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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민의 고리침략3 (惟此未平:오직 이곳만 평정되지 않았다.)/雨水節末候草木萌動菜花李花風5日(陰1/21)辛亥

solpee 2021. 3. 2. 10:26

《唐紀13 太宗 貞觀 19》 (乙巳, 645)

 

 

 ④. 2월, 25일에 황상이 업에 도착하니 스스로 제문을 지어서 위의 태조에게 제사를 지내어 말하였다.

 "위험을 만나서 변화를 제압하시고, 적을 헤아리고 기이한 계책을 만드시니, 한 장수의 지혜로서는 여유가 있지만 만승으로서의 재주는 부족하였습니다."

 이 달에 이세적의 군사들이 유주(18사략에 '당태종은 정주에서 전개하였다.' 라고 하였으니 유주는 정주와 보정, 천진 어디일 것)에 도착하였다.

 ④. 癸亥,上至鄴,自爲文祭魏太祖,〈魏太祖葬鄴城西。鄴縣本相州治所,後周大象二年,隋文帝輔政,尉遲迥起兵於鄴,兵敗,鄴城破,文帝令焚鄴城,徙其居人,南遷四十五里,以安陽城爲相州治所。煬帝復於鄴故都大慈寺置鄴縣。貞觀八年,始築今治所小城。〉曰︰「臣危制變,料敵設奇,一將之智有餘,萬乘之才不足。」〈將,卽亮翻。乘,繩證翻。〉

是月,李世勣軍至幽州。〈洛陽至幽州一千六百里。〉

 

 3월 9일에 거가가 정주에 도착하였다. 19일에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요동은 원래 중국의 땅인데 수가 네 번 공략을 하였으나 패전하였다. 짐이 지금 동방을 정벌하는 것은 중국을 위하여 자제들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것이며, 고리를 위하여 군부의 치욕을 갚으려는 것 뿐이다. 또 사방이 대체적으로 평정되었는데, 오직 이곳만 아직 평정되지 아니하였으니, 그러므로 짐이 아직 늙기에 이르지 않았을 때에 사대부들의 남은 힘을 이용하여 이를 빼앗고자 한다. 짐이 낙양에서 출발하여서부터 오직 다만 고기와 밥만을 먹었을 뿐이고, 비록 봄채소도 역시 올리지 않게 하였으니, 그들이 번거로울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三月,丁丑,車駕室定州。〈洛陽至定州一千二百里。〉丁亥,上謂侍臣曰︰「遼東本中國之地,隋氏四出師而不能得;〈隋文帝開皇十八年伐高麗,煬帝大業八年、九年、十年,三伐高麗。〉朕今東征,欲爲中國報子弟之讎,〈言中國之人,其父兄死於高麗,今伐之,是爲其子弟報父兄之讎。爲,于僞翻。〉高麗雪君父之恥耳。〈言蓋蘇文弒其主,而其臣子不能討,恥莫大焉,今討其罪,是爲高麗雪恥。〉且方隅大定,惟此未平,故及朕之未老,用士大夫餘力以取之。朕自發洛陽,唯噉肉飯,〈噉,徒濫翻,又徒覽翻。〉雖春蔬亦不之進,懼其煩擾故也。」

 

 황상이 병든 병사를 보고 불러서 어탑 앞으로 오게 하여 위로하고 주현에 보내어 그를 치료하게 하였더니, 사졸들 가운데 감격하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정벌군에 올라 있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 사사롭게 장비를 만들어 가지고 종군하려고 하니, 움직였다 하면 천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모두 말하였다.

 "현관에게 공훈과 상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요동에서 죽음으로 보답하기를 원합니다."

 황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 소위 통감필법이다. 이정도 군대면 백전백승해야 함에도 패전하였으니 이글은 아마 사마광의 소설인듯...

 上見病卒,召至御榻前存慰,付州縣療之,士卒莫不感悅。有不預征名,〈謂不預東征之名籍者。〉自願以私裝從軍,動以千計,皆曰︰「不求縣官勳賞,惟願效死遼東。」上不許。

 

 황상이 곧 출발하려고 하는데, 태자가 슬피울며 며칠 동안 눈물을 흘리니, 황상이 말하였다.

 "지금 너를 남겨두어서 진수하게 하고 뛰어난 사람으로 보필하게 하여서 천하로 하여금 너의 풍채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요점은 현명한 사람을 올리고 불초한 사람을 물리치고,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되 지극히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어야 하는데 있으니, 너는 마땅히 노력하여 이것을 실천하도록 하여야 하며 슬피 눈물을 흘려서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上將發,太子悲泣數日,上曰︰「今留汝鎭守,輔以俊賢,欲使天下識汝風采。夫爲國之要,在於進賢退不肖,賞善罰惡,至公無私,汝當努力行此,悲泣何爲!」

 

 개부의동삼사 고사렴에게 명령하여 태자태부의 업무를 총괄하게 하여 유기·마주·소첨사·장행성·우서자 고개보와 더불어 같이 기밀에 속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면서 태자를 보필하게 하였다. 장손무기와 잠문본은 이부상서인 양사도와 더불어 출정하게 하였다. 24일에 거가는 정주를 출발하여 친히 궁시를 패용하고, 손으로 우의를 안장 뒤에 묶었다. 장손무기에게 명령하여 시중의 업무를 총괄하고 양사도는 중서령의 업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命開府儀同三司高士廉攝太子太傅,與劉洎、馬周、少詹事張行成、〈詹事,秦官,自漢以來,掌東宮內外衆務,員一人;後魏置二人,分左右,尋復置一人。至唐又置少詹事一人,正四品上。洎,其冀翻。〉右庶子高季輔同掌機務,輔太子。長孫無忌、岑文本與吏部尚書楊師道從行。壬辰,車駕發定州,親佩弓矢,手結雨衣於鞍後。命長孫無忌攝侍中,楊師道攝中書令。

 

 이세적의 군사가 柳城(今 易縣)을 출발하였는데 형세를 많이 벌려 놓아서 회원진으로 나가는 것처럼 하면서 숨겨서 용도로 나아가서 고리가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나아갔다. 여름 , 4월 1일에 이세적은 요수(今 南拒馬河)를 건너서 玄菟에 이르니 고리에서는 크게 놀라서 성읍에서 모두 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 수십만 당군이 침략하는데 눈감고 귀 닫고 있으면서 승리했다면 누가 믿나? 통감필법이다.

 李世勣軍發柳城,〈柳城縣,營州治所。〉多張形勢,若出懷遠鎭者,〈營州有懷遠守捉城。〉而潛師北趣甬道,出高麗不意。夏,四月,戊戌朔,世勣自通定濟遼水,〈通定鎭在遼水西,隋大業八年伐遼所置。甬道,隋起浮橋渡遼水所築。趣,七喻翻。甬,余隴翻。〉至玄菟。〈陳壽曰︰漢武帝開玄菟郡,治沃沮,後爲夷貊所侵,徙郡句驪縣。西北有遼山,遼水所出。〉高麗大駭,城邑皆閉門自守。

 

 5일에 요동도부대총관인 강하와 이도종이 병사 수천을 거느리고 新城(今 北京 南郊 白沟)에 도착하고, 절충도위 조삼량이 10여 기를 이끌고 곧바로 성문을 압박하니, 성 안에서는 놀라고 시끄러워서 감히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營州도독 장검이 흉노의 병사를 선봉으로 삼고, 나아가서 요수를 건너서 건안성으로 향하여 고리 병사를 깨뜨리고 목을 벤 것이 수천 급이었다.

 壬寅,遼東道副大總管江夏王道宗將兵數千至新城,〈夏,戶雅翻。將,卽亮翻;下同。《唐曆》︰「張儉懼敵,不敢深入。江夏王道宗固請將百騎覘賊,帝許之。因問往返幾日,對曰︰『往十日,周覽十日,返十日,總經一月,望謁陛下。』遂秣馬束兵,經歷險阻,直登遼東城南,觀其地形險易,安營置陳之所。及還,賊已引兵斷其歸路,道宗擊之盡殪,斬關而出,如期謁見。帝歎曰︰『賁、育之勇,何以過此!』賜金五十斤,絹千匹。」今從《實錄》。〉折衝都尉曹三良引十餘騎直壓城門,城中驚擾,無敢出者。〈騎,奇寄翻。〉營州都督張儉將胡兵爲前鋒,進渡遼水,趨建安城,〈自遼東城西行三百里至建安城,漢平郭縣地。趨,七喻翻。〉破高麗兵,斬首數千級。

 

 

 

 ⑦. 15일에 이세적과 강하왕 이도종이 고리의 개모성을 공격하였다. 20일에 거가가 북평(今 定興)에 도착하였다.26일에 이세적 등은 개모성을 점령하고 2만여 명과 양곡 10여만 석을 얻었다.

 장량은 수군을 인솔하고 동래에서부터 바다를 건너서 비사성(대련)을 습격하였는데 그 성은 사면이 깎아지른 절벽이었고 오직 서문으로만 올라갈 수 있었다. 정명진이 군사를 이끌고 밤에 도착하였고 부총관 왕대도가 먼저 올라갔다. 5월 2일에 이를 점령하고 남자와 여자 8천 명을 붙잡았다.(민간인을 잡아갔다) 총관 구효충 등을 나누어 파견하여 압록수(今 灤河)에서 曜兵(요병: 시위)하였다.

 ⑦. 壬子,李世勣、江夏王道宗攻高麗蓋牟城。〈蓋牟城在遼東城東北,唐取之,以其地爲蓋州。大元遼陽府路有蓋州、遼海軍節度,領建安、湯地、熊岳、秀巖四縣。〉丁巳,車駕至北平。〈此古北平也。《舊志》︰平州,隋爲北平郡。〉癸亥,李世勣等拔蓋牟城,獲二萬餘口,糧十餘萬石。

張亮帥舟師自東萊渡海,襲卑沙城,〈帥,讀曰率。〉其城四面懸絕,惟西門可上。〈上,時掌翻。〉程名振引兵夜至,副總管王大度先登,五月,己巳,拔之,獲男女八千口。分遣總管丘孝忠等曜兵於鴨綠水。〈杜佑曰︰鴨綠水,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源出靺鞨長白山,《漢書》謂之馬訾水,今謂之混同江。李心傳曰︰鴨綠水發源契丹東北長白山。鴨綠水之源,蓋古肅愼氏之地,今女眞居之。〉

 

 이세적은 나아가서 요동성 아래에 도착하였다. 3일에 거가는 遼澤에 도착하였는데, 진흙벌판이 200여 리여서 사람과 말이 왕래할 수가 없게 되자 장작대장 염입덕이 흙을 덮어서 다리를 만들어 군사들은 머물러 있지 않고 갔다. 5일에소택지대의 동쪽을 건넜다. 8일에 고리의 보병과 기병 4만이 요동을 구원하니 강하왕 이도종이 4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이들을 맞아 쳤고 군중에서는 모두가 무리가 적고 떨어져서 매달려 있는 상태이니 깊이 해자를 파고 성루를 높게 쌓고 거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도종이 말하였다.

 *.30만이 출동하여 다들 어디가고 4천으로 4만을 맞아 전쟁하였다 하고 전사자도 일체 언급이 없으니 소위 통감필법의 극치다.

 李世勣進至遼東城下。庚午,車駕至遼澤,泥淖二百餘里,〈淖,奴敎翻。〉人馬不可通,將作大匠閻立德布土作橋,軍不留行。壬申,渡澤東。乙亥,高麗步騎四萬救遼東,江夏王道宗將四千騎逆擊之,〈騎,奇寄翻;下同。將,卽亮翻;下同。〉軍中皆以爲衆寡懸絕,不若深溝高壘以俟車駕之至。道宗曰︰

 

 "도적들은 무리가 많다는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멀리서 와서 피곤하지만 이들을 쳐서 반드시 패배시킬 것이다. 또 우리들은 선봉부대이니 마땅히 길을 깨끗이 하여 놓고 승여를 기다려야 마땅한데 마침네 다시 도적들을 군부에게 남겨둘 것인가?"

 이세적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과의도위 마문거가 말하였다.

 "노략질하는 적군을 만나지 않는다면 이떻게 장사임을 드러내겠는가?"(노략질은 지들이 하면서?)

 「賊恃衆,有輕我心,遠來疲頓,擊之必敗。且吾屬爲前軍,當清道以待乘輿,乃更以賊遺君父乎!」〈「不以賊遺君父」,漢耿弇之言。乘,繩證翻。遺,于季翻。〉李世勣以爲然。果毅都尉馬文舉曰︰「不遇勍敵,何以顯壯士!」

 

 말에 채찍을 치며 적을 향해 달려가는데 가는 곳에서 모두가 쓰러지니 무리들의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졌다.(두려움에 떨어서 진군하지 못했다는 또 다른 말) 이미 만나서 전투를 하였는데, 행군총관 장군예가 물러나서 달아나자 당 군사들은 승리하지 못하였고, 이도종은 흩어진 병사를 모아서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다가 고리의 진지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교기 수십 기와 더불어 그들에게 부딪치며 좌우에서 들락날락하였고, 이세적이 병사를 이끌고 그를 도우니 고리는 대패하였고 목을 벤 것이 1천여 급이었다.

 策馬趨敵,所向皆靡,〈勍,渠京翻。趨,七喻翻。〉衆心稍安。旣合戰,行軍總管張君乂退走,唐兵不利,道宗收散卒,登高而望,見高麗陳亂,〈陳,讀曰陣。〉與驍騎數十衝之,〈驍,堅堯翻。〉左右出入;李世勣引兵助之,高麗大敗,斬首千餘級。

 

 10일에 거가가 요수를 건너서 다리를 치워버리고 사졸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서 馬首山(今 易縣 西南)에 진을 치고 강하왕 이도종에게 위로하며 상을 내리고 마문거를 순서를 뛰어 넘어 중랑장으로 임명하였다. 잔군예의 목을 베었다.

 황상은 스스로 수백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아래에 도착하여 사졸들이 흙을 져다가 해자를 메우는 것을 보고, 황상은 그 가운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의 것을 나누어 말 위에다 싣게 하였고, 좇았던 관원들도 다투어 흙을 져다가 성 아래로 갔다. 이세적이 요동성을 공격하는데 밤낮으로 쉬지 않기를 열이틀이 되어서 황상이 정예의 병사를 인솔하고 그와 만나서 그 성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였고 북치는 소리는 천지를 뒤흔들었다.

 丁丑,車駕渡遼水,撤橋,以堅士卒之心,軍於馬首山,勞賜江夏王道宗,超拜馬文舉中郎將,斬張君乂。〈有功必賞,退懦必誅,則將士知所懲勸矣。勞,力到翻。〉上自將數百騎至遼東城下,見士卒負土塡塹,〈塹,七豔翻。〉上分其尤重者,於馬上持之,從官爭負土致城下。〈從,才用翻。〉李世勣攻遼東城,晝夜不息,旬有二日,上引精兵會之,圍其城數百重,〈重,直龍翻。〉鼓譟聲震天地。

 

 17일에 남풍이 급하게 불자 황상은 정예의 병사를 파견하여 충간의 끝에 오르게 하여 그 서남쪽에 있는 누각에 불을 지르게 하니 불꽃이 성안을 다 태웠다. 이어서 장사들을 지휘하여 성에 오르게 하니 고리는 힘써 싸웠으나 대적할 수가 없었고 드디어 그곳에서 승리하고 죽인 사람이 1만여 명이고 정예의 병사 1만여 명과 남자와 여자 4만여 명을 포로로하고서 그 성을 요주(今 涿州)라 하였다.

 甲申,南風急,上遣銳卒登衝竿之末,爇其西南樓,〈爇,如劣翻。〉火延燒城中,因麾將士登城,高麗力戰不能敵,遂克之,所殺萬餘人,得勝兵萬餘人,男女四萬口,〈勝,音升。〉以其城爲遼州。〈今大元遼陽府。〉

 

28일에 군사를 백암성으로 진격시켰다. 29일에 우위대장군 이사마가 강노의 호살에 맞자, 황상이 친히 그를 위하여 피를 빨았는데, 장사들이 이 소식을 듣고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烏骨城에서 군사 1만여을 파견하여 백암성을 성원하자 장군 글필하력이 강한 기병 800명을 데리고 이들을 쳤는데, 글필하력은 몸을 던져서 그들의 진지에 빠졌다가 창으로 허리를 맞았으며, 상연봉어 설만비가 단기로 달려가서 그를 구하여 글필하력을 많은 무리 속에서 구조하여 왔다.

 乙未,進軍白巖城。丙申,右衞大將軍李思摩中弩矢,上親爲之吮血;將士聞之,莫不感動。〈中,竹仲翻。爲,于僞翻。〉烏骨城遣兵萬餘爲白巖聲援,〈自登州東北海行至烏湖島,又行五百里東傍海壖,過青泥浦、桃花浦、杏人浦、石人汪、橐駝灣,乃至烏骨江。〉將軍契苾何力以勁騎八百擊之,〈契,欺訖翻。苾,毗必翻。〉

 

 글필하력의 기분은 더욱 분하여져서 상처를 묶고는 싸웠고, 좇는 기병들도 분발하여 쳐서 드디어 고리의 군사를 격파하고 수십 리를 추격하여 목을 벤 것이 1천여 급이었는데, 마침 어두워지자 그만 두었다. 설만비는 설만철의 동생이다.

 何力挺身陷陳,槊中其腰,〈陳,讀曰陣。中,竹仲翻。〉尚輦奉御薛萬備單騎往救之,拔何力於萬衆之中而還。〈還,從宣翻,又如字。〉何力氣益憤,束瘡而戰,從騎奮擊,〈從,才用翻。〉遂破高麗兵,追奔數十里,斬首千餘級,會暝而罷。〈暝,莫定翻。〉萬備,萬徹之弟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