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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祥之孝.

solpee 2020. 2. 11. 17:47

 

《魏 高貴鄕公 甘露 元年 (丙子, 256)

 

 

 11.사공 정충을사도로 삼고, 좌복야 노육을 사공으로 삼았다. 노육이 이 자리를 표기장군 왕창·광록대부 왕관·혹은 사예교위인 낭야 사람 왕상에게 양보하겠다고 굳게 주장하였으나 조서를 내려서 허락하지 않았다.

 11. 以司空鄭沖爲司徒,左僕射盧毓爲司空。《晉志》曰:尚書僕射,漢本置一人;至漢獻帝建安四年,以執金吾榮郃爲尚書左僕射,僕射分置左右蓋自此始。經魏至晉,迄于江左,省置無常,置二則爲左右僕射,或不兩置,但曰尚書僕射,令闕則左爲省主,若左右並闕,則置尚書僕射以主省事。毓,余六翻。毓固讓驃騎將軍王昶、光祿大夫王觀、司隸校尉琅邪王祥,詔不許。

 

 왕상의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계모 주씨가 그를 무도하게 대우하였으나 왕상은 더욱더 공손하고 삼갔다. 주씨의 아들 왕람은 나이가 몇 살 안 되어서부터 매번 왕상이 회초리 맞는 것을 보았는데, 번번이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를 잡았다. 또 어머니가 이치에 맞지 않게 왕상을 시키면 왕람은 바로 왕상과 함께 갔다.

 祥性至孝,繼母朱氏遇之無道,祥愈恭謹。朱氏子覽,年數歲,每見祥被楚撻,楚,荊也;撻,擊也。被,皮義翻。輒涕泣抱持母;母以非理使祥,覽輒與祥俱往。

 

 자라서 처를 얻자, 계모가 왕상의 처를 학대하며 부리니 왕람의 처도 역시 쫓아가서 일을 함께 하자 어머니는 이를 걱정하다가 이 때문에 조금 중지하였다.

 왕상이 당시 점차 명예를 얻게 되니 어머니가 몹시 이를 질투하여 몰래 왕상에게 독주를 마시도록 하였다. 왈람이 이를 알고 빨리 가서 그 술잔을 잡았고 왕상도 다투며 주지를 아니하자 어머니가 급하게 빼앗아서 엎어버렸다. 이 이후로부터 어머니가 왕상에게 밥을 주면 왕람이 바로 먼저 맛을 보니, 어머니는 왕람이 죽게 될까 두려워서 마침내 중지하였다.

 及長,娶妻,長,知兩翻。母虐使祥妻,覽妻亦趨而共之,母患之,爲之少止。爲,于僞翻。祥漸有時譽,母深疾之,密使酖祥。覽知之,徑起取酒,祥爭而不與,母遽奪反之。《漢書‧齊悼惠王傳》:奪反孝惠卮。師古曰:反,音幡。自後,母賜祥饌,饌,雛戀翻,又雛皖翻。覽輒先嘗,母懼覽致斃,遂止。

 

 동한 말기에 혼란을 만나자 왕상은 30여 년 동안 은거하면서 주군에서 부르는 명령이 있어도 응하지 아니하다가 어머니가 죽자 지나치게 애통해하다가 몸이 상하고 초췌하여져서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났다.

 漢末遭亂,祥隱居三十餘年,不應州郡之命,母終,毀瘁,瘁,秦醉翻,病勞也。杖而後起。

 

 서주 자사ㅓ 여건이 빼내어 별가로 삼고 주의 일들을 맡기니 그 주의 경내는 맑고 고요하고 정치적인 교화가 크게 시행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노래하였다.

 "해기(서주)가 편안한 것은 실로 왕상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졌도다. 이 방국이 텅 비지 않은 것은 별가의 공로로다.

 徐州刺史呂虔檄爲別駕,委以州事,州界清靜,政化大行,時人歌之曰:「海沂之康,實賴王祥;徐州之地,東際海,西北距泗、沂,故曰海沂。邦國一空,別駕之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