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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聲鶴唳[fēng shēng hè lì]/ 處暑節中候天地始肅2日(음7/11)甲辰

solpee 2020. 8. 28. 16:56

《晉紀27 武帝 太元 8年(癸未, 383)

 

 ⑥. 겨울, 10월에 秦의 양평공 부융 등이 수양을 공격하고, 18일에 그곳에서 이기고 평로장군 서원희 등을 사로잡았다. 부융이 그의 참군인 하남 사람 곽포를 회남 태수로 삼았다. 모용수가 운성을 탈취하였다. 호빈은 수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물러나 협석을 지키는데 부융이 나아가서 이곳을 공격하였다. 秦의 위장군 양성 등이 무리 5만 명을 인솔하고 낙간에 주둔하여 회하에 목책을 만들고 동군들을 막았다. 

 ⑥. 冬,十月,秦陽平公融等攻壽陽;癸酉,克之,執平虜將軍徐元喜等。融以其參軍河南郭褒爲淮南太守。淮南郡本治壽陽,秦旣得之,以郭褒爲太守。慕容垂拔鄖城。杜預曰:江夏雲杜縣東南有鄖城。鄖,于分翻。胡彬聞壽陽陷,退保硤石,《水經註》:淮水東過壽春縣北,右合肥水;又北逕山峽中,謂之峽石,對岸山上結二城,以防津要。杜佑曰:硤石,今汝陰郡下蔡縣。融進攻之。秦衞將軍梁成等帥衆五萬屯于洛澗,栅淮以遏東兵。《水經註》:洛澗上承死馬塘水,北歷秦墟,下注淮,謂之洛口。帥,讀曰率;下同。

 

 사석과 사현 등이 낙간에서 25리 떨어져 진을 쳤으나 양성을 두려워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호빈은 양식이 다하여 은밀히 사절을 보내 사석 등에게 고하였다.

 "지금 적군은 강성한데 양식이 다하였으니 아마 다시는 대군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秦人이 그를 사로잡아 양평공 부융에게 보냈다. 부융은 말을 달려서 황제에게 보고하여 말하게 하였다.

 "적군이 적어 쉽게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만, 단지 도주할까 두려우니 신속히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謝石、謝玄等去洛澗二十五里而軍,憚成不敢進。胡彬糧盡,潛遣使告石等曰:「今賊盛糧盡,恐不復見大軍!」復,扶又翻。秦人獲之,送於陽平公融。融馳使白秦王堅曰:「賊少易擒,但恐逃去,宜速赴之!」使,疏吏翻;下同。融持議以爲晉不可伐,今臨敵乃輕脫如此,亦天奪其鑒也。少,詩沼翻。易,以豉翻。

 

 진황 부견이 마침내 대군을 항성에 남겨두고, 경무장한 기병 8천 명을 이끌고 밤낮으로 길을 달려서 수양에 있는 부융에게로 갔다. 상서 주서를 파견하여 보내와서 사석 등을 설득하여 말하였다.

 "강함과 약함의 기세가 다르니 빨리 항복하는 것만 못합니다."

 주서가 사사로이 사석 등에게 말하였다.

 "만약 秦의 백만 무리가 다 도착하면 진실로 대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모든 군사가 아직 모이지 않은 틈을 타서 마땅히 신속히 이를 공격해야 합니다. 만약 그 선봉을 패배시킨다면 곧 저들은 이미 기세를 빼앗겨 마침내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堅乃留大軍於項城,引輕騎八千,兼道就融於壽陽。遣尚書朱序來說謝石等,以爲:「強弱異勢,不如速降。」三年,堅執朱序於襄陽,拜爲度支尚書。說,輸芮翻。降,戶江翻。序私謂石等曰:「若秦百萬之衆盡至,誠難與爲敵。今乘諸軍未集,宜速擊之;若敗其前鋒,敗,補邁翻。則彼已奪氣,可遂破也。」

 

 사석은 부견이 수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단히 두려워서 싸우지 않고 秦의 군사를 지치게 하려고 하였다. 사염이 사석에게 주서의 말을 따를 것을 권하였다. 11월에 사현이 광릉의 재상 유뢰지를 파견하여 정예의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낙간으로 나아가게 하여 아직 10리 못 미친 지점에서 양성이 낙간을 막아 진을 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石聞堅在壽陽,甚懼,欲不戰以老秦師。謝琰勸石從序言。十一月,謝玄遣廣陵相劉牢之帥精兵五千趣洛澗,趣,七喻翻。未至十里,梁成阻澗爲陳以待之。陳,讀曰陣;下同。

 

 유뢰지는 곧장 앞으로 나가 강을 건너서 양성을 공격하여 그들을 대파하고, 양성과 악양 태수 왕영의 목을 베고, 또 군사를 나누어 그들이 돌아가는 나루를 차단하자 秦의 보병과 기병이 붕괴되어 다투어 회수로 달려가니 병사 중에 죽은 자가 1만5천 명이었고, 秦의 양주 자사 왕현 등을 사로잡고 그들의 무기와 군장비 등을 다 거두었다. 이에 사석 등의 모든 군사는 수로와 육로로 계속 나아갔다.

 牢之直前渡水,擊成,大破之,斬成及弋陽太守王詠;曹魏分西陽、蘄春,置弋陽郡;秦未能有其地也,王詠領太守耳。弋陽,唐爲光、蘄、黃三州之地。又分兵斷其歸津,斷,丁管翻。秦步騎崩潰,爭赴淮水,士卒死者萬五千人,執秦揚州刺史王顯等,盡收其器械軍實。

 

 진황 부견과 양평공 부융이 수양산에 올라가 이를 바라보았는데, 晉의 병부의 진지가 엄격히 정돈된 것을 보고, 또 팔공산 위의 초목을 바라보고 모두 晉의 병사로 여기고 부융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이 또한 강한 적인데, 어찌 약하다고 했는가?"

 낙심하여 비로소 두려운 얼굴색이 되었다.

 於是謝石等諸軍,水陸繼進。秦王堅與陽平公融登壽陽城望之,見晉兵部陣嚴整,又望八公山上草木皆以爲晉兵八公山在今壽春縣北四里。世傳漢淮南王安好神仙,忽有八公皆鬚眉皓素,詣門求見。門者曰:「吾王好長生,今先生無駐衰之術,未敢以聞。」八公皆變成童。遂立廟於山上。或言今廟食于此山者,乃左吳、朱驕、伍被、雷被等八人,皆淮南王客,世以八公爲仙,誤也。顧謂融曰:「此亦勍敵,何謂弱也!」勍,渠京翻,強也。憮然始有懼色。憮,罔甫翻,悵然失意貌。

 

 秦의 군사가 비수 가까이 가서 진을 치자 晉나라 군사는 건널 수가 없었다. 사현이 사절을 보내 양평공 부융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현군이 깊숙히 들어와서 물에 근접하여 진지를 치니, 이는 곧 오래 버티자는 계책이고 빨리 싸우고자 하는 계책이 아니군요? 만약 진지를 옮겨서 조금만 물러나게 하여 우리 晉나라 병사가 건널 수 있게 해서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역시 좋지 않겠습니까?"

 秦兵逼肥水而陳,晉兵不得渡。謝玄遣使謂陽平公融曰:「君懸軍深入,而置陳逼水,此乃持久之計,非欲速戰者也。若移陳少卻,少,詩沼翻;下同。使晉兵得渡,以決勝負,不亦善乎!」

 

 秦의 제장들이 모두 말하였다.

 "우리들은 많고 저들은 적어서 그들을 막아 그들이 올라올 수 없게 하여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다만 군사를 이끌고 조금 물러나게 해서 그들에게 절반 쯤 건너게 한 다음 우리들의 철기로 그들을 쫓아 죽이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秦諸將皆曰:「我衆彼寡,不如遏之,使不得上,上,時掌翻。可以萬全。」堅曰:「但引兵少卻,使之半渡,我以鐵騎蹙而殺之,蔑不勝矣!」

 

 부융도 또한 그렇다고 여기고 마침내 군사를 지휘하여 물러나게 하였다.

 秦兵들이 물러나자 다시 멈출 수가 없었다. 사현·사염·환이 등이 군사를 인솔하여 물을 건너서 그들을 공격하였다. 부융이 말을 타고 달려 진지를 순행하며 물러나는 군사들을 통솔하고자 하였으나, 말이 쓰러져서 晉나라 병사에게 죽자, 秦兵들은 마침내 붕괴하였다. 사현 등이 이긴 기세를 타고 추격하여 청강에 이르렀고, 秦軍이 대패하여 스스로 서로 짓밟고 밟혀서 죽은 사람이 들을 덮고 내를 메웠다.

 融亦以爲然,遂麾兵使卻。秦兵遂退,不可復止。兩陳相向,退者先敗,此用兵之常勢也。復,扶又翻。謝玄、謝琰、桓伊等引兵渡水擊之。融馳騎略陳,欲以帥退者,帥,讀曰率。馬倒,爲晉兵所殺,秦兵遂潰。玄等乘勝追擊,至于青岡;青岡去今壽春縣三十里。秦兵大敗,自相蹈藉而死者,蔽野塞川言敗兵自相蹈踐,枕藉而死也。藉,慈夜翻。塞,悉則翻。

 

 그들 가운데 달아나던 병사들은 바람소리와 새 우는 소리만 듣고도 모두 晉兵이 또 공격해 온 것으로 여기고 낮과 밤을 쉬지 않고 풀 숲을 헤치며 걷고 또 걷고 이슬을 맞으며 잠을 자고, 거듭 굶주리고 얼어서 죽은 병사가 열에 7,8 명이나 되었다.

 其走者聞風聲鶴唳,皆以爲晉兵且至,晝夜不敢息草行露宿草行者,涉草而行,不敢由路;露宿者,宿於野次,不敢入人家;皆懼追兵也。重以飢凍,重,直用翻。死者什七、八。

 

 애초에, 秦의 군사가 조금 물러났을 때 주서가 秦軍 뒤에서 소리치며 말하였다.

 "秦軍이 패하였다!"

 무리들이 마침내 크게 달아났다. 주서는 이어서 장천석·서원희와 더불어 모두 도망쳐서 돌아왔다. 진황 부견이 타던 운모거를 포획하였다. 다시 수양을 탈취하고, 회남 태수 곽포를 사로잡았다.

 初,秦兵少卻,朱序在陳後呼曰:呼,火故翻。「秦兵敗矣!」衆遂大奔。序因與張天錫、徐元喜皆來奔。獲秦王堅所乘雲母車。【章:十二行本「車」下有「及儀服、器械、軍資、珍寶、畜產不可勝計」十五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退齋校同。】晉制:雲母車,以雲母飾犢車;臣下不得乘,以賜王公耳。趙彥絟《續古今註》:石虎皇后乘輦,以純雲母代紗,四望皆通徹。復取壽陽,執其淮南太守郭褒。晉復取壽陽,故秦所置太守見執。

 

 부견은 유시를 맞고 혼자서 말을 타고 달아나 회수의 북쪽에 이르자 배고픔이 심하였는데, 백성 중에 물을 부어 대운 밥과 돼지 넓적다리를 진상하는 사람이 있자 부견이 이를 먹고 비단 열 필과 솜 열 근을 하사하였다. 사양하며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안락함에 싫증을 느끼셔서 스스로 위험과 곤경을 차지하게 되셨습니다. 폐하는 신의 아버지 이시니 어찌 자식이 그 아버지를 봉양하고서 보답을 바라겠습니까?"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가버렸다.

 堅中流矢,中,竹仲翻。單騎走至淮北,飢甚,民有進壺飧、豚髀者,飧,蘇昆翻。熟食曰飧。《字林》曰:水澆飯也。堅食之,賜帛十匹,綿十斤。辭曰:「陛下厭苦安樂,樂,音洛。自取危困。臣爲陛下子,陛下爲臣父,安有子飼其父而求報乎!」弗顧而去。飼,祥吏翻。

 

 부견이 장부인에게 말하였다.

 "내가 지금 다시 무슨 면목으로 천하를 다스리겠는가?"

 줄줄 눈물이 흘렀다.

 이대 모든 군사들이 모두 무너졌으나 오직 모용수가 거느리는 3만 명만은 홀로 온전하여 부견은 천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그에게로 갔다. 세자 모용보가 모용수에게 간하였다.

 堅謂張夫人曰:「吾今復何面目治天下乎!」復,扶又翻。治,直之翻。潸然流涕。潸,所姦翻,涕流貌,又所版翻、所晏翻。

是時,諸軍皆潰,惟慕容垂所將三萬人獨全,垂別擊鄖城,不與淝水之戰,且持軍嚴整,故諸軍皆潰而垂軍獨全。將,卽亮翻。堅以千餘騎赴之。世子寶言於垂曰:

 

 "집안과 나라가 기울어지고 엎어졌지만 하늘의 명과 사람의 마음은 지존에게로 돌아왔고, 단지 때에 맞는 운수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스스로 감추어야 할 뿐입니다. 지금 황제의 군사가 패배하여 우리에게 몸을 위탁하였으니 이것은 하늘이 그를 빌려서 곧 연의 복록을 회복시키려는 것이어서 이때를 잃어버려서는 안 되니, 바라건대 마음 속에 있는 사소한 은혜를 가지고 사직이 중대하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家國傾覆,天命人心皆歸至尊,但時運未至,故晦迹自藏耳。今秦主兵敗,委身於我,是天借之便以復燕祚,此時不可失也,願不以意氣微恩亡社稷之重!」意氣微恩,謂堅厚禮垂父子也。

 

 모용수가 말하였다.

 "너의 말이 옳다. 그러나 그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나에게 목숨을 내던지고 있는데 어찌 해칠 수 있겠느냐! 하늘이 진실로 그를 버렸으니, 망하지 않을까 근심할 필요는 없다. 그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보호하여 은덕으로 보답하고 천천히 그에게 틈이 생기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들을 도모하는 것만 못하며, 이미 묵은 마음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또한 의로움으로써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垂曰:「汝言是也。然彼以赤心投命於我,若之何害之!天苟棄之,不患不亡。不若保護其危以報德,徐俟其釁而圖之,旣不負宿心,且可以義取天下。」慕容垂此言,猶有君人之度。

 

 분위장군 모용덕이 말하였다.

 "진이 강하여 우리 연을 병합하였고, 진이 약해지자 그것을 도모하는 것이니, 이는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설욕하는 것이지 결코 묵은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닌데, 형님은 어찌하여 얻었는데도 거지지 아니하고 수만의 무리를 풀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려는 것입니까?"

  奮威將軍慕容德曰:「秦強而幷燕,秦弱而圖之,此爲報仇雪恥,非負宿心也;兄柰何得而不取,釋數萬之衆以授人乎?」

 

 모용수가 말하였다.

 "나는 예전에 태부에게 용납을 받지 못해 몸을 둘 곳이 없게 되자 죽음에서 도망쳐서 秦으로 갔고, 진황은 그 나라늬 인사로 나를 대우해주고 은총과 예우를 극진히 갖추어 주었다. 후에 다시 왕맹에게 팔리게 되었지만 스스로 밝힐 수가 없었으나 부견이 홀로 그것을 밝혀줄 수 있었으니 이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 만약 저족의 운명이 반드시 궁색하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관동을 수습하여 품에 안고서 선조들의 대업을 회복할 뿐이고, 관서는 우리의 소유가 아닐 것이다."

 垂曰:「吾昔爲太傅所不容,置身無所,逃死於秦,見一百二卷海西公太和四年。秦主以國士遇我,恩禮備至。後復爲王猛所賣,復,扶又翻;下尚復、德復同。無以自明,秦主獨能明之,見太和五年。此恩何可忘也!若氐運必窮,吾當懷集關東,以復先業耳,關西會非吾有也。」

 

 관군장군 행참군 조추가 말하였다.

 "명공께서 마땅히 연 왕조를 계승하고 회복해야 한다는 것은 도참에 드러나 있으며, 지금 하늘의 때가 이미 이르렀는데 오히려 다시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만약 부견을 죽이고 업도를 점거해서 북을 치며 서쪽으로 진군해 나간다면 삼진 지역 역시 부씨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모용수의 친한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모용수에게 부견을 죽일 것을 권하였으나 모용수가 따르지 않고 모든 군사를 부견에게 주었다.

 冠軍行參軍趙秋曰:「明公當紹復燕祚,著於圖讖;冠,古玩翻。讖,楚譖翻。今天時已至,尚復何待!若殺秦主,據鄴都,鼓行而西,三秦亦非苻氏之有也!」垂親黨多勸垂殺堅,垂皆不從,悉以兵授堅。

 

 평남장군 모용위는 운성에 주둔하고 이ㅆ었는데, 부견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무리를 버리고 숨어서 달아나 형양에 이르자 모용덕은 다시 모용위에게 군사를 일으켜 연의 조복을 회복시키라고 유세하엿으나 모용위가 따르지 않았다.

 平南將軍慕容暐屯鄖城,聞堅敗,棄其衆遁去;至滎陽,慕容德復說暐起兵以復燕祚,尚復、德復,扶又翻。說,輸芮翻。暐不從。

 

 사안은 파발마가 보내온 편지를 받아보고 秦軍이 이미 패하였다는 것을 알았으나 당시 마침 손님과 더불어 바둑을 두고 있었으므로 편지를 책상 위에 놓아두고 기뻐하는 기색이 없이 변함없이 바둗을 두었다. 손님이 이를 묻자 천천히 대답하였다.

 "어린 자식들이 마침내 이미 적군을 격파하였습니다."

 이미 그렇게 하고서 끝내고 안으로 들어오면 문지방을 넘다가 나막신의 굽이 부러지는 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謝安得驛書,知秦兵已敗,時方與客圍棋,攝書置牀上,了無喜色,攝,收也。圍棋如故。客問之,徐答曰:「小兒輩遂已破賊。」旣罷,還內,過戶限,不覺屐齒之折。言其喜甚也。史言安矯情鎭物。人臣以安社稷爲悅者也,大敵壓境,一戰而破之,安得不喜乎!屐齒之折,亦非安之訾也。

 

 2일에 사석 등이 건강으로 돌아왔는데 秦의 악공을 데리고 왔기에 능히 옛 소리를 익힐 수 있었으며, 이에 종묘에는 비로소 금석의 음악을 구비할 수 있게 되었다. 10일에 장천석을 산기상시로 삼고, 주서를 낭야위 내사로 삼았다.

 丁亥,謝石等歸建康,得秦樂工,能習舊聲,於是宗廟始備金石之樂。永嘉之亂,伶官樂器皆沒於劉、石。江左初立,宗廟以無雅樂及伶人,省太樂幷鼓吹令;是後頗得登歌食舉之樂,猶有未備。太寧末,明帝又訪阮孚等增益之。咸和中,成帝乃復置太樂官,鳩集遺工,而尚未有金石也。及慕容儁平冉閔,兵戈之際,鄴下樂人頗亦有來者。謝尚鎭壽陽,採拾樂人以備太樂,幷制石磬,雅樂始頗具。而王猛平鄴,慕容氏所得樂聲,又入關右;今破苻堅,獲其樂工楊蜀等,閑習舊樂,於是金石始備焉。乙未,以張天錫爲散騎常侍,散,悉亶翻。騎,奇寄翻。朱序爲琅邪內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