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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爲吉凶有命,禍福由人:길흉은 천명에 달렸고 화복은 사람으로 말미암는다./ 穀雨節末候戴勝降於桑楝花風2日(음4/9)甲辰

solpee 2020. 5. 1. 05:45

《魏紀4 明帝 太和 6 (壬子, 232)

 

 

 3. 황제가 아끼는 딸 조숙이 죽었는데, 황제는 이를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평원의공주라는 시호를 추가로 내리고, 낙양에 사당을 세우고, 남릉에 장사지냈으며 진후의 종손인 진황을 취하여 그와 합장하게 하고, 진황을 추가로 열후에 책봉하였으며, 그를 위하여 후계자를 두고 그 작위를 이어받게 하였다. 황제가 스스로 장례에 참여하려고 하였으며, 또한 허창에 가려고 하였다.

 3. 帝愛女淑卒,帝痛之甚,追諡平原懿公主,立廟洛陽,葬於南陵,取甄后從孫黃與之合葬,甄,之人翻。從,才用翻。追封黃爲列侯,爲之置後,襲爵。爲,于僞翻;下同。帝欲自臨送葬,又欲幸許。

 

 사공진군이 간하였다.

 "8세 이하의 상(殤: 미성년 사망. 16~19는 長殤, 12~15는 中殤, 8~11세 下殤, 7세 이하는 無服殤, 3개월 미만은 상으로 간주치 않았다)에는 예식을 다 갖추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아직 한 달이 못되었는데 성인에게 치르는 예의 절차로 장례를 치르고, 더욱이 상복을 입으며, 조정이 모두 소복을 입고, 아침저녁으로 가서 곡을 한다는 것은 옛날부터 아직 이와 비슷한 일도 없었습니다.

 司空陳羣諫曰:「八歲下殤,禮所不備,《記‧檀弓》曰:周人以殷人之棺椁葬長殤,以夏后氏之堲周葬中殤、下殤,以有虞氏之瓦棺葬無服之殤。鄭玄《註》云:略未成人。陸德明曰:十六至十九爲長殤,十二至十五爲中殤,八歲至十一爲下殤,七歲以下爲無服之殤,生未三月不爲殤。況未朞月,而以成人禮送之,加爲制服,舉朝素衣,朝夕哭臨,自古以來,未有此比。朝,直遙翻;下同。臨,力鴆翻。比,毗寐翻。

 

 다시 스스로 가서 능묘를 보고, 친히 가서 조재(祖載: 영구차에 실을 때 지내는 祖길제사)에 참여하려 하시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고 손해만 있는 일을 억누르십시오. 이것이 만국(온나라)에서 지극히 바라는 바입니다.

 而乃復自往視陵,復,扶又翻。親臨祖載。願陛下抑割無益有損之事,此萬國之至望也。

 

 또 듣건대 황제의 거가가 허창에 가려고 한다는데, 두 궁궐의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이 모두 동쪽에 가 있게 되는 것이니, 모든 조정의 대소 신료들이 놀라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어떤 자는 쇠퇴하는 운수를 피하려고 한다고 말하고, 어떤 자는 어떤 연고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又聞車駕欲幸許昌,二宮上下,皆悉居東,舉朝大小,莫不驚怪。或言欲以避衰,或言欲以便移殿舍,避衰,謂五行之氣,有王有衰,徙舍以避之也。今人謂之避災。便移殿舍,謂欲營繕宮室,故出幸許以便移殿舍也。或不知何故。

 

 신은 길흉은 천명에 달린 것이며, 화복은 사람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이사를 하여서 편안함을 구한다는 것 역시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반드시 이사를 하셔서 피하는 것이 마땅하다면, 금용성의 서궁과 맹진에 잇는 별궁을 잘 수선하신다면 모두 임시로 나누어서 머물 수는 있을 것인데 왜 온 궁궐에 있는 사람들을 들바닥에 드러내놓으려고 하십니까? 공사 간의 번거로움과 비용도 계산할 수 없습니다.

 臣以爲吉凶有命,禍福由人,移走求安,則亦無益。若必當移避,繕治金墉城西宮《水經註》:金墉城在洛陽城西北角。治,直之翻。及孟津別宮,皆可權時分止,何爲舉宮暴露野次,公私煩費,不可計量。量,音良。

 

 또한 훌륭하고 현명한 인사들은 오히려 자기의 집을 망령스럽게 이사하지 아니하여서 자기들의 고향인 향읍을 편안하게 하고 두려운 마음을 없애려고 합니다. 하물며 제왕은 만국의 주인인데 가고 머물고, 움직이고, 조용히 있는 것에서 어찌 가볍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且吉士賢人,猶不妄徙其家,以寧鄕邑,使無恐懼之心,子思居於衞,有齊寇。或曰:「寇至,盍去諸?」子思曰:「如伋去,君誰與守!」況乃帝王萬國之主,行止動靜,豈可輕脫哉!」

 

 소부와 양부도 말하였다.

 "문황제와 무선황후가 붕어하셨는데도 폐하께서는 모두 송장을 하지 않으셨던 것은 사직을 중하게 생각하고, 헤아릴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 대비한 것이었습니다. 어찌하여 품안에 품을 갓난아이를 송장한단 말입니까?"

 황제는 이 말들을 모두 듣지 아니하였다. 3월 7일에 동부지역으로 순행을 떠났다.

 少府楊阜曰:「文皇帝、武宣皇后崩,陛下皆不送葬,所以重社稷,備不虞也;何至孩抱之赤子而送葬也哉!」帝皆不聽。三月,癸酉,行東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