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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王三川(黃,洛,伊水)/小雪節 末候閉塞成冬3日(陰10/20)辛巳

solpee 2020. 12. 3. 17:15

《南北朝 梁紀13 武 大同 3 丁巳、537)

 

 ⑩. 동위의 승상 고환이 분양에 있는 天池(寧武縣管涔山祁連池:匈奴語로 祁連=天)를 유람하다가 기이한 돌을 주웠는데, 어렴풋하게 새겨진 글귀가 이르길 '六王三川'이라고 하였다. 행대의 낭중 양휴지에게 물으니 대답하였다.

 "'六'이라는 것은 대왕의 字(賀六渾)이며, '王'이라는 것은 왕께서 천하를 감당한다는 의미입니다. 河·洛·伊水가 三川이 되고, 涇·渭·洛水 또한 三川이 됩니다. 대왕께서 만약 천명을 받으시면 끝내는 마땅히 關·洛(관중과 낙양)을 모두 차지할 수 있습니다."

 ⑩. 東魏丞相歡遊汾陽之天池,〈《水經註》︰太原汾陽縣北燕京山上有大池,池在山原之上,世謂之天池,方里餘,其水澄渟鏡淨而不流。〉得奇石,隱起成文曰「六王三川」。以問行臺郎中陽休之,對曰︰「六者,大王之字;〈歡字賀六渾,故云然。〉王者,當王天下。河、洛、伊爲三川,涇、渭、洛亦爲三川。〈涇、渭、洛之「洛」,指關中之洛水,今逕鄜、坊、同三州而入于渭。當王,于況翻。〉大王若受天命,終應奄有關、洛。」

 

 고환이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할일 없이 항상 내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하는데, 하물며 이 소문을 듣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신중하고 망령되이 말하지 마라!"

 양휴지는 양고의 아들이다. 행대의 낭중은 중산 사람 두필이 틈을 이용하여 고환에게 선양 받을 것을 권고하자, 고환이 몽둥이로 쳐서 그를 달아나게 하였다.

 歡曰︰「世人無事常言我反,況聞此乎!愼勿妄言!」休之,固之子也。〈陽固事魏孝文帝,嘗從劉昶南伐。〉行臺郎中中山杜弼承間勸歡受禪,歡舉杖擊走之。〈高歡之志,蓋如曹操所謂吾爲周文王者,非眞無移魏鼎之心也。間,古莧翻。〉

 

 

 ⑪. 동위에서는 겸산기상시 이해를 파견하여 와서 방문하게 하고, 이부랑 누원명·통직시랑 이업홍으로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이해는 이평의 손자이고, 노명원은 노창의 아들이다. 가을, 7월에 이해 등이 건강에 도착하여 황상이 접견하고 더불어 대화를 할 때 응대함이 물이 흐르듯 하였다. 이해 등이 나가자, 황상은 눈으로 그들을 보내고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⑪. 東魏遣兼散騎常侍李諧來聘,以吏部郎盧元明、通直侍郎李業興副之。〈通直侍郎,卽通直散騎侍郎。散,悉亶翻。騎,奇寄翻。〉諧,平之孫;〈李平,崇之從弟,事孝文、宣武。〉元明,昶之子也。〈盧昶,盧玄之孫。〉秋,七月,諧等至建康,上引見,與語,〈見,賢遍翻。〉應對如流。諧等出,上目送之,謂左右曰︰

 "짐은 오늘 강한 적을 만났다. 경들은 일찍이 북방에는 전혀 인물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이들이 어디에서 스스로 왔단 말인가?"

 「朕今日遇勍敵。〈勍,其京翻。〉卿輩嘗言北間全無人物,此等何自而來!」

 

 이 당시 업에서 풍류를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해를 비롯하여 농서 사람 이신준·범양(하북 탁주) 사람 노원명·북해 사람 왕원경·홍농(삼문협) 사람 양준언·청하(임청) 사람 최섬을 으뜸으로 생각하였다. 이신준의 이름은 이정이며 이보의 손자이고, 왕원경의 이름은 왕흔이며 왕헌의 증손자인데, 모두가 字를 사용하였다. 최섬은 최릉의 아들이다.

 是時鄴下言風流者,以諧及隴西李神儁、范陽盧元明、北海王元景、弘農楊遵彥、清河崔贍爲首。〈贍,而豔翻。〉神儁名挺,寶之孫;〈李寶自敦煌歸魏,其後貴盛。〉元景名昕,憲之曾孫也;〈王憲,猛之孫,皇始中歸魏。〉皆以字行。贍,㥄之子也。〈㥄,力膺翻。〉

 

 당시에 남·북이 우호적으로 통하면서 뛰어난 인재를 서로 자랑하는데 힘썼으므로, 명령을 받들고 사자가 되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데에는 반드시 한 시대를 진력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하되 재주와 지체가 없는 사람은 참여할 수가 없었다.

 時南、北通好,〈好,呼到翻。〉務以俊乂相誇,銜命接客,必盡一時之選,〈銜命,奉使者也。接客,主客也。〉無才地者不得與焉。〈與,讀曰預。〉

 

 매번 양의 사신이 업에 도착할 때 업에서는 그들 때문에 힘을 기울여 움직였는데, 귀한 집안의 자제들이 화려하게 옷을 차려입고 모여서 참관하며 예물로 준 것이 풍부하여 관문은 시장터를 이루었다.

 每梁使至鄴,〈使,疏吏翻;下同。〉鄴下爲之傾動,貴勝子弟盛飾聚觀,禮贈優渥,館門成市。

 

 연회를 베푸는 날에 고징은 좌우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한 번 이겨서 승리하였다고 말하면 고징이 그 때문에 손바닥을 쳤다. 위의 사신이 건강에 도착하였을 때에도 또한 그러하였다.

 宴日,高澄常使左右覘之,一言制勝,澄爲之拊掌。魏使至建康亦然。〈兩國通使,各務夸矜以見所長,自古然矣。昭奚恤之事猶可以服覘國者之心。爲,于僞翻。覘,丑廉翻,又丑豔翻。〉

 

 

 ⑫. 독고신(위 대도독)이 북쪽으로 귀환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자, 황상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독고신의 부모는 모두 山東(崤山:靈寶市三門峽函谷關)에 살았는데, 황상이 독고신에게 가는 곳을 물으니, 독고신이 말하였다.

 "임금을 섬기는 사람이 감히 개인의 어버이를 돌아보느라 두 마음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⑫. 獨孤信求還北,上許之。信父母皆在山東,〈魏孝武西遷,信棄父母追從之。〉上問信所適,信曰︰「事君者不敢顧私親而懷貳心。」

 

 황상이 이롭게 여기고 예의로 전송하였는데, 심히 후하였다. 독고신은 양충과 더불어 모두 장안에 도착하여 편지를 올려 사죄하였다. 위에서는 독고신이 三荊을 토벌한 공로가 있다고 하여 표기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시중·개부의동삼사를 덧붙여주었으며, 나머지 관직과 작위는 옛날같이 그대로 하였다. 승상 우문태가 양충의 용기를 아껴서 장하에 남겨 두었다.

 上以爲義,禮送甚厚。信與楊忠皆至長安,上書謝罪。魏以信有定三荊之功,〈定三荊見上卷中大通六年。〉遷驃騎大將軍,加侍中、開府儀同三司,餘官爵如故。〈驃,匹妙翻。騎,奇寄翻。〉丞相泰愛楊忠之勇,留置帳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