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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後出師表

solpee 2020. 2. 4. 11:28

 

《魏紀2 明 太和 2 (戊申, 228)

 

 

 11. 한의 제갈량이 조휴가 패전하였고, 위의 병사들이 동쪽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관중 지역이 허약할 것으로 보고 군사를 내서 위를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의심하였다. 제갈량이 한의 주군에게 말씀을 올렸다.

 11. 漢諸葛亮聞曹休敗,魏兵東下,關中虛弱,欲出兵擊魏,羣臣多以爲疑。因祁山之敗,疑魏不可伐。亮上言於漢主曰:

 

 "선황께서는 우리 한나라와 도적이 양립하지 못하며, 왕업이 한쪽에 치우쳐 있고서는 안심하지 못한다는 것을 깊이 염려하셨으니, 그러므로 신에게 도적을 토벌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먼저 선황의 밝은 판단으로 신의 재주를 헤아려 보시고 진실로 당연히 신이 도적을 토벌하지 못하면 왕업 또한 망하는 것이니 오직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과 그들을 토벌하는 것 중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

「先帝深慮以漢、賊不兩立,王業不偏安,故託臣以討賊。以先帝之明,量臣之才,固當知臣伐賊,才弱敵強;然不伐賊,王業亦亡,惟坐而待亡,孰與伐之!

 

 이런 연고로 신에게 의탁하셨고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이 명령을 받은 날, 잠을 자도 자리가 편안하지 아니하였고 밥을 먹어도 달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북쪽으로 정벌할 것만을 생각하였지만, 먼저 마땅히 남쪽으로 들어가야 했으니, 그러므로 5월에 여수를 건너서 불모지로 깊이 들어갔었던 것입니다.

 是故託臣而弗疑也。臣受命之日,寢不安席,食不甘味,思惟北征,宜先入南,故五月渡瀘,深入不毛。瀘,魯都翻。

 

 이는 신이 스스로를 아끼지 아니하여서가 아니라 왕업이 촉도에 치우쳐 있는 상태에서는 온전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험함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황의 유지를 받들고자 하였는데, 논의하는 자들은 잘못된 계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臣非不自惜也,顧王業不可偏全於蜀都,故冒危難以奉先帝之遺意也,難,乃旦翻;下同。而議者以爲非計。

 

 이제 도적들은 서쪽 지역에서 마침 피로하여졌으며, 또 동쪽에서도 힘쓰게 되었고, 병법을 보면 피로한 틈을 타라고 하였으니, 이때가 나아가야 할 시기입니다. 삼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겠습니다.

 今賊適疲於西,又務於東,疲於西,謂郿縣、祁山之師;務於東,謂江陵東關、石亭之師也。兵法乘勞,此進趨之時也。謹陳其事如左:

 

 '고조께서는 밝기가 해와 달을 아우를 정도였으며, 꾀를 내는 신하들의 지혜는 연못처럼 깊으나 위험을 겪고 상처를 입었지만, 위엄을 거친 다음에 편안하게 됩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한 고조에 미치지 못하며, 꾀를 내는 신하도 장량이나 진평만 못하지만 장구한 계획을 세워서 승리를 얻고 앉아서 천하를 평정하려고 하니, 이것은 신이 아직 게으를 수 없는 첫 번째 것입니다.

 高帝明並日月,謀臣淵深,然涉險被創,被,皮義翻。創,初良翻。危然後安。今陛下未及高帝,謀臣不如良、平,而欲以長計取勝,坐定天下,此臣之未解一也。解,讀曰懈,言未敢懈怠也;後皆同。

 

 유요와 왕랑은 각기 주와 군을 점거하고는 안전을 논하고 계책을 말하면서 움직엿다 하면 성인들의 말씀을 인용하였지만 많은 의심이 뱃속에 가득하고, 수많은 어려운 것들이 가슴속에 꽉 차서 금년에 싸우지 아니하면 다음 해에는 정벌을 떠나지 아니하니 손책이 앉아서 크게 되게 하였고, 드디어 강동 지역을 아우르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이 아직도 게으를 수 없는 두 번째 것입니다.

 劉繇、王朗各據州郡,論安言計,動引聖人,羣疑滿腹,衆難塞胸,今歲不戰,明年不征,使孫策坐大,遂幷江東。此臣之未解二也。難,乃旦翻。坐大,言坐致強大也。策破劉繇事見六十一卷漢獻帝興平二年,破王朗事見六十二卷建安元年。

 

 조조의 지략고하 계책은 보통사람보다 매우 뛰어나고, 그의 용병술은 손무나 오기를 방불케 하지만 그러나 남양에서 곤욕을 치렀고, 오소에서 위험한 일을 만났고, 기련에서 위태롭게 되었고, 여양에서 핍박을 당하였고, 백산에서 거의 패배하게 되었으며, 동관에서는 거의 죽게 되었었는데 그런 다음에 일시적인 안정을 이룩하였을 뿐입니다. 하물며 신이 재주도 미약한데위험한 일을 겪지 아니하고 이를 안정시키기를 바라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게으를 수 없는 세 번째 것입니다.

 曹操智計殊絕於人,其用兵也,髣髴孫、吳;以操之善用兵,亮謂之髣髴孫、吳,孫、吳固未易才也。然困於南陽,險於烏巢,危於祁連,偪於黎陽,幾敗伯山,殆死潼關,然後僞定一時耳;困於南陽,謂攻穰爲張繡所敗也。險於烏巢,謂攻袁紹將淳于瓊時也。偪於黎陽,謂攻袁譚兄弟時也。幾敗伯山,謂與烏桓戰於白狼山時也。殆死潼關,謂與馬超戰時也。危於祁連,當考;或曰圍袁尚於祁山時也。僞定者,言雖定一時之功,而有心於篡漢,故曰僞。幾,居希翻。況臣才弱,而欲以不危定之,此臣之未解三也。

 

 조조는 창패를 다섯 번이나 공격하였다가도 패주하였고, 소호를 네 번이나 넘어가려 하다가도 성공하지를 못하였고, 이복을 임용하였다가 이복이 그를 도모하였으며, 하후연에게 위탁하였다가 하후연이 패망하였습니다. 선황께서는 매번 조조 능력이 았다고 칭찬하셨는데도 오히려 이러한 실수가 있었는데, 하물며 신이 한 마리의 어리석은 말 같은데 어찌 능히 반드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게으를 수 없는 네 번째의 것입니다.

 曹操五攻昌霸不下,四越巢湖不成,任用李服而李服圖之,委夏侯而夏侯敗亡;昌霸,昌豨也。操累攻不下,後命于禁擊斬之。四越巢湖不成,謂攻孫權也。李服,蓋王服也,與董承謀殺操被誅。夏侯,謂夏侯淵守漢中爲先主所敗也。先帝每稱操爲能,猶有此失,況臣駑下,何能必勝!此臣之未解四也。駑下者,自謙以馬爲喻,若駑駘下乘也。

 

 신이 한중에 도착한 이후 1년을 지냈을 뿐이었는데, 그러나 조운, 양군, 마옥, 염지, 정립, 백수, 유합, 등동 등과 곡장과 둔장 70여 명과 돌장, 무전, 종수병, 청강병, 산기병, 무기병 1천여 명을 잃었으니, 모두 10년 동안에 사방에서 규합한 정예 병사들인데, 어느 한 주에서 모두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수 년이 지난다면 2/3가 소모될 것이니, 마땅히 무엇으로 적을 도모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게으를 수 없는 다섯 번째의 것입니다.

 自臣到漢中,中間期年耳,然喪趙雲、陽羣、馬玉、閻芝、丁立、白壽、劉郃、鄧銅等及曲長、屯將七十餘人,喪,息浪翻。郃,古合翻,又曷閤翻。曲長,一曲之長也。軍行有部,部下有曲,曲各有長。長,丁丈翻。屯將,將屯者也。將,卽亮翻。突將、無前、將,卽亮翻。賨叟、青羌、散騎、武騎一千餘人,蜀兵謂之叟,賨叟,巴賨之兵也。青羌,亦羌之一種。散騎、武騎,當時騎兵分部之名。賨,藏宗翻。騎,奇寄翻。皆數十年之內,糾合四方之精銳,非一州之所有;若復數年,則損三分之二,復,扶又翻。當何以圖敵!此臣之未解五也。言不戰而將士耗損已如此也。

 

 지금 백성들은 궁핍하고 병사들은 피곤하지만 일은 쉴 수가 없으며, 이일을 쉴 수가 없다면 가만히 있거나 출정하거나 수고로움과 비용은 똑같으며, 빈틈을 타서 도모하는데 이르지 아니하고 한 주의 땅만 가지고 도적과 오래 지탱하게 되니 이것이 신이 게으를 수 없는 여섯 번째 것입니다.

 今民窮兵疲,而事不可息,事不可息,則住與行,勞費正等,而不及虛圖之,亮意欲及魏與吳連兵未解,乘虛而圖之也。欲以一州之地與賊支久,此臣之未解六也。支,持也;支久,猶言持久也。

 

 무릇 평가하기 어려운 것이 일이니 옛날에 먼저 선황께서 초나라에 패하셨는데, 그 당시 조조는 박수를 치면서 천하는 이미 평정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선황께서는 동쪽의 오와 얼과 연합하여 서쪽의 파와 촉을 빼앗고, 군사를 들어서 북쪽을 정복하여, 하후연의 머리를 참수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조가 계책을 잘못 세운 것이며, 우리 한나라의 대사업이 곧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夫難平者事也,昔先帝敗軍於楚,當此時,曹操拊手,謂天下已定。然後先帝東連吳、越,事見六十五卷漢獻帝建安十三年。拊手,乘快之意發見於外者也。西取巴、蜀,事見六十七卷建安十九年。舉兵北征,夏侯授首,事見六十八卷建安二十四年。此操之失計而漢事將成也。

 

 그런 다음에 오가 다시 맹약을 위반하니 관우는 패하여 죽었고, 자귀에서 차질을 빚자 조비가 칭제하였습니다. 모든 일이 이와 같으니 다가올 일을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신이 무릎을 꿇고 온 힘을 다하다가 죽은 다음에야 그칠 것이고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이로울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신의 견해로 능히 미리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然後吳更違盟,關羽毀敗,事見六十八卷建安二十四年。此兩然後之然,轉語之辭,與他文然後之義不同。秭歸蹉跌,曹丕稱帝。事見六十九卷黃初元年、三年。凡事如是,難可逆見。臣鞠躬盡力,死而後已,至於成敗利鈍,非臣之明所能逆覩也。」自祁山之敗,亮益知魏人情僞,故其所言如此。

 12월에 제갈량이 병사를 이끌고 산관을 나가서 진창을 포위하였는데, 진창에서 이미 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갈량은 이길 수 없었다. 

 十二月,亮引兵出散關,圍陳倉,陳倉已有備,亮不能克。曹眞使郝昭先守,故亮不能克。此下申言昭守亮攻,客主相持之事,《通鑑》書法類如此。

............................하략...............................

 亮使郝昭鄕人靳詳於城外遙說昭,靳,居焮翻。說,輸芮翻;下同。昭於樓上應之曰:「魏家科法,卿所練也;科,條也。練,習也。我之爲人,卿所知也。我受國恩多而門戶重,卿無可言者,但有必死耳。卿還謝諸葛,便可攻也。」詳以昭語告亮,亮又使詳重說昭,重,直用翻。言「人兵不敵,空【章:甲十六行本「空」上有「無爲」二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自破滅。」昭謂詳曰:「前言已定矣,我識卿耳,箭不識也。」詳乃去。亮自以有衆數萬,而昭兵纔千餘人,又度東救未能便到,魏兵救陳倉者自東來,故曰東救。度,徒洛翻。乃進兵攻昭,起雲梯衝車以臨城,昭於是以火箭逆射其梯,射,而亦翻;下同。梯然,梯上人皆燒死;昭又以繩連石磨至其衝車,磨,莫臥翻,石磑也。衝車折。折,而設翻。亮乃更爲井闌百尺以射城中,以木交構若井闌狀。以土丸塡壍,壍,七豔翻。欲直攀城,昭又於內築重牆。重,直用翻。亮又爲地突,地突,地道也。欲踊出於城裏,昭又於城內穿地橫截之。晝夜相攻拒二十餘日。

曹眞遣將軍費耀等救之。帝召張郃于方城,時郃將兵伐吳,屯于方城。《續漢志》曰:葉縣南有長山曰方城,屈完所謂「楚國方城以爲城」者,卽此也。使擊亮。帝自幸河南城,置酒送郃,河南城在洛陽城西。問郃曰:「遲將軍到,遲,直利翻,待也。亮得無已得陳倉乎!」郃知亮深入無穀,屈指計曰:「比臣到,亮已走矣。」比,必寐翻。郃晨夜進道未至,亮糧盡,引去;將軍王雙追之,亮擊斬雙。詔賜昭爵關內侯。攻者不足,守者有餘。尚論其才,則全城卻敵者,其才非優於攻者也,客主之勢異耳。故曰用兵之術,攻城最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