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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子乙卯謂疾日/處暑節末候禾乃登2日(음7/16)己酉

solpee 2020. 9. 3. 08:41

《晉紀31 安 隆安 元年(丁酉, 397)》

 

 ㉔. 중산에 기근이 심하자 모용린이 2만여 명을 인솔하고 나가서 신시를 점거하였다. 8월 그믐 갑자일에 위왕 탁발규가 군사를 내어 그들을 공격하였다. 태사령 조승이 말하였다.

 "상서롭지 못합니다. 옛날 紂가 甲子日로 인하여 망하여 이를 疾日이라고 말하였는데, 전쟁에 참가하는 군사들이 이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㉔. 中山飢甚,慕容麟帥二萬餘人出據新市。新市縣,自漢以來屬中山。劉昫曰:新市,古鮮虞子國,唐爲定州新樂縣。杜佑曰:唐鎭州治眞定縣,漢新市縣故城在東北。帥,讀曰率。甲子晦,魏王珪進軍攻之。太史令鼂崇曰:「不吉。昔紂以甲子亡,謂之疾日,《左傳》:辰在子卯,謂之疾日。杜預《註》云:疾,惡也。紂以甲子喪,桀以乙卯亡,故以爲忌日。鼂,直遙翻。兵家忌之。」

 

 탁발규가 말하였다.

 "紂가 甲子日에 멸망하였지만, 周武는 甲子日에 일어나지 않았소?"

 조숭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겨울 , 10월 2일에 모용린이 퇴각하여 泒水(滹沱河)에서 방어하였다. 10일에 탁발규가 모용린과 더불어 의대에서 싸워서 그들을 대파하여 참수한 것이 9천여 급이었고, 모용린이 수십 기병과 더불어 달려가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서산으로 들어갔다가 끝내 업으로 도망하였다.

 珪曰:「紂以甲子亡,周武不以甲子興乎?」崇無以對。冬,十月,丙寅,麟退阻泒水。泒,音觚。甲戌,珪與戰於義臺,大破之,據李延壽《北史》,義臺,塢名。魏收《地形志》,新市縣有義臺城。斬首九千餘級,麟與數十騎馳取妻子入西山,遂奔鄴。

 

 20일에, 위가 중산에서 이기니, 연의 공경·상서·장리·사졸 가운데 항복한 사람이 2만여 명이었다. 장양과 이침이 먼저 일찍이 위에 항복했다가, 다시 도망하여 떠나갔지만 탁발규가 성에 들어와 그들을 모두 사면하여주었다.

 甲申,魏克中山,燕公卿、尚書、將吏、士卒降者二萬餘人。將,卽亮翻。降,戶江翻。張驤、李沈先嘗降魏,復亡去,復,扶又翻。珪入城,皆赦之。

 

 연의 璽繡·도서·부고의 진귀한 보물 1만 점을 획득하여 여러 신하들과 장수와 군사들에게 상으로 나누어 주었는데 차이를 두었다. 동생 탁발고를 추증하여 시호를 진민왕이라고 하고, 모용상의 무덤을 파내어 그 시신을 베고, 탁발고를 붙잡아 죽인 사람인 고패와 정동은 모두 5족을 멸하고서, 큰칼로 그들을 잘게 썰었다.

 得燕璽綬、圖書、府庫、珍寶以萬數,璽,斯氏翻。綬,音受。班賞羣臣將士有差。追諡弟觚爲秦愍王;發慕容詳冢,斬其尸;收殺觚者高霸、程同,皆夷五族,五族,謂五服內親也。以大刃剉之。

 

 23일에 3만 기병을 파견하여 위왕 탁발의에게 가서 장차 업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丁亥,遣三萬騎就衞王儀,將攻鄴。

 

《晉紀31 安 隆安 2年(戊戌, 398)》

 

 ⑯. 6월, 16일에 위왕 탁발규가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나라의 이름을 논의하도록 하였다. 모두 말하였다.

 "周와 秦 이전에는 모두 제후에서부터 올라가서 천자가 되었는데, 이러한 까닭으로 그 나라를 천하의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漢氏 이래로 모두가 한 자 정도의 땅으로 된 자산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백 세대를 이어오면서 代郡의 북쪽에서 이름을 열었고, 드디어 바야흐로 夏를 차지하고 어루만졌으니, 지금은 마땅히 '代'를 이름으로 삼아야 합니다."

 ⑯. 六月,丙子,魏王珪命羣臣議國號。皆曰:「周、秦以前,皆自諸侯升爲天子,因以其國爲天下號。漢氏以來,皆無尺土之資。我國家百世相承,開基代北,遂撫有方夏,據孔安國《尚書註》,方夏,謂四方中夏。夏,戶雅翻。今宜以代爲號。」

 

 황문시랑 최굉이 말하였다.

 "옛날에 商의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으니, 이러한 까닭으로 殷과 商 두 가지로 칭하였습니다.(BC1766 契의 商丘로부터 湯까지 亳,囂,相,耿,庇,奄,殷墟安養) 代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하늘의 명이 모든 일을 새롭게 고치는 것이니 '登國'이라 하였던 것을 처음에 이미 고쳐서 魏라고 불렀습니다. 무릇 魏라는 이름은 위대한 명칭으로 神州(신이 사는 고을)에 있는 높은 나라이니 마땅히 엤날같이 魏라고 칭하십시오."

 탁발규가 따랐다.

 黃門侍郎崔宏曰:「昔商人不常厥居,故兩稱殷、商,契始封於商。皇甫謐曰:今上洛商是也。契孫相土居商丘。自契至于成湯,八遷,湯始居亳,從先王居。後仲丁遷於囂,河亶甲居相,祖乙居耿。《書》曰:盤庚五遷,將治亳殷,從先王居。謂從帝嚳所居,居亳也。代雖舊邦,其命維新,登國之初,已更曰魏。事見一百六卷孝武太元十一年。更,工衡翻。夫魏者,大名,神州之上國也,《左傳》,卜偃曰:「魏,大名也。」戰國之時,魏爲大國。中國謂之神州。宜稱魏如故。」珪從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