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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陵과 司馬遷

solpee 2019. 12. 2. 17:38

 

紀13 武帝 天漢 2 (壬午, 前99

 

 

 2. 애초에, 이광에게는 손자 이릉이 있었는데 시중이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고, 밑에 있는 병사들을 아꼈다. 황제는 이광의 기풍이 있다고 여겨 기도위로 벼슬을 주고, 단양과 초인 5천 명을 거느리게 하고서 주천과 장액에서 활 쏘는 것을 가르치면서 흉노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릉이 머리를 조아리며 스스로 청하여 말하였다.

 2............上略.....初,李廣有孫陵,爲侍中,善騎射,愛人下士。帝以爲有廣之風,拜騎都尉,《續漢志》:騎都尉比二千石。杜佑曰:奉車都尉、駙馬都尉、騎都尉並漢武帝置;東晉省奉車、騎都尉,惟留駙馬,尚主者爲之。使將丹陽、楚人五千人,丹陽,秦鄣郡地,元封二年更名丹陽,屬揚州;唐宣、歙、池、昇、睦州之地。敎射酒泉、張掖以備胡。及貳師擊匈奴,上詔陵,欲使爲貳師將輜重。將,卽亮翻;下同。重,直用翻。陵叩頭自請曰:

 

 "신이 거느리고 있는 변방에 주둔하는 병사들은 모두 형과 초의 용사들로 기이한 재주를 가진 검객이어서 힘으로는 호랑이를 잡으며, 활을 쏘면 명중시키니, 바라건데 스스로 한 부대를 받을 수 있다면 나우산의 남쪽에 이르러서 선우의 병사를 나뉘게 하여 그들이 전적으로 이사장군을 향하지 않도록 하게하여 주십시오."

「臣所將屯邊者,皆荊楚勇士奇材劍客也,力扼虎,扼,捉持也。射命中,師古曰:所指名處卽中之也。中,竹仲翻。願得自當一隊,到蘭于【章:十四行本「于」作「干」;乙十一行本同;退齋校同。】山南以分單于兵,毋令專鄕貳師軍。」鄕,讀曰嚮。〉

.......................중략............................

 

 이릉이 패한 곳은 요새에서 100여 리 떨어진 곳이었는데, 변경의 요새에서 이를 보고 하였다. 무제는 이릉이 전사하기를 희망하였는데, 후에 이릉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황상이 화내는 것이 심하였고, 진보락에게 책임을 물으니, 진보락이 자살하였다.

 陵敗處去塞百餘里,《史記正義》曰:遮虜障北百八十里直居延西北,長老相傳,云是李陵戰處。邊塞以聞。上欲陵死戰;後聞陵降,上怒甚,責問陳步樂,步樂自殺。

 

 여러 신하들은 하나같이 이릉에게 죄를 주자 황상이 태사령 사마천에게 물으니, 사마천은 잔뜩 말하였다.

 "이릉은 부모를 섬기는 것이 효성스러웠고 병사들과는 신의를 지켰으며, 항상 분발하며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서 국가의 위급함에 종사하였는데, 그가 평소에 마음 속에 쌓아 놓았던 것이니, 국가의 선비라는 기풍을 갖고 있었습니다.

 羣臣皆罪陵,上以問太史令司馬遷,遷盛言:「陵事親孝,與士信,常奮不顧身以徇國家之急,師古曰:徇,營也;一曰:從也。其素所畜積也,言其胸中素所畜積者如上所言也。有國士之風。

 

 이번 거사에서 한 번 불행하였으나, 자기의 몸을 온전히 하고 처자를 보존한 신하들이 따라서 그 단점을 부풀려서 매개하니, 진실로 슬픈 일입니다. 또 이릉은 보졸 5천이 못되는 것을 들어가지고 용마들의 땅을 깊이 짓밟아서 수만 명의 군사를 억눌렀으며, 오랑캐는 죽은 자를 구하고 다친 자를 부축하기에 겨를이 없었고, 활을 쏠 수 있는 백성을 다 동원하여 함께 그를 에워싸고 공격하였는데도 이리저리 싸우면서 1천 리를 돌아오다가, 화살도 다하고 길이 막혔으나 병사들은 빈활만 당기다가 번득이는 칼날을 무릅쓰고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적과 죽기로 싸우고 사람의 죽을 힘을 다하였으니,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 하여도 지나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今舉事一不幸,全軀保妻子之臣隨而媒糵其短,服虔曰:媒,音欺,謂詆欺也。孟康曰:媒,酒敎;糵,麴也;謂釀成其罪也。師古曰:孟說是也。齊人名麴餅曰媒。賈公彥曰:齊人名麴餅爲媒者,麴麩和合得成酒醴,名之爲媒。誠可痛也!且陵提步卒不滿五千,深蹂戎馬之地,師古曰:蹂,人九翻,踐也。抑數萬之師,虜救死扶傷不暇,悉舉引弓之民共攻圍之,轉鬬千里,矢盡道窮,士張空弮,文穎曰:弮,弓弩弮也。師古曰:音去權翻,又音眷。冒白刃,北首爭死敵,師古曰:冒,犯也。北首,北嚮也。冒,音莫北翻。首,音式救翻。得人之死力,雖古名將不過也。

 

 몸은 비록 포위되어 패하였지만, 그러나 그가 꺾어서 패배시킨 일은 족히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가 죽지 않은 것은 마땅히 한에 보답을 하려고 한 것일 것입니다."

 황상은 사마천이 무망하여 이사를 저해하고 이릉을 위해 유세하였다 하여 사마천을 부형(腐刑:宮刑:부랄까는 형)에 처하도록 내려 보냈다.

 身雖陷敗,然其所摧敗亦足暴於天下。師古曰:所摧敗,敗匈奴之兵也。暴者,猶章也。摧敗,補賣翻。彼之不死,宜欲得當以報漢也。」師古曰:言欲立功以當罪也。上以遷爲誣罔,欲沮貳師,爲陵游說,下遷腐刑。沮,在呂翻。爲,于僞翻。說,式芮翻。下,遐嫁翻。如淳曰:腐,宮刑也。丈夫割勢不復能生子,如腐木不生實。腐,音附。

 

 오래 지나서 무제는 이릉을 구해내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서 말하였다.

 "이릉이 요새를 출발할 때에 마침내 강노도위에게 조서를 내려서 영접하게 하였어야 했는데, 미리 그에게 조서를 내린 것이 주저앉아서 늙은 장수로 하여금 간사한 속임수를 만들 수 있었구나!"

 마침내 사자를 파견하여 이릉의 남은 병사들 가운데 벗어날 수 있었던 병사들에게 상을 내려주고 위로하였다.

 久之,上悔陵無救,曰:「陵當發出塞,乃詔強弩都尉令迎軍;坐預詔之,得令老將生姦詐。」孟康曰:坐預詔博德迎陵,博德老將,出塞不至,令陵見沒也。余謂此說非也。帝意旣悔,追思前事,以爲當陵發出塞之時,方可詔博德繼其後以迎陵軍,乃於陵未行之時預詔之,使博德羞爲陵後距,得生姦詐上奏,而遂令博德別出西河,使陵軍無救也。乃遣使勞賜陵餘軍得脫者。勞,力到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