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哀李統制/春分節仲候雷乃發聲 梨花風3日(陰2/15)甲戌

solpee 2021. 3. 26. 11:24

 

哀李統制 《柳成龍》

·한산도가 어디에 있는가? / 閑山島在何處

큰 바다 가운데 한 점 푸르네 / 大海之中一點碧

고금도는 어디에 있는가 / 古今島在何處

아득한 남쪽 바다 한 터럭이 비껴있네 / 渺渺南溟橫一髮

당시에 백번 싸운 이 장군은 / 當時百戰李將軍 

한 손으로 하늘 가운데의 벽을 붙잡았네 / 隻手扶將天半壁

고래를 모두 죽이니 피가 바다에 가득하고 / 鯨鯢戮盡血殷波

치솟은 화염이 풍이(倭를 지칭)의 소굴을 다 태웠네 / 烈火燒竭馮夷窟

공이 높은데도 참소와 질투를 면하지 못하니 / 功高不免讒妬構

힘써 싸우기를 꺼리지 않아 몸을 나라에 바쳤네 / 力戰不憚身循國

 

‘馮夷’란 동양 신화에 등장하는 물의 신 河伯을 말하나 이 시에는 九夷 중의 하나였던 島夷 즉 倭를 지칭한 듯 하다. 시의 초고는 안동 풍산유씨 충효당이 소장한 ‘大統曆’의 戊戌조 11월과 12월 사이 여백에 적혀 있다. 관상감에서 발행한 ‘대통력’은 임진왜란 당시 사용한 歷書다.

자신과 인연이 깊었던 이순신의 전사를 나라에 목숨을 바친 ‘순국’이라 애도하면서, 두 사람 다 승전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절절하게 드러냈다. 특히 9행의 ‘공이 높아 참소와 질투를 면하지 못하니’에서는 삭탈관직당한 자신의 처지를 빗댄 감정이 읽힌다. 유성룡은 훗날 고향에서 집필한 ‘징비록’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 당시의 상황을 기록했다.

 

*. “유성룡을 파직시키라.”

조선 14대 임금 선조에게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1598년 11월 19일의 일이었다. 임진왜란 중 영의정으로서 국난 수습에 앞장섰던 명재상 유성룡은, 전란이 끝나갈 무렵 북인들의 정치적 공격이 한 달 넘에 이어지며 수세에 몰려 있었다. 마침내 선조는 유성룡 축출을 지시했다. 마치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종전 직전 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것처럼, 유성룡도 일본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 관직을 내려놓을 운명이 된 것이다.

그런데 같은 날인 1598년 11월 19일, 남해에서는 또 다른 중대한 사건이 일어난다. 노량해전의 大勝을 거둔 이순신 장군이 해전 중 전사한 것이다. 파직당해 낙향할 처지에, 자신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함께 국난 극복을 위해 온몸을 던진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들은 유성룡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순신 전문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최근 노량해전 직후 유성룡이 쓴 애도시 ‘哀李統制’의 초고에 적힌 원문을 판독해 일부 오류를 바로잡았다. 노 소장은 최근 ‘난중일기’의 자세한 주석본인 ‘신완역 난중일기 校註本’(여해)에서 이 시를 소개했다. 이 시는 ‘이충무공전서’ 권12와 ‘서애집’ 권2에도 수록됐지만 마지막 7자가 빠져 있었고, 2015년 서애기념사업회의 ‘국역 류성룡시’에 번역됐으나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 번역에선 마지막 행의 ‘循國’을 ‘殉國’으로 잘못 판독했었다.

 

 

저 거리의 암자

                                                  愼達子

 

어둠 깊어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된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

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

 

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버린 여자도

서울을 통째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냅니다.

 

 설악산 큰 스님이자 시조 시인으로 유명했던 무산(1932~2018) 스님이 이 시를 읽고 감동해 시인을 만나보고 싶어 했다지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신달자는 불교도 모르고 무산 스님이 누군지도 모른다며 사양하다, 어느 동안거 해제 날 설악산 신흥사에서 마침내 스님을 뵈었다고 합니다.

절에 갔더니, 무산 스님이 200명 선승을 앉혀놓고 ‘저 거리의 암자’를 낭송하더랍니다. 그러고는 “여기서 석 달 앉아 수행한 것보다 이 시 한 편에 담긴 수행의 무게가 무겁다” 하더랍니다. 포장마차를 ‘한 채의 묵묵한 암자’로, 거기서 밤새 술잔 부딪치며 한풀이하는 군상의 풍경을 ‘하룻밤 수행’이라 표현한 시인의 통찰이, “도(道)는 사는 데 있지 산속에 있지 않다”는 무산 스님의 철학과 맞닿은 것이지요.

 

 마침 지난해 ‘만해대상’ 문학 부문을 신달자 시인이 받아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요. 그 시를 썼던 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남편이 병석에 누운 지 24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번엔 자신이 유방암 판정을 받아 투병하게 되었는데 그 고통과 공허함이 커서 매일 저녁 수서역 근처 포장마차에 갔다고 합니다. 하루의 고된 노동이 끝나면 어둠 내린 포장마차에 삼삼오오 모여들어 플라스틱 작은 상에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는 풍경이 절망한 시인을 위로했다고 하지요. 그날부터 다시 시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들 없는 집에 다섯째 딸로 태어나 생일이 두 날인 사연도 재미있습니다. 사월초파일, 그러니까 부처님오신날에 태어났는데, 또 딸이라 크게 실망한 아버지가 차일피일 미루다 출생신고를 한 날이 예수님 태어난 12월 25일이었답니다. 시인은 “병도 많고 슬픔도, 곡절도 많은 삶이라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나” 하고 웃으면서도 “그래도 이겨냈어요. 그렇죠?”라고 말해 저를 뭉클하게 했습니다.

 

* 김윤덕 조선일보주말뉴스부장이 쓴 글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