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拔敦實,斥華僞,進沖遜,抑阿黨[bá dūn shí,chì huá wěi,jìn chōng xùn,yì ā dǎng]/大雨始行4日(음6/16)庚辰

solpee 2020. 8. 4. 18:26

《韓紀57 孝獻帝 建安 13 (戊子, 208)

 

 

 ④. 여름, 6월에 삼공 명칭의 관직을 없애고 다시 승상·어사대부를 설치하였다. 9일에 조조를 승상으로 삼았다.

 ④. 夏,六月,罷三公官,復置丞相、御史大夫。漢初,以丞相、御史大夫、太尉爲三公,哀帝元壽二年,以大司馬、大司徒、大司空爲三公,中興以來,以太尉、司徒、司空爲三公。今雖復置丞相、御史,而操自爲丞相,事權出於一矣。癸巳,以曹操爲丞相。...................중략.....................

 

 최염·모개가 나란히 인재 선발을 맡았는데, 그들이 천거하고 등용시키는 자는 모두 청렴하고 올바른 인사였으며, 비록 당시에 큰 명성을 갖고 있어도 행실이 근본에서 나온 자가 아니면 끝내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돈후하고 충실한 사람을 발탁하였고, 화려하고 거짓말하는 자를 물리쳤고, 허심탄회하고 겸손한 자를 진급시켰고, 아부하고 무리를 짓는 사람을 억눌렀다.

 琰、玠並典選舉,其所舉用皆清正之士,雖於時有盛名而行不由本者,終莫得進。拔敦實,斥華僞,進沖遜,抑阿黨。行,下孟翻。沖,謙虛也,和也。

 

 이로 말미암아 천하의 선비들은 청렴과 절조로써 스스로를 연마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으며 비록 귀하고 총애를 받는 신하라도 수레와 관복에서 감히 도를 넘지 못하였다. 마침내 장리 가운데 돌아오는 경우에 이르러서도(지방직에서 중앙으로 복귀) 때 묻은 얼굴과 남루한 옷을 입고 혼자 장식없는 수레를 탔으며, 군리는 관부에 들어와서는 조복차림으로 걸어 다녔으니,  관리는 위에서 청렴하게 되었고 풍속이 아래로 옮겨지게 되었다.

 由是天下之士莫不以廉節自勵,雖貴寵之臣,輿服不敢過度,至乃長吏還者,垢面羸衣,獨乘柴車,軍吏入府,朝服徒行,長,知兩翻。朝,直遙翻。吏潔於上,俗移於下。操聞之,歎曰:「用人如此,使天下人自治,吾復何爲哉!」復,扶又翻。

 

 

 ⑭. 익주목 유장이 조조가 형주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별가 장송을 파견하여 조조에게 경하드렸다. 장송은 사람됨이 체구가 작고 행동이 방탕하나 식견은 통달했고 결과에 날카로웠다. 조조는 이때 이미 형주를 평정하고 유비를 패주시켰으니, 다시는 장송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⑭. 益州牧劉璋聞曹操克荊州,遣別駕張松致敬於操。松爲人短小放蕩,然識達精果。操時已定荊州,走劉備,不復存錄松。復,扶又翻。

 

 주부 양수가 조조에게 장송을 벽소할 것을 아뢰었으나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장송은 이 일로 원망하여 돌아가서 유장에게 조조와 단절하고 유비와 서로 결맹하도록 권하자 유장이 그 말을 따랐다.

 主簿楊脩白操辟松,操不納;松以此怨,歸,勸劉璋絕操,與劉備相結,璋從之。爲後十六年璋迎備張本。

 

 습착지가 평론하였다.

 "옛날에 제 환공이 한 번 공적을 자랑하자 배반한 자는 아홉 개 나라였으며, 조조가 잠시 스스로 교만하고 자랑하자 천하가 삼분되었다. 모두 수십 년 동안 힘썼으나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찰나에 이를 버렸으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한가?"

 習鑿齒論曰:昔齊桓一矜其功而叛者九國;《公羊傳》曰:葵丘之會,桓公震而矜之,叛者九國。曹操暫自驕伐而天下三分。皆勤之於數十年之內而棄之於俯仰之頃,豈不惜乎!

 

《韓紀57 孝獻帝 建安 15 (庚寅, 210)

 

 

 ①. 봄에 명령을 내려 말하였다.

 "맹공작이 趙나라와 魏나라를 위하여 원로 노릇을 하였더라면 잘하였겠지만. 滕나라롸 薛나라의 대부 노릇을 할 수는 없었다.

 ①. 春,下令曰:「孟公綽爲趙、魏老則優,不可以爲滕、薛大夫。《論語》載孔子之言。朱子曰:公綽,魯大夫。趙、魏,晉卿之家。老,家臣之長。大家勢重而無諸侯之事,家老望尊而無官守之責。優,有餘也。滕、薛,二國名;大夫,任國政者。滕、薛國小政繁,大夫位高責重。然則公綽蓋廉靜寡欲,而短於才者。

 

 만약 반드시 깨끗하고 욕심이 없는 선비가 된 이후라야 등용할 수 있다면 제 환공은 어떻게 세상을 제패하였겠는가? 두 세 명의 그대들은 나를 도와 가려있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밝혀서 천거하는데, 오직 재주만을 가지고 천거한다면 내가 그를 기용하겠노라!"

 若必廉士而後可用,則齊桓其何以霸世!管仲富擬公室,築三歸之臺,塞門反坫,鏤簋朱紘,桓公用之而霸。二三子其佐我明揚仄陋,《書‧堯典》曰:明明揚仄陋。揚,舉也。唯才是舉,吾得而用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