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置之死地而後生[zhì zhī sǐ dì ér hòu shēng]/秋分節初候雷始收聲2日(陰8/7)己巳日

solpee 2020. 9. 23. 06:07

南北朝 宋紀2 文帝 元嘉 2年》〈乙丑, 425年

 

 ④. 연에서 여자가 변하여 남자로 된 일이 있었다. 연의 주군(拓跋燾)이 이것을 신하들에게 물었다. 상서좌승 부권이 대답했다.

 "서한 말에 암탉이 변하여 수컷이 되었는데, 왕망의 재앙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지금 여자가 변하여 남자가 되었으니 신하가 장차 임금이 되는 징조입니다."

 ④. 二月,燕有女子化爲男;燕主以問羣臣。尚書左丞傅權對曰:「西漢之末,雌雞化爲雄,猶有王莽之禍。《漢書‧五行志》:宣帝黃龍元年,未央殿輅軨中雌雞化爲雄,毛衣變化而不鳴,不將,無距。元帝初元,丞相府史家雌雞伏子,漸化爲雄,冠距鳴將。其後,王后羣弟世權,以至於莽,遂篡天下。況今女化爲男,臣將爲君之兆也。」

 

南北朝 宋紀2 文帝 元嘉 4年》〈丁卯, 427年

 

 ⑮. 위의 주군이 발린산(내몽고 準格爾旗)에 도착하여 성을 쌓고 치중을 버리고 경무장한 기병 3만 명만 데리고 배나 빠른 속도로 먼저 가도록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간하였다.

 "통만의 성은 견고하여 아침저녁 사이에 탈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경기병들이 이들을 토벌하는데 진군하여도 이길 수 없고 퇴각할 땐 도움 받을 것이 없으니 보병과 공격도구가 일시에 함께 가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⑮. 魏主至拔鄰山,拔鄰山在黑水東北。築城,捨輜重,《北史》「捨」作「舍」,當從之,讀如字。重,直用翻。以輕騎三萬倍道先行。羣臣咸諫曰:「統萬城堅,非朝夕可拔。今輕軍討之,進不可克,退無所資,不若與步兵、攻具一時俱往。」

 

 황제가 말하였다.

 "군사를 사용하는 기술 가운데 성을 공격하는 것이 가장 낮은 방법이니 반드시 부득이하게 된 연후에야 이 방법을 사용한다. 지금 보병과 공격도구가 모두 앞으로 나아간다면 저들은 반드시 두려워하고서 굳게 지킬 것이다. 만약 공격하여 적시에 점령하지 않으면 식량이 다하고 병사는 피로해지며 외부에 약탈할 곳이 없으니 나아가거나 물러날 만한 곳이 없다.

 帝曰:「用兵之術,攻城最下;必不得已,然後用之。今以步兵、攻具皆進,彼必懼而堅守。若攻不時拔,食盡兵疲,外無所掠,進退無地。

 

 경무장을 한 기병으로 곧장 그 성에 가면 저들은 보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반드시 속으로 느긋하고 해이할 것이니 우리가 진형을 흩트려서 그들을 유혹하고 저들이 혹시 나와 싸우게 하여 곧 사로잡는 것만 못하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우리 군사는 집과의 거리가 2천여 리이고 또 대하로 막혀있으니 이른바 '사지 속에 처넣은 다음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성을 공격하면 부족하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면 여유가 있다."

 마침내 떠나갔다.

 不如以輕騎直抵其城,彼見步兵未至,意必寬弛;吾羸形以誘之,羸,倫爲翻。誘,音酉。彼或出戰,則成擒矣。所以然者,吾之軍士去家二千餘里,又隔大河,所謂『置之死地而後生』者也。去國遠鬬,人皆致死,故其鋒不可當。故以之攻城則不足,決戰則有餘矣。」遂行。

 

※.6월 3일 夏의 治都인 통만을 점령하였다.

 

 ㉑. 11일에 위의 주군이 평성(대동)으로 돌아왔는데, 획득한 것들을 유대에 잇엇던 문무백관에게 차등을 두어서 나누어주었다.

 위의 주군은 사람됨이 건장하고 사납고 용감하였으며, 성에 가까이 가서 적진과 마주하였을 때는 친히 화살과 돌을 무릅썻으며, 좌우에 죽음과 다치는 사람이 서로 이어져도 정신과 기색이 태연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장수와 병사는 두려워하고 복종하였으며, 모두 사력을 다하였다. 성격은 검소하고 솔직하였으며 의복과 수레, 음식은 받는 것으로 그쳤을 따름이다.

 ㉑. 壬子,魏主還至平城,以所獲頒賜留臺百官有差。

魏主爲人,壯健鷙勇,臨城對陳,陳,讀曰陣。親犯矢石,左右死傷相繼,神色自若;由是將士畏服,咸盡死力。將,卽亮翻;下同。性儉率,服御飲膳,取給而已。

 

 여러 신하들이 수도의 성을 험하게 더 높이고 궁실을 수리하기를 청하며 말하였다.

 "《易》에 이르기를, '왕과 공이 험준한 방비를 만들어서 그 나라를 지킨다.'라고 하고, 또 소하는 '천자는 사해를 집으로 삼으니 웅장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무겁게 할 방법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羣臣請增峻京城及脩宮室曰:「《易》云:『王公設險,以守其國。』《易‧坎卦‧彖辭》。又蕭何云:『天子以四海爲家,不壯不麗,無以重威。』」事見十一卷漢高帝七年。

 

 황제가 말하였다.

 "옛 사람은 말하기를 '덕망에 있지 험준한 것에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혁련굴개가 흙을 쪄서 성을 쌓았으나 짐이 그것을 없앴으니 어찌 성에 있겠는가? 지금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아서 바야흐로 백성의 힘을 필요로 하니 토목공사의 일은 짐이 아직 행하지 않을 것이다. 소하의 대답은 올바른 말이 아니다."

 帝曰:「古人有言:『在德不在險。』吳起之言。屈丐蒸土築城而朕滅之,豈在城也?今天下未平,方須民力,土功之事,朕所未爲。蕭何之對,非雅言也。」雅,正也。

 

 매번 재물이라는 것은 군대와 나라의 근본이니 가볍게 소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상을 내리는데 있어서는 모두 죽음으로 섬기고 공훈을 쌓은 가문에게 주었으며 친척과 군주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은 일찍이 법도를 거스르며 주게 한 적이 없었다.

 每以爲財者軍國之本,不可輕費至於賞賜,皆死事勳績之家,親戚貴寵未嘗橫有所及。橫,戶孟翻。

 

 장수에게 군대를 출전시키도록 명령하고 통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는데 그것을 어기는 사람은 대부분 패배하였다.

 命將出師,指授節度,違之者多致負敗。

 

 사람을 아는 일에 밝았으며 혹은 인사를 졸오 중에서도 발탁하였을 경우에는 오직 그 재간 중에서 장점을 이용하고 앞뒤 사정은 따지지 않았다.

 明於知人,或拔士於卒伍之中,唯其才用所長,不論本末。

 

 듣고 살피는 것이 세밀하고 예민하니 아랫사람은 감추는 마음이 없었고, 포상에는 천한 사람을 어기지 않았고 벌을 줄 때에는 귀한 사람을 피하지 않았으며 비록 아주 아끼는 사람이라도 끝내 관용하지 않았다.

 聽察精敏,下無遁情,賞不違賤,罰不避貴,雖所甚愛之人,終無寬假。

 

 항상 말하였다.

 "법이라는 것은 짐이 천하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니 어찌 감히 가볍게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격이 잔인하여 살육하는 일에 과감하엿는데, 때때로 이미 죽이고 나서 다시 후회하였다.

 常曰:「法者,朕與天下共之,何敢輕也。」然性殘忍,果於殺戮,往往已殺而復悔之。如崔浩之類是也。復,扶又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