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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東은 지금의 豊潤·昌黎다./ 大暑節仲候土潤溽暑5日(음6/11)乙亥

solpee 2020. 7. 31. 05:37

《韓紀51 孝獻帝 初平 元 (庚午, 190)

 

 13. 여름, 4월에 유주목 유우를 태부로 삼았는데, 도로가 막혀서 신명이 끝내 지나갈 수 없었다. 이보다 먼저 유주 지역은 荒外지역(국경 밖)과 맞대어 있어서 재물과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고, 해마다 항상 청주(산동)와 기주(하북 남부)의 부조인 2억 전 남짓을 갈라서 충당하였었다.

 13. 夏,四月,以幽州牧劉虞爲太傅,道路壅塞,塞,悉則翻。信命竟不得通。先是,幽部應接荒外,荒外,言荒服之外也。先,悉薦翻。資費甚廣,歲常割青、冀賦調二億有餘以足之。調,徒弔翻。

 

 이때 곳곳의 길이 끊겨서 수송을 위탁한 화물이 오지 않아 유우는 해진 옷을 입고 짚신을 신었으며 음식에는 고기반찬을 곁들이지 못했지만, 너그러운 정치에 힘쓰고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였으며 上谷(懷來)에서 胡市(국경시장)를 열고, 漁陽(密雲)에 있는 염철을 유통시켜서, 백성들은 기뻐하고 해마다 풍년들어 곡식이 한 石에 30전이었다.

 時處處斷絕,委輸不至,委,於僞翻。輸,舂遇翻。而虞敝衣繩屨,食無兼肉,務存寬政,勸督農桑,開上谷胡市之利,通漁陽鹽鐵之饒,上谷舊有關市,與胡人貿易。漁陽舊有鹽官、鐵官。民悅年登,穀石三十,

 

 靑州와 徐州의 선비와 평민들이 난리(황건적)를 피하여 유우에게 귀부한 자가 백여 만 명이었지만, 유우는 모두 거두어 살피고 따스하게 진휼하여 생업을 편안하게 이어나가게 하니 유민들이 모두 사민의 괴로움을 잊게 되었다.

 青、徐士庶避難歸虞者百餘萬口,虞皆收視溫卹,爲安立生業,難,乃旦翻。爲,于僞翻。流民皆忘其遷徙焉。 

 

 

 20. 중랑장 서영이 같은 군에 살고 있는 옛 기주자사였던 공손도를 동탁에게 천거하니, 동탁이 요동(당시 요하는 지금의 灤河)태수로 삼았다.

 공손도가 관아에 이르러 법을 가지고서 군 안에 살고 있는 이름난 호족과 대성 100여 집안을 도륙하니 군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몸을 떨었고 마침내 동쪽으로 가서 고구리를 치고 서쪽으로 오환을 공격하였는데, 가까이 지내는 관리인 유의와 양의 등에게 말하였다.

 20. 中郎將徐榮薦同郡故冀州刺史公孫度於董卓,卓以爲遼東太守。度到官,以法誅滅郡中名豪大姓百餘家,郡中震慄,乃東伐高句驪,句,如字,又音駒。驪,力知翻。西擊烏桓,語所親吏柳毅、陽儀等曰:語,牛倨翻。《姓譜》:柳,本自魯孝公子子展之孫,以王父字爲氏。至展禽,食采於柳下,因爲氏。

 

 "한 왕조의 운명이 장차 끊어지려 하니 마땅히 여러 경들과 함께 올바른 것을 도모할 따름이오."

 이에 요동을 나누어서 遼西(灤河의 서쪽 唐山,豊潤,遵化일대)와 중요군으로 만들어 각기 태수를 두었으며, 바다를 건너 東來(지금의 烟台市 일원:당시의 바다는 지금보다 100여 km더 내륙으로 들어와 있었다.)에 속한 여러 현을 흡수하여 營州 자사를 두었다.

 「漢祚將絕,當與諸卿圖正【章:甲十一行本「正」作「王」;乙十一行本同;孔本同;熊校同。】耳。」於是分遼東爲遼西、中遼郡,各置太守,越海收東萊諸縣,置營州刺史。

 

 자립하여 요동후·平州(遼陽이라 하나 지금의 平泉일 것)목이 되었으며, 한나라의 두 조묘를 세우고 승제(承制; 황제권한을 행사)하며 교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적전(籍田; 황제의 밭가는 의식)을 했으며, 난로(鸞路; 황제의 수레)를 탔고 모두(旄頭; 황제요 깃발 장식)와 우기(羽騎; 황제용 우림기)를 설치하였다.

 自立爲遼東侯、平州牧,立漢二祖廟,承制,郊祀天地,藉田,杜佑曰:藉,借也,謂借人力以理之,勸率天下,使務農也。《春秋傳》曰:郊而後耕,遂藉人力以成歲功,故謂之帝藉。臣瓚曰:親耕以躬親爲義,不得以假借爲稱。藉,謂蹈藉也。師古曰:瓚說是。《說文》,帝藉千畝。藉,秦昔翻。乘鸞路,設旄頭、羽騎。羽騎,羽林騎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