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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향후 유의의 사망과 쿠데타.雨水節 仲候 鴻雁北來 杏花風 初日(음2/1朔日00;32)

solpee 2020. 2. 24. 09:06

 

《韓紀43 孝安帝 延光 4 (乙丑, 125)

 

 13. 북향후(즉위한  황제 유의)의 병이 위독해지자 중상시 손정이 제음왕(폐위태자 유보)의 알자 장흥거(환관, 장흥은 성)에게 말하였다.

 "왕(유보)은 적통으로서 본래 덕을 잃어버린 바가 없었는데, 선황이 참소를 받아들여 마침내 폐위되어 쫓겨났습니다. 만약 북향후가 일어나지 못하고, 우리가 서로 함께 강경과 염현을 잘라버린다면 일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13. 北鄕侯病篤,中常侍孫程謂濟陰王謁者長興渠曰:賢曰:興,姓;渠,名。余按《百官志》,王國謁者比四百石,其下有禮樂長、衞士長、醫工長、永巷長,而無謁者長。竊意長興,姓也。「王以嫡統,本無失德;先帝用讒,遂至廢黜。若北鄕侯不起,相與共斷江京、閻顯,事無不成者。」斷,丁亂翻。

 

 장흥거가 그렇다고 생각하였다. 또 중황문인 남양 사람 왕강은 전에 태자부의 부사(문서와 자산관리)였는데, 장락궁의 태관승(주방관리)이었던 경조 사람 왕국 등과 함께 나란히 손정에게 붙어서 합세하였다. 강경이 염현에게 말하였다.

 "북향후의 병이 나아지지 않으니 나라의 후사는 마땅히 때맞추어 정해야 할 터인데 왜 서둘러 여러 왕자를 소집하여서 간택하지 않습니까?"

 渠然之。又中黃門南陽王康,先爲太子府史,太子府史,掌東宮府藏。及長樂太官丞京兆王國等長樂太官丞,掌太后食膳。樂,音洛。並附同於程。附同者,旣相黨附,又與之同謀。江京謂閻顯曰:「北鄕侯病不解,解,散也。言病纏於身而不散也。國嗣宜以時定,何不早徵諸王子,簡所置所!」簡,擇也。置,立也。

 

 염현이 그렇다고 여겼다. 27일에 북향후가 사망하였다. 염현이 태후에게 비밀로 하여 상사를 발표하지 말라고 말하고, 여러 왕자들을 소집하여 궁문을 잠그고 병사를 주둔시켜 스스로 지켰다.

 顯以爲然。辛亥,北鄕侯薨;顯白太后,祕不發喪,更徵諸王子,閉宮門,屯兵自守。

 

 11월 2일에 손정 등이 서쪽 종루 아래에 모여서 모의를 하고 모두 단의를 자르면서 맹서하였다.

 4일에 경사와 16개의 군과 봉국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날 밤 손정 등이 모두 숭덕전 위에 모여 그 기회에 장대문으로 들어갔다. 이떄 강경 등은 모두 금문 아래에 모여 앉아 있었는데, 손정과 양강이 함께 나아가서 강경 등의 목을 베었다.

 十一月,乙卯,孫程、王康、王國與中黃門黃龍、彭愷、孟叔、李建、王成、張賢、史汎、馬國、王道、李元、楊佗、陳予、趙封、李剛、魏猛、苗光等聚謀於西鍾下,皆截單衣爲誓。丁巳,京師及郡國十六地震。是夜,程等共會崇德殿上,崇德殿在南宮。《水經註》:魏文帝於漢崇德殿故處起太極殿,蓋南宮正殿也。因入章臺門。時江京、劉安及李閏、陳達等俱坐省門下,省門,卽禁門也。《前書》謂禁中爲省中。程與王康共就斬京、安、達。

 

 이윤은 오랫동안 권세를 쌓아서 궁성 내에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복종하였기 때문에 끌어주어 주모자로 삼고자 하여서 칼을 들어 이윤을 위협하며 말하였다.

 "지금 당장 제음왕을 세우고, 움직이지 마시오."

 이윤이 말하였다.

 "좋소."

 이에 이윤을 부축해 일으켜 서쪽 종루 아래에서 모두 제음왕을 맞이하여 황제에 즉위하게 하니 이때 나이 11세이다.

 以李閏權勢積爲省內所服,欲引爲主,因舉刃脅閏曰:「今當立濟陰王,毋得搖動!」閏曰:「諾。」於是扶閏起,俱於西鍾下迎濟陰王卽皇帝位,時年十一。

 

 상서령(비서)과 복야(부비서) 이하의 관리를 불러서 가마를 좇아 남궁으로 행차하게 하고, 손정 등은 남아서 금문을 굳게 지켜 안과 밖을 차단했다. 황제는 운대에 올라가 공경과 백관들을 소집하고 호분과 우림의 무사들에게 남궁과 북궁의 여러 문에 주둔하게 하였다.

 召尚書令、僕射以下從輦幸南宮,程等留守省門,遮扞內外。帝登雲臺,召公卿、百僚,使虎賁、羽林士屯南、北宮諸門。

 

 염현은 이때 금중(북궁)에 있었는데, 걱정스럽고 압박을 받아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소황문(초임 환관) 번등이 염현에게 권하기를, 태후의 조서를 가지고 월기교위(남월군지휘관) 풍시와 호분중랑장(호분지휘관) 염승을 불러서 군사를 거느리고 평삭문에 병사를 주둔시켜 손정 등을 방어하게 하였다. 염현이 풍시를 유인해 궁성으로 들어오게 하여 말하였다.

 閻顯時在禁中,憂迫不知所爲,顯蓋在北宮。小黃門樊登勸顯以太后詔召越騎校尉馮詩、虎賁中郎將閻崇將兵屯平朔門以禦程等。《考異》曰:《宦者傳》作「朔平門」。今從袁《紀》。余按《百官志》,朔平門,北宮北門也;恐當以《宦者傳》爲是。顯誘詩入省,謂曰:

 

 "제음왕이 선 것은 황태후의 의도가 아니며, 인새와 인수는 여기에 있다. 진실로 힘을 다해 공을 세운다면 후에 책봉될 수 있을 것이다."

 태후가 그에게 인을 주면서 말하였다.

 "능히 제음왕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만호후에 책봉될 것이며, 이윤을 잡으면 5천 호의 후에 봉할 것이다."

「濟陰王立,非皇太后意,璽綬在此。誘,音酉。璽,斯氏翻。綬,音受。此謂天子璽綬也。苟盡力效功,封侯可得。」太后使授之印曰:「能得濟陰王者,封萬戶侯;得李閏者,五千戶侯。」

 

 풍시 등은 모두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말하였다.

 "급히 부름을 받아서 거느린 무리들이 적습니다."

 염현은 번등과 함께 좌액문 밖에서 관리와 병사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풍시는 그 기회에 번등을 때려죽이고 군영으로 돌아가 굳게 지켰다.

 詩等皆許諾,辭以「卒被召,所將衆少。」卒,讀曰猝。顯使與登迎吏士於左掖門外,詩因格殺登,歸營屯守。

 

 염현의 동생인 위위 염경은 서둘러 궁성에서 외부로 돌아와 병사를 모아서 성덕문에 이르렀다. 손정은 여러 상서들을 불러 모아 염경을 잡아들이라고 전하였다. 상서 곽진이 마침 병으로 누워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즉시 숙직하던 우림군을 거느리고 남지거문으로 나갔다가 염경을 만나자, 염경의 관리와 군사들이 번득이는 칼을 뽑아들고 큰소리로 외치며 말했다.

 顯弟衞尉景遽從省中還外府,外府,衞尉府也。收兵至盛德門。孫程傳召諸尚書使收景。傳召,傳詔召之也。尚書郭鎭時臥病,聞之,卽率直宿羽林出南止車門,逢景從吏士拔白刃呼曰:

 

 "군사에 관한 일에 간섭하지 마라."

 곽진은 바로 수레에서 내려 지절을 가지고 조서를 보였다. 염경이 말했다.

 "무슨 조서냐?"

 기회를 틈타 곽진을 찍었으나 맞지 않았다. 곽진이 검을 뽑아 염경을 공격하여 수레에서 떨어뜨리자 좌우에서 창이 그의 가슴을 겨누어 마침내 사로잡아 정위옥으로 호송하여 그날 밤 죽였다.

「無干兵!」鎭卽下車持節詔之,景曰:「何等詔!」因斫鎭,不中。呼,火故翻。中,竹仲翻。鎭引劍擊景墮車,左右以戟叉其胸,遂禽之,送廷尉獄,卽夜死。

 

 5일에 사자를 파견하여 궁성으로 들어가 인수와 인새를 탈취하고, 황제는 이에 가덕전으로 행차하였다. 시어사를 파견하여 지절을 가지고 염현과 그의 동생인 성문교위 염요, 집금오 염안을 체포하여 나란히 하옥시켜 주살하고, 가족들은 모두 비경(월남)으로 귀양보냈다. 태후를 이궁(궁 밖 별궁)으로 옮겼다. 6일에 성문을 열고 주둔병을 해산시켰으며, 9일에 사예교위(수방사령관)에게 조서를 내렸다.

 戊午,遣使者入省,奪得璽綬,帝乃幸嘉德殿,按《帝紀》,嘉德殿在南宮。遣侍御史持節收閻顯及其弟城門校尉耀、執金吾晏,並下獄,誅;下,遐稼翻。家屬皆徙比景。遷太后於離宮。己未,開門,罷屯兵。壬戌,詔司隸校尉:

 

 "오직 염현, 강경 같은 근친들만 마땅히 사형에 처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관대하게 용서하도록 힘쓰라."

 손정 등을 책봉하여 모두 열후로 삼았다. 손정의 식읍은 만 호이고, 왕강과 왕국의 식읍은 9천 호이고, 황용의 식읍은 5천 호이고, 팽개 등은 4천2백 호이고, 왕성 등은 4천 호이고, 위맹은 2천 호이고, 묘광은 1천 호였는데, 이들이 19후이며, 그리고 거마, 금은, 전백을 차별 있게 덧붙여 하사하였지만, 이윤은 사전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후로 봉하지 않았다.

「惟閻顯、江京近親,當伏辜誅,其餘務崇寬貸。」封孫程等皆爲列侯:程食邑萬戶,王康、王國食九千戶,黃龍食五千戶,彭愷、孟叔、李建食四千二百戶,王成、張賢、史汎、馬國、王道、李元、楊佗、陳予、趙封、李剛食四千戶,魏猛食二千戶,苗光食千戶:是爲十九侯,孫程爲浮陽侯,王康爲華容侯,王國爲酈侯,黃龍爲湘南侯,彭愷爲西平昌侯,孟宿爲中廬侯,李建爲復陽侯,王成爲廣宗侯,張賢爲祝阿侯,史汎爲臨沮侯,馬國爲廣平侯,王道爲范縣侯,李元爲褒信侯,楊佗爲山都侯,陳予爲下巂侯,趙封爲析縣侯,李剛爲枝江侯,魏猛爲夷陵侯,苗光爲東阿侯。加賜車馬、金銀、錢帛各有差;李閏以先不豫謀,故不封。

 ..........................................하략.........................................

  擢孫程爲騎都尉。初,程等入章臺門,苗光獨不入。詔書錄功臣,令王康疏名,康詐疏光入章臺門。光未受符策,漢初封王侯皆剖符;至武帝封齊、燕、廣陵三王,始作策。心不自安,詣黃門令自告。黃門令,主省中諸宦者,故詣之自告。

  

 17. 의랑(궁정의론담당) 진선이 말하였다.

 "염태후와 황제는 모자간의 은혜를 베푼 일이 없으니 마땅히 별관으로 옮겨서 조현하는 일을 끊어야 합니다."

여러 신하들 중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마땅하다고 여겼다. 사도부 연리인 여남 사람 주거가 이합(사도)에게 말하였다.

 17. 議郎陳禪以爲:「閻太后與帝無母子恩,宜徙別館,絕朝見,」朝,直遙翻。見,賢遍翻。羣臣議者咸以爲宜。司徒掾汝南周舉謂李郃曰:

 

 "옛날에 고수는 항상 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순은 더욱 삼가면서 잘 섬겼습니다. 정나라의 무강은 장공을 죽이려고 모의하였으나 장공은 황천에서나 만날 것을 맹세하였으며, 진시황은 어머니의 행실이 잘못된 것을 원망하여 오랫동안 단절하였으나 후에 영고숙과 모초의 말에 감동되어 다시 아들로서의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책에서는 이를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昔瞽瞍常欲殺舜,舜事之逾謹;瞽瞍使舜塗廩,而自下焚廩;使浚井,旣入,從而揜之。其欲殺者屢矣,而舜事瞽瞍彌謹。《書》曰:祗載見瞽瞍,夔夔齋栗。掾,俞絹翻。郃,曷閣翻,又古合翻。鄭武姜謀殺莊公,莊公誓之黃泉,秦始皇怨母失行,行,下孟翻。久而隔絕,後感潁考叔、茅蕉【章:甲十六行本「蕉」作「焦」;乙十一行本同。】之言,復脩子道,書傳美之。鄭武姜愛少子共叔段,謀襲莊公,公寘姜氏於城潁而誓之曰:「不及黃泉,無相見也!」潁考叔以舍肉遺母感之,遂爲母子如初。秦始皇事見六卷九年。

 

 지금 여러 염씨를 막 주살하였고, 태후는 유폐되어 이궁에 있는데 만일 슬퍼하며 근심하다가 병이 나서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게 되면, 주상이 장차 어떻게 천하를 호령하시겠습니까? 만일 진선의 의견을 따른다면 후세에 밝으신 그 공에게 허물을 돌릴 것입니다.

 今諸閻新誅,太后幽在離宮,若悲愁生疾,一旦不虞,主上將何以令於天下!如從禪議,後世歸咎明公。

 

 마땅히 비밀리에 조정에 표문을 올려 태후를 모시게 하고, 여러 신하들을 인솔하고 예전과 같이 조근하게 하신다면 하늘의 마음을 만족시키고 백성의 바람에 화답하게 됩니다."

 이합은 즉시 상소를 올려 이것을 진술하였다.

 宜密表朝廷,令奉太后,率羣臣朝覲如舊,以厭天心,以答人望!」厭,如字,滿也。郃卽上疏陳之。

孝順皇帝上諱保,安帝之子也。《諡法》:慈和徧服曰順。伏侯《古今註》曰:「保」之字曰「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