢子,外有賢姪,乃是懷兩端也。今採衆說之可信者存之。〉

 

 3월 9일에 여릉왕이 병에 걸렸다는 말로 핑계를 대고 직방원외랑인 하구 사람 서언백을 파견하여 여릉왕과 그의 비와 여러 자식들을 불러서 행재소에 와서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28일에 여릉왕이 신도(낙양)에 이르렀다.

 三月,己巳,託言廬陵王有疾,遣職方員外郎瑕丘徐彥伯〈瑕丘,故春秋魯之瑕邑,晉、宋置兗州於此,隋開皇十三年,置瑕丘縣,帶兗州。〉召廬陵王及其妃、諸子詣行在療疾。戊子,廬陵王至神都。〈《考異》曰:《統紀》云:「癸丑,遣職方員外郎徐彥伯往房州,召廬陵王男女入都醫療。」《狄梁公傳》曰:「後潛發內人十人至房州,宣敕云:『我兒在此,令內人就看。州縣長吏,仰數出數入無令混雜。』陰令內人一人以代廬陵王;令廬陵王衣內人衣服,以舊數還,州縣不悟。數日達京,朝廷百僚,一無知者。」《舊傳》曰︰「廬陵王自房陵還宮,太后匿之帳中,又召狄仁傑,以廬陵爲言。仁傑慷慨敷奏,言發涕流。遽出廬陵,謂仁傑曰:『還卿儲君。』仁傑降階泣賀。旣已,奏曰:『太子還宮,人無知者,物議安審是非!』則天以爲然,乃復置中宗於龍門,具禮迎歸,人情感悅。」《狄梁公傳》曰:『天后御一小殿,垂簾於後,左右隱蔽,外不能知。乃命公坐於階下,曰:『前者所議,事實非小,寤寐反覆,思卿所言,彌覺理非甚乖。朕意忠臣事主,豈在多違!今日之間,須易前見。以天下之位在卿一言,可朕意卽兩全,逆朕心卽俱斃!』公從容言曰:『陛下所言,天子之位,可得專之。以臣所知,是太宗文武皇帝之位,陛下豈得而自有也!太宗身陷鋒鏑,經綸四海,所以不告勞者,蓋爲子孫,豈爲武三思邪!陛下身是大帝皇后,大帝寢疾,權使陛下監國;大帝崩後,合歸冢嫡。陛下遂奄有神器,十有餘年。今議纘承,豈可更異!且姑與母孰親?子與姪孰近?』云云。天后於是歔欷流涕,命左右褰簾,手撫公背,大叫曰:『卿非朕之臣,是唐社稷之臣!』回謂廬陵王曰:『拜國老!今日國老與爾天子!』公免冠頓首,涕血灑地,左右扶策,久不能起。天后曰:『卽具所言,宣付中外,擇日禮册。』公揮涕而言曰:『自古以來,豈有偷人作天子!廬陵王留在房州,天下所悉知,今日在內,臣亦不知。臣欲奉詔,若同衞太子之變,陛下何以明臣?』天后曰:『安可卻向房陵!只於石像驛安置,具法駕,陳百僚,就迎之。』於是大呼萬歲,儲位乃定。」按武后若密召廬陵王,宮人十人旣知其謀,洛陽至房陵,往來道路甚遠,豈得外人都不知乎!又,《實錄》豈能搆虛立徐彥伯往迎之事,及有廬陵王至自房州之日!又,於時若儲位已定,豈可自三月來九月始立爲太子!蓋廬陵旣至,太后以長幼之次欲立之,皇嗣亦以此遜位,故遷延半載。今皆取《實錄》爲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