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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圖今日復見太原王! / 鷹乃祭鳥5日(음7/9)壬寅

solpee 2020. 8. 27. 10:05

《晉紀24 海西公 太和 5年(庚午, 370)

 

 ⑮. 진의 병사들이 멀리까지 나아가 동쪽으로 가서 가을, 10월, 26일에 업을 포위하였다. 왕맹이 상소문을 올렸다.

 "신이 23일에 더러운 무리들을 크게 섬멸하였습니다. 폐하의 어질고 아껴주시는 뜻을 좇아서 6주에 있는 병사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주군을 바꾸었으니 스스로 미욱함을 지키고 명령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도 해를 주지 않습니다."

 ⑮. 秦兵長驅而東,自潞川而東攻鄴。丁卯,圍鄴。猛上疏稱:「臣以甲子之日,大殲醜類。謂甲子之日克勝,事同周武王克紂。殲,息廉翻。順陛下仁愛之志,使六州士庶,不覺易主,自非守迷違命,一無所害。」

 

 황제 부견이 답하였다.

 "장군의 전역은 한 계절을 넘기지 아니하고 으뜸가는 악한 사람을 이기고 들어버렸으니, 그 공훈은 옛날 사람보다 높소. 짐이 지금 친히 6군을 인솔하고 별을 보면서 출발할 것이오. 장군께서는 장사들을 휴양하게 하고 짐이 도착할 때를 기다려서 그런 다음에 그것을 빼앗으시오."

 秦王堅報之曰:「將軍役不踰時,三月爲一時。而元惡克舉,勳高前古。朕今親帥六軍,星言電赴。《詩》曰:星言夙駕。謂早駕見星而行也。電赴,言其疾也。帥,讀曰率。將軍其休養將士,以待朕至,然後取之。」

 

 왕맹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 업의 근처에서는 겁탈하는 일이 공공연하게 행해졋는데, 왕맹이 도착하게 되자 멀고 가까운 곳이 질서정연하게 되고 호령이 엄하고 분명하며, 군사들이 사사롭게 치범하는 일이 없고 법령은 간단하였지만 정치는 관대하여 연의 백성들은 작기 그 자신의 직업에서 편안하게 느끼게 되니 또한 말하였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오늘 태원왕을 다시 만났구나!"

 猛之未至也,鄴旁剽劫公行,剽,匹妙翻。及猛至,遠近帖然;號令嚴明,軍無私犯,言軍士不敢私犯鄴民也。法簡政寬,燕民各安其業,更相謂曰:「不圖今日復見太原王!更,工衡翻。復,扶又翻。

 

 왕맹이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모용현공이 기이한 선비라더니 정말로 옛날의 백성들을 사랑했던 유풍이라고 하겠다."

태뢰를 준비하여 그에게 제사를 드렸다.

 王猛聞之,歎曰:「慕容玄恭信奇士也,可謂古之遺愛矣!」慕容恪,字玄恭,封太原王。設太牢以祭之。

 

 11월에, 진황제가 이위를 남겨서 태자를 보필하여 장안을 지키게 하고, 양평공 부융에게는 낙양을 진수하게 하고, 스스로 정예병 10만여 명을 인솔하고 업으로 가는 데 7일 만에 안양에 도착하여 조부 시절의 옛 노인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왕맹이 몰래 안양에 가서 부견을 알현하니 부견이 말하였다.

 "옛날에 주아부는 한문제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느데, 지금 장군이 적과 맞대고 있으면서 군사를 버렸으니 어쩐 일이오?"

 十一月,秦王堅留李威輔太子守長安,陽平公融鎭洛陽,自帥精銳十萬赴鄴,七日而至安陽,《晉志》:安陽縣屬魏郡。魏收《志》曰:天平初,併蕩陰、安陽屬鄴。又汲郡北脩武縣有安陽城。宴祖父時故老。苻洪父子先屯枋頭,有故老尚存,聞堅之來,迎於安陽,故宴之。猛潛如安陽謁堅,堅曰:「昔周亞夫不迎漢文帝,見十五卷漢文帝後六年。今將軍臨敵而棄軍,何也?」

 

 왕맹이 말하였다.

 "주아부는 앞에서 임금을 물리쳐서 명성을 구하였지만 신은 가만히 이를 하찮게 생각합니다. 또 신은 폐하의 신령함을 받들고 곧 망할 오랑캐를 치고 있으니 비유하자면 가마솥에 있는 물고기인데 어찌 염려하겠습니까? 감국(황제 대리 태자)은 유충하신데 난가가 멀리까지 왕림하시어 정상을 벗어나서 걱정거리가 있게 되면 이를 후회하여도 어찌 따라 잡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신이 파상에서 드린 말씀을 잊으셨습니까?"

 猛曰:「亞夫前卻人主以求名,臣竊少之。少,詩沼翻。且臣奉陛下威靈,擊垂亡之虜,譬如釜中之魚,何足慮也!監國沖幼,太子守曰監國。監,工銜翻。鸞駕遠臨,脫有不虞,悔之何及!陛下忘臣灞上之言邪!」

 

 애초에, 연의 의도왕이 무리 1만여 명을 인솔하고 사정에 주둔하고서 태부 모용평의 뒤를 잇게 되었는데,  모용평이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내황에 주둔하였다. 부견이 등강에게 신도를 공격하게 하였다. 6일에 모용환이 선비족 5천 명을 인솔하고 용성(사마광이 조양이라 하나 조양은 고구리영토이고 숭덕으로 비정됨)으로 도망하고, 부여와 고구리 그리고 상당의 인질 500여 명을 인솔하고 밤에 업의 북쪽 문을 열고 진병을 받아 들이니, 연왕 모용위와 상용왕 모용평·낙안왕 모용장·정양왕 모용연·좌위장군 맹고·전중장군 애랑 등이 용성으로 달아났다. 10일에 진황이 업에 있는 궁전에 들어갔다.

 初,燕宜都王桓帥衆萬餘屯沙亭,杜預曰:陽平元城縣有沙亭。爲太傅評後繼,聞評敗,引兵屯內黃。內黃縣自漢以來屬魏郡。堅使鄧羌攻信都。丁丑,桓帥鮮卑五千奔龍城。戊寅,燕散騎侍郎餘蔚帥扶餘、高句麗及上黨質子五百餘人,蔚,於勿翻。燕蓋遣兵戍上黨,取其子弟留於鄴以爲質。餘蔚,扶餘王子,故陰率諸質子開門以納秦兵。質,音致。句,如字,又音駒。麗,力知翻。夜,開鄴北門納秦兵,燕主暐與上庸王評、樂安王臧、定襄王淵、左衞將軍孟高、殿中將軍艾朗等奔龍城。《姓譜》:艾姓,《晏子春秋》齊有大夫艾孔。《風俗通》有龐儉母艾氏。辛巳,秦王堅入鄴宮。

 

 모용수가 연의 공경 대부와 옛날의 관료들을 보고서 성난 얼굴을 하였다. 고필이 모용수에게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조종이 오래 쌓은 밑천에 의지하여 영웅호걸과 세상에서 뛰어난 지략을 짊어지시고, 바로 액운을 만나 밖에 몸을 맡기셔서 사셨습니다. 지금 비록 국가가 기울어여서 전복되었지만 어찌 그것이 부흥시키는 운이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까?

 慕容垂見燕公卿大夫及故時僚吏,有慍色。慍,於問翻。高弼言於垂曰:「大王憑祖宗積累之資,負英傑高世之略,遭值迍阨,迍,株倫類。棲集外邦。今雖家國傾覆,安知其不爲興運之始邪!

 

 어리석은 저는 우리나라의 옛 사람들이 강이나 바다와 같은 도량을 품으시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연결하셔서 삼태기를 듸엎어 흙을 쌓아가는 기초를 세우시고 구인(九仞;仞=8尺×9=72尺)을 이루는 공로를 세우셔야지 어찌하여 한 번 화를 내고 이를 던져버리십니까? 어리석은 저는 가만히 대왕을 위하여 말씀드린다면 그렇게는 하지 마십시오."

 모용수가 기뻐하며 이를 좇았다.

 愚謂國之舊人,宜恢江海之量,有以慰結其心,以立覆簣之基,成九仞之功,言譬如爲山,自覆一簣而進成九仞之功。簣,求位翻,土籠也。八尺曰仞。柰何以一怒捐之,愚竊爲大王不取也!」高弼先從垂奔秦,故敢進言。爲,于僞翻。垂悅,從之。

 

 연의 주군 모용위가 업을 출발할 때 위사는 1천여 명이었으나, 이미 성을 빠져 나오고 나서는 모두가 흩어져서 모직 10여 기만이 좇아서 가니, 진황 부견이 유격장군 곽경에게 그들을 추격하게 하였다. 때로는 길이 어려워서 맹고가 모용위를 부축하여 모시고 두 왕을 호위하니 그는 대단히 피곤한데, 또 있는 곳에서는 도적을 만나서 이리자리 싸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燕主暐之出鄴也,衞士猶千餘騎,旣出城,皆散,惟十餘騎從行;秦王堅使游擊將軍郭慶追之。時道路艱難,孟高扶侍暐,經護二王,二王,謂樂安王臧、定襄王淵也。極其勤瘁,瘁,秦醉翻。又所在遇盜,轉鬬而前

 

 며칠 만에 福祿(邢台)에 도착하여서 무덤에 의지하여 말안장을 풀고 쉬었는데, 도적 20여 명이 갑자기 닥치니 모두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어서 맹고가 칼을 가지고 싸워서 수 명을 죽였다. 맹고의 힘이 끝까지 가니 스스로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곧바로 앞으로 가서 한 명의 도적을 잡아서 땅에다 팽개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사나이 끝이로구나!"

 남아 잇던 도적들이 옆에서 맹고를 쏘아서 죽였다. 애랑이 맹고가 홀로 싸우는 것을 보고 또한 돌아와서 도적에게로 달려가서 함께 죽었다.

 數日,行至福祿,依冢解息,解息,解鞍息馬也。冢,知隴翻。盜二十餘人猝至,皆挾弓矢,高持刀與戰,殺傷數人。高力極,力疲極也。自度必死,乃直前抱一賊,頓擊於地,大呼曰:「男兒窮矣!」餘賊從旁射高,殺之。度,徒洛翻。射,而亦翻。艾朗見高獨戰,亦還趨賊,幷死。趨,七喻翻。

 

 모용위가 말을 잃어버리고 걸어서 달아나는데, 곽경이 뒤쫓아 가서 高陽에서 따라 잡고, 부장 거무가 장차 그를 결박하려 하자 모용위가 말하였다.

 "너는 어느 소인인데 천자를 결박하느냐?"

 거무가 말하였다.

 "나는 조서를 받고 도적을 쫓아왔는데, 어찌 천자라 하느냐?"

 잡아가지고 황제에게 데려 가니 부견이 그가 항복하지 않고 도망한 상황을 힐문하자 대답하였다.

 "여우도 죽을 때는 언덕으로 머리를 두는데 선산(昌黎)으로 가서 죽으려는 것 뿐이오."

 황제가 그를 애달프게 생각하여 풀어주고, 궁궐로 돌아가서 문무관원을 인솔하고 나와서 항복하게 하였다.(모용준이 칭제한 이래 34년 만에 전연은 망했다.) 모용위가 맹고와 애랑의 충성을 부견에게 칭찬하니 부견이 후하게 장사지내게 하며, 그의 아들을 낭중으로 삼았다.

 暐失馬步走,郭慶追及於高陽,部將巨武將縛之,《姓譜》:巨,姓也。暐曰:「汝何小人,敢縛天子!」武曰:「我受詔追賊,何謂天子!」執以詣秦王堅,堅詰其不降而走之狀,詰,去吉翻。降,戶江翻;下同。對曰:「狐死首丘,欲歸死於先人墳墓耳。」慕容氏之先皆葬昌黎。堅哀而釋之,令還宮,帥文武出降。晉穆帝永和八年,燕主儁改元稱帝,傳子暐,共十九年而亡。帥,讀曰率。暐稱孟高、艾朗之忠於堅,堅命厚加斂葬,斂,力贍翻。拜其子爲郎中。

 

 곽경이 낭가서 용성에 이르니 태부 모용평이 고구리로 달아나고, 고구리는 모용평을 잡아서 진으로 보냈다. 의도왕 모용환이 진동장군인 발해왕 모용방을 죽이고 그의 무리를 합병하고서는 요동(迂安)으로 달아났다. 요동 태수 한조가 먼저 이미 秦에 항복하였는데, 모용환이 도착하였으나 들여보내지를 않자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곽경이 장군 주억을 파견하여 이를 치니 모용환이 무리들을 버리고 홀로 달아나고, 주억이 그를 잡아서 죽였다.

 郭慶進至龍城,太傅評奔高句麗,高句麗執評,送於秦。宜都王桓殺鎭東將軍勃海王亮,幷其衆,奔遼東。遼東太守韓稠,先已降秦,桓至,不得入,攻之,不克。郭慶遣將軍朱嶷擊之,桓棄衆單走,嶷獲而殺之。嶷,魚力翻。

 

 여러 주의 주목과 태수 그리고 6夷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秦에 항복하니 무릇 157개 군과 2백46만 호, 인구 9백99만 명을 얻었다. 연의 궁인과 진기한 보배를 장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조서로 대사면령을 내리고 말하였다.

 "짐이 덕이 적고 박하지만 빛나는 천명을 외람되이 이었는데,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덕을 가지고 품어주고, 四維를 부드럽게 복종시킬 수 없어서 전차를 여러번 타게 하여 이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으니, 비록 백성들의 허물이 있다고 하여도 그러나 또한 짐의 죄로다. 그리하여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니 이와 더불어 새로이 시작하라."

 諸州牧守及六夷渠帥盡降於秦,帥,所類翻。凡得郡百五十七,戶二百四十六萬,口九百九十九萬。以燕宮人、珍寶分賜將士。將,卽亮翻。下詔大赦曰:「朕以寡薄,猥承休命,不能懷遠以德,柔服四維,四維,東南維,西南維,東北維,西北維。至使戎車屢駕,有害斯民,雖百姓之過,然亦朕之罪也。其大赦天下,與之更始。」更,工衡翻。〉...이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