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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則圍之,五則攻之[shí zé wéi zhī wǔ zé gōng zhī]10배면 포위, 5배면 공격①/霜降節初候豺乃祭獸4日(陰9/10)壬寅

solpee 2020. 10. 25. 17:29

《南北朝 齊紀6 明 建武 2年》〈乙亥, 495年

 

 ①. 봄, 정월, 2일에 진남장군 왕광지를 파견하여 사주를 감독하게 하고, 우위장군 소탄지를 감독하게 하며, 상서우복야 심문계는 예주를 감독하게 하여 위를 방어토록 한다.

 3일에 위에서 조서를 내렸다.

 "회하 이북의 사람들을 습격하여 약탈할 수 없는데, 어기는 자는 대벽(사형)으로 판결할 것이다."

 ①. 春,正月,壬申,遣鎭南將軍王廣之督司州、右衞將軍蕭坦之督徐州、尚書右僕射沈文季督豫州諸軍以拒魏。

癸酉,魏詔︰「淮北之人不得侵掠,犯者以大辟論。」淮北時已屬魏,故詔不得侵掠其人。辟,毗亦翻。

 

 25일에 탁발연이 종리를 공격하니, 서주 자사 소혜휴가 성에 올라가서 막으면서 지키고, 샛길로 나가서 위의 군대를 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였다. 소혜휴는 소혜명의 아우이다.

 유창·왕숙이 의양을 공격하니, 사주 자사 소탄이 그들을 막았다. 왕숙이 여러 차례 소탄의 군대를 격파하고, 1만여 명을 불러 항복시켰다. 위는 왕숙을 예주 자사로 삼았다.

 乙未,拓跋衍攻鍾離,徐州刺史蕭惠休乘城拒守,間出襲擊魏兵,破之。惠休,惠明之弟也。間,古莧翻。蕭惠明見一百三十三卷宋蒼梧王元徽二年。劉昶、王肅攻義陽,昶,知兩翻。司州刺史蕭誕拒之。肅屢破誕兵,招降萬餘人。降,戶江翻。魏以肅爲豫州刺史。

 

 유창은 성품이 좁고 급하며, 병사들을 다스리는데 엄격하고 사나워서 사람들 가운데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법조행참군인 北平(하북 노룡 북) 사람 양고가 어렵게 간언하였는데, 유창이 성을 내명서 그의 목을 베려 하였다가, 그로 하여금 공격하는 길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양고는 품성이 젊잖고 품위가 있으며, 적에게 다가서는 용감하고 결단력이 있어서 유창이 비로소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였다.

 劉昶性褊躁,御軍嚴暴,褊,補典翻。躁,則到翻。人莫敢言。法曹行參軍北平陽固苦諫;昶怒,欲斬之,使當攻道。攻道,攻城之道,矢石之所集也。固志意閒雅,臨敵勇決,昶始奇之。

 

 27일에 안팎에 계엄령을 내렸다. 태위 진현달을 사지절·도독서북토제군사로 삼아 신정·백하를 왕래하도록 하면서 소문과 형세를 펼쳤다.

 丁酉,中外纂嚴。以太尉陳顯達爲使持節、都督西北討諸軍事,往來新亭、白下以張聲勢。使,疏吏翻;下同。

 

 29일에 위황제가 회하를 건넜고, 2월에 수양에 도착하였는데, 무리는 30만이라 부르며, 철기는 끝이 없었다. 5일에 위황이 팔공산에 올라가서 시를 지었다. 길에서 큰비를 만났는데, 우산을 치우도록 명령하고, 군사들 중에서 병든 자를 보고는 친히 그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주었다.

 己亥,魏主濟淮;二月,至壽陽,衆號三十萬,鐵騎彌望。彌望,猶言極望也。孔穎達曰︰人目所望三十里,而天地合於三十里外,不復見之,是爲極望。騎,奇寄翻。甲辰,魏主登八公山,賦詩。道遇甚雨,命去蓋;去,羌呂翻。見軍士病者,親撫慰之。

 

 위황제가 사자를 파견하여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부르니, 풍성공 소요창이 최경원을 시켜서 성에서 나가서 이에 응하도록 하였다. 최경원이 군대를 거느리고 온 연고를 묻자, 위황제가 말하였다.

 "당연히 까닭이 있다. 경은 나에게 그것을 가리켜 말하게 하려는가? 나에게 그릇된 것을 근거로 수치를 참도록 하려는가?"

 최경원이 말하였다.

 "오신 뜻을 아직 받잡지 못하는데, 더러운 수치를 참을 것이 없습니다."

 魏主遣使呼城中人,豐城公遙昌使崔【章︰十二行本「崔」上有「參軍」二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慶遠出應之。慶遠問師故,《左傳》︰齊桓公以諸侯之師伐楚,楚子使與師言曰︰「不虞君之涉吾地也,何故?」魏主曰︰「固當有故!卿欲我斥言之乎!斥,指也;直言以指人之罪過,無所回避,謂之斥。欲我含垢依違乎?」慶遠曰︰「未承來命,無所含垢。」《左傳》曰︰國君含垢。杜預《註》曰︰含垢,忍垢恥。

 

 황제가 말하였다.

 "제의 주군은 무슨 까닭으로 폐위시키고 자립하였는가?"

 최경원이 말하였다.

 "어두운 군주를 폐하고 밝은 군주를 세우는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 번이 아닌데, 어찌 의심을 하시는지 아직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무제의 아들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가?"

 최경원이 말하였다.

 "일곱 분의 왕들이 같이 잘못을 저질러서 이미 관·채와 같이 주살되었습니다. 그 나머지 20여 친왕들은 혹은 중앙의 깨끗하고 중요한 관직에 있고, 혹은 밖으로 가서 지방의 목민의 일을 관장하고 있습니다."

 魏主曰︰「齊主何故廢立?」慶遠曰︰「廢昏立明,古今非一,未審何疑?」魏主曰︰「武帝子孫,今皆安在?」慶遠曰︰「七王同惡,已伏管、蔡之誅;子隆、子懋、子敬、子眞、子倫幷鬱林、海陵爲七王。其餘二十餘王,或內列清要,或外典方牧。」

 

 위황제가 말하였다.

 "경의 주군이 만약 충성과 의리를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근친을 세워서 주공이 성왕을 보좌한 것과 같이 하지 않고, 스스로 이것을 빼앗았는가?"

 최경원이 말하였다.

 "성황은 아성의 덕행을 가졌으니 그러므로 주공이 그를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근친은 모두 성왕에 비교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세울 수 없었습니다. 또 곽광 역시 무제의 근친을 버리고 선제를 세웠으니, 오로지 그 현명함 때문이었습니다.

 魏主曰︰「卿主若不忘忠義,何以不立近親,如周公之輔成王,而自取之乎?」慶遠曰︰「成王有亞聖之德,故周公得而相之。相,息亮翻。今近親皆非成王之比,故不可立。且霍光亦捨武帝近親而立宣帝,唯其賢也。」

 

 위황이 말하였다.

 "곽광은 어떻게 스스로 황제에 등극하지 않았는가?"

 최경원이 말하였다.

 "그 일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상(南齊明帝)께서는 바로 선제에 비교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곽광에 비교할 수 있습니까? 만약 이와 같다면, 武王이 紂를 치고, 微子를 세워서 그를 보좌하지 않은 것 역시 진실로 천하를 욕심냈기 때문입니까?"

 魏主曰︰「霍光何以不自立?」慶遠曰︰「非其類也。主上正可比宣帝,安得比霍光!若爾,武王伐紂,不立微子而輔之,亦爲苟貪天下乎?」史言崔慶遠之機辯。

 

 효문제가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짐이 온 것은 죄를 물으려는 것이다. 그대의 말과 같다면 풀어질 수 있겠다."

 최경원이 말하였다.

 "'할 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나아가고,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면 뒤로 물러난다.'는 것이 성인의 군대입니다."

 魏主大笑曰︰「朕來問罪。如卿之言,便可釋然。」慶遠曰︰「『見可而進,知難而退,』《左傳》載晉大夫隨武子之言。聖人之師也。」

 

 효문제가 말하였다.

 경은 나와 화친하고자 하는가? 바라지 않는가?"

 최경원이 말하였다.

 "화친하면 두 나라가 기쁨을 주고받으므로 살아있는 백성들이 복을 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두 나라는 미움을 주고받아서 살아있는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됩니다. 화친이 되는지 되지 않는지의 결정은 폐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효문제가 최경원에게 술과 고기 그리고 이복을 하사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魏主曰︰「卿欲吾和親,爲不欲乎?」慶遠曰︰「和親則二國交歡,生民蒙福;否則二國交惡,生民塗炭。和親與否,裁自聖衷。」魏主賜慶遠酒殽、衣服而遣之。

 

 9일에 위황이 회하를 따라서 동쪽으로 내려가니, 백성들이 모두 안도하고 조세로 받은 곡식을 운반하는 수레가 길에 계속 이어졌다. 17일에 종리에 도착했다.

 戊申,魏主循淮而東,過壽陽不攻,引兵東下。民皆安堵,租運屬路。屬,之欲翻。此謂淮北之民耳。丙辰,至鍾離。自壽陽至鍾離三百三十餘里。

 

 황상이 좌위장군 최혜경·영삭장군 배숙업을 파견하여 종리를 구원하도록 하였다. 유창·왕숙의 무리는 20만이라고 하며 참호와 목책이 세 겹이라고 소리치면서, 힘을 합하여 의양을 공격하니, 성 안에 있는 병사들은 방패를 등에 지고 서있었다. 왕굉지가 군대를 이끌고 의양을 구원하는데 성에서 100여 리 떨어진 곳까지 갔으나, 위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上遣左衞將軍崔慧景、寧朔將軍裴叔業救鍾離。劉昶、王肅衆號二十萬,塹栅三重,塹,七豔翻。重,直龍翻。幷力攻義陽,城中負楯而立。攻城甚急,矢石交至,故負楯而立以自蔽。楯,食尹翻。王廣之引兵救義陽,去城百餘里,畏魏強,不敢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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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城中益急,黃門侍郎蕭衍請先進,廣之分麾下精兵配之。衍間道夜發,間,古莧翻。與太子右率蕭誄等率,所律翻。右率,太子右衞率也。誄,魯水翻。徑上賢首山,《水經註》︰溮水南出大潰山北,逕賢首山西,又北出,東南屈,逕義陽縣郡城南。上,時掌翻。去魏軍數里。魏人出不意,未測多少,不敢逼。少,詩沼翻。黎明,城中望見援軍至,蕭誕遣長史王伯瑜出攻魏栅,因風縱火,衍等衆軍自外擊之,魏不能支,解圍去。己未,誕等追擊,破之。誄,諶之弟也。

先是,上以義陽危急,先,悉薦翻。詔都督青、冀二州諸軍事張沖出軍攻魏以分其兵勢。沖遣軍主桑係祖攻魏建陵、驛馬、厚丘三城,又遣軍主杜僧護攻魏虎阬、馮時、卽丘三城,皆拔之。青、冀二州刺史王洪範遣軍主崔延襲魏紀城,據之。宋泰始初,青、冀二州入于魏,乃置青、冀二州刺史,治朐山。杜佑曰︰宋明帝立青、冀二州,寄治贛榆;齊青州治朐山;冀州理漣口,今臨淮郡漣水縣。魏收《志》︰郯郡有建陵縣,漢古縣也。宋白曰︰厚丘故城,在海州沭陽縣北四十五里。又,東彭城郡龍江縣有卽丘城。卽丘亦漢縣,本屬琅邪郡。賢曰︰卽丘,卽《左傳》之祝丘,故城在今沂州臨沂縣東南。紀城,春秋之紀鄣故城也。杜預曰︰東海贛榆縣東北有故紀城。

魏主欲南臨江水,辛酉,發鍾離。司徒長樂元懿公馮誕病,不能從,樂,音洛。從,才用翻。魏主與之泣訣,行五十里,聞誕卒。時崔慧景等軍去魏主營不過百里,魏主輕將數千人夜還鍾離,將,卽亮翻。拊尸而哭,達旦,聲淚不絕。壬戌,敕諸軍罷臨江之行,葬誕依晉齊獻王故事。齊獻王攸葬事,見八十一卷晉武帝太康四年。誕與帝同年,幼同硯席,尚帝妹樂安長公主。長,知兩翻。雖無學術,而資性淳篤,故特有寵。丁卯,魏主遣使臨江,數上罪惡。使,疏吏翻。數,所具翻。

魏久攻鍾離不克,士卒多死。三月,戊寅,魏主如邵陽,築城於洲上,邵陽洲在鍾離城北淮水中。栅斷水路,夾築二城。旣築城於洲上,又於淮水南北兩岸夾築二城,樹栅水中,以斷援兵之路。斷,丁管翻;下先斷、邀斷、欲斷同。蕭坦之遣軍主裴叔業攻二城,拔之。魏主欲築城置戍於淮南,以撫新附之民,賜相州刺史高閭璽書,具論其狀。相,息亮翻。璽,斯氏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