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欲居九夷/구이에 살고 싶다. 小雪中候天氣上騰地氣下降末日(陰11/5)

solpee 2019. 12. 1. 05:20

 

紀13 武帝 元封 3 (癸酉, 前108

 

 

 4.한의 군사가 조선의 경계로 들어가니 조선왕 위우거가 군사를 발동하여 험한 곳에서 막았다. 누선장군이 제의 병졸 7천 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험에 이르렀다. 위우거는 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엿보고서 바로 성을 나와 누선장군을 공격하였고, 누선의 군대는 패하여 흩어져서 산속으로 들어가서 10여 일이 지나자 흩어져 있던 병졸들을 조금씩 찾아 다시 모았다.

 4. 漢兵入朝鮮境,朝鮮王右渠發兵距險。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右渠城守,窺知樓船軍少,守,式又翻。少,詩沼翻。卽出城擊樓船;樓船軍敗散,遁山中十餘日,稍求退【嚴:「退」改「收」。】散卒,復聚。

 

 좌장군이 조선의 패수 서쪽의 군대를 공격하였으나 아직 깨뜨릴 수 없었다. 무제는 두 장군으로는 아직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 하여 마침내 위산으로 하여금 군사적인 위협을 통하여 위우거에게 유시하게 하였다. 위우거는 사자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여 말하였다.

 左將軍擊朝鮮[氵具]【章:十四行本「[氵具]」作「浿」;孔本同;張校同;退齋校同。下三見均同。】水西軍,未能破。天子爲兩將未有利,爲,于僞翻。乃使衞山因兵威往諭右渠。右渠見使者,頓首謝:

 

 항복하기를 원하였지만 두 장군이 속이고 신을 죽일까 두려워는데, 이제 신절을 보았으니 청컨데 다시 항복하고자 합니다."

 태자를 파견하여 들어가 사죄하게 하고, 말 5천 필을 헌납하고 군량을 공급하였는데, 사람의 무리 1만 여가 무기를 잡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고 있었다.

「願降,恐兩將詐殺臣;今見信節,請復降。」復,扶又翻。降,戶江翻;下同。遣太子入謝,獻馬五千匹,及饋軍糧;人衆萬餘,持兵方渡[氵具]水。

 

 사자와 좌장군은 그들이 변할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말하였다.

 "이미 항복하였으니, 마땅히 사람들로 하여금 무기를 갖지 말게 하시오."

 태자도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그를 속이고 죽일 것이라 의심하여 드디어 패수를 건너지 아니하고 다시 이끌고 돌아갔다. 위산이 돌아가 무제에게 보고하니, 무제는 위산을 죽였다.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謂太子:「已服降,宜令人毋持兵。」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遂不渡[氵具]水,復引歸。山還報天子,天子誅山。

 

 좌장군이 패수에 있는 군사를 격파하고 마침내 앞으로 나아가 성 아래에 이르러서 그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 또한 가서 만나서 성의 남쪽에 있었다. 위우거가 드디어 굳게 성을 지키니 몇 달이 되어도 아직 점령할 수 없었다.

 左將軍破[氵具]水上軍,乃前至城下,圍其西北。樓船亦往會,居城南。右渠遂堅守城,數月未能下。

 

 좌장군이 거느리는 연과 대의 병졸들은 대부분 강하고 사나웠지만, 누선장군이 거느리는 제의 병졸들은 이미 일찍이 패망하여 곤욕을 치러서 병졸들은 모두 두려워하였고 장교들도 마음으로 부끄러웠으며, 그들이 위우거를 포위하면서 항상 화의할 부절을 갖고 있었다.

 左將軍所將燕、代卒多勁悍,樓船將齊卒已嘗敗亡困辱,卒皆恐,將心慚,將,卽亮翻。悍,下罕翻,又侯旰翻。其圍右渠,常持和節。

 

 좌장군이 급히 이들을 공격하니, 조선의 대신들은 마침내 몰래 사람을 시켜서 사사로이 누선에게 항복하기로 약속하고, 말이 오갔지만 오히려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좌장군은 자주 누선장군과 전투를 하기로 기약하였는데, 누선장군은 약속을 지키려고 함께 하지 아니하였다.

 左將軍急擊之,朝鮮大臣乃陰間使人私約降樓船,陰,暗密也。間,空隙也。言暗密遣使投空隙而出,與樓船約降。間,古莧翻。往來言尚未肯決。左將軍數與樓船期戰,數,所角翻;下同。樓船欲就其約,不會。

 

 좌장군도 역시 몰래 사람을 시켜서 틈을 찾아서 조선에게 항복하라고 하였으나 조선은 하려 하지 않고, 마음으로 누선장군에게 귀부하니, 이러한 연고로 두 장수가 서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좌장군은 마음 속으로 누선장군이 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이번에는 조선과 사사로이 잘 지내고 또 항복하지 않으니, 그가 반란을 계획을 갖고 있으면서 아직 감히 발동하지 않는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左將軍亦使人求間隙降下朝鮮,朝鮮不肯,心附樓船,以故兩將不相能。左將軍心意樓船前有失軍罪,意,疑也,億度也;料也。今與朝鮮私善,而又不降,疑其有反計,未敢發。

 

 천자는 두 장군이 성을 포위하고 있으면서 어긋나 있고 군사도 오래도록 결판이 나지 않으니 제남 태수 공손수로 하여금 가서 이를 바로잡게 하고 상황에 따라 편리한 대로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天子以兩將圍城乖異,兵久不決,使濟南太守公孫遂往正之,濟,子禮翻。《考異》曰:《史記》作「征之」,蓋字誤;今從《漢書》。有便宜得以從事。

 

 공손수가 도착하니 좌장군이 말하였다.

 "조선은 마땅히 함락되었어야 하는데, 오래 되어도 점령하지 못한 것은 누선장군이 자주 약속하고 모이지 않아서입니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갖추어서 보고하고 말하였다.

 "지금 이와 같은데, 잡지 않으면 커다란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遂至,左將軍曰:「朝鮮當下,久之不下者,樓船數期不會。」具以素所意告,曰:「今如此不取,恐爲大害。」

 

 공손수도 역시 그렇다고 여기고 마침내 부절을 가지고 누선장군을 불러서 좌장군의 군영에 들어와서 일을 계획하자 하고, 바로 좌장군 휘하에 있던 병졸글을 시켜서 누선장군을 잡고, 그 군사를 합병하도록 명령하고서 천자에게 가서 보고하니, 천자는 공손수를 주살하였다.

 遂亦以爲然,乃以節召樓船將軍入左將軍營計事,卽命左將軍麾下執樓船將軍,幷其軍;以報天子,天子誅遂。《考異》曰:《漢書》作「許遂」。按左將軍亦以爭功相嫉乖計棄市,則武帝必以遂執樓船爲非,《漢書》作「許」,蓋字誤,今從《史記》。

 좌장군은 이미 두 군대를 합병하고 즉시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의 재상인 노인과 재상 한음, 니계의 제상 참, 장군 왕겹이 서로 모의하여 말하였다.

 "처음에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고 하였는데, 누선은 지금 잡혀 있고 다만 좌장군이 아울러 가느리고 있어서, 전투가 더욱 급해지니 더불어 싸울 수 없을까 걱정인데 왕은 항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左將軍已幷兩軍,卽急擊朝鮮。朝鮮相路人、相韓陰、《考異》曰:《漢書》「陰」作「陶」,今從《史記》。尼谿相參、將軍王唊應劭曰:凡五人;戎狄不知官紀,故皆稱相。師古曰:相路人,一也,相韓陶,二也,尼谿相參,三也,將軍王唊,四也,應氏乃云五人,失之矣,不當尋下文乎!余據「韓陶」今作「韓陰」,蓋從《史記》。相,息亮翻。唊,音頰。相與謀曰:「始欲降樓船,樓船今執,獨左將軍幷將,將,卽亮翻。戰益急,恐不能與戰;王又不肯降。」

 

 한음과 왕겹과 노인은 모두 망명하여 한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길에서 죽었다. 여름에 니계의 참이 사람을 시켜서 조선왕 위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검성은 아직점령되지 않았는데, 옛날 위우거의 대신이었던 성기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서 다시 공격하는 관리를 회복시켰다.

 陰、唊、路人皆亡降漢,路人道死。夏,尼谿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王險城未下,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復攻吏。復,扶又翻。

 

 좌장군은 위우거의 아들인 위장과 항복한 재상인 노인의 아들 노최로 하여금 그 백성들에게 알리게 하여 성기를 주살하였다. 이런 연고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낙랑, 임둔, 현토, 진번의 네 군을 만들었다.

 左將軍使右渠子長、降相路人之子最師古曰:右渠之子名長。路人先已降漢而死於道,故謂之降相,最者其子名。告諭其民,誅成己。以故遂定朝鮮,爲樂浪、臨屯、玄菟、眞番四郡。樂浪郡治朝鮮縣,蓋以右渠所都爲治所也。臣瓚曰:《茂陵書》:臨屯郡治東暆縣,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領十五縣。玄菟郡,本高句驪也,旣平朝鮮,併開爲郡,治沃沮城,後爲夷貊所侵,徙郡句驪西北。眞番郡治霅縣,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領十五縣。余據後廢臨屯、眞番二郡。班《志》,東暆縣屬樂浪。霅縣無所考。樂,音洛。浪,音狼。

 

 참을 책봉하여 홰청후로 하고, 한음을 추저후로 하고, 왕겹을 평저후로 하고, 위장을 기후로 하고, 노최는 그의 아버지가 죽음으로써 자못 공로를 세웠으므로 열양후로 삼았다.

 封參爲澅清侯,《功臣表》:澅清侯食邑於齊。澅,音獲,又戶卦翻。陰爲萩苴侯,班《書‧功臣表》作「荻苴侯」,食邑於勃海。此從《史記》作「萩」,音秋。苴,子餘翻。唊爲平州侯,《功臣表》:平州侯食邑於泰山梁父縣。長爲幾侯,《功臣表》作「幾侯張洛」,食邑於河東。最以父死頗有功,爲涅陽侯。涅陽縣屬南陽郡。涅,乃結翻。

 좌장군은 징소되어 도착하자, 공을 다투며 서로 질투하여 계획을 그르쳤다는 것에 연좌되어 기시되었다. 누선장군 역시 군사가 열구에 도착하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하는데, 멋대로 먼저 병졸을 풀어놓아서 망실한 것이 많아서 주살되어야 마땅하지만 대속하여 서인이 되었다.

 左將軍徵至,坐爭功相嫉乖計,棄市。樓船將軍亦坐兵至列口,班《志》,列口縣屬樂浪郡。郭璞曰:《山海經》,列水在遼東。余謂其地當列水入海之口。當待左將軍,擅先縱,失亡多,當誅,贖爲庶人。

 

 반고가 말하였다.

 "현토와 낙랑은 본래 기자의 봉지이다. 옛날에 기자는 조선에 있었고, 그 백성을 예의를 가지고 가르치고, 밭 갈고 누에치고 길쌈을 하게하며, 백성들을 위해서는 여덟 조목의 금령을 두었는데, 죽이면 그 당시 죽여서 갚고,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하고, 도둑질을 하면 남자는 적몰하여 그 집의 가노가 되며, 여자는 비로 삼고, 스스로 대속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한 사람에 50만으로 하며, 비록 면하여 민이 되어도 풍속에서는 이를 수치로 생각하고, 시집가고 장가들기는 하였지만 파는 일은 없었다.

 班固曰:玄菟、樂浪,本箕子所封。武王封箕子於朝鮮。昔箕子居朝鮮,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爲民設禁八條,爲,于僞翻。相殺,以當時償殺;相傷,以穀償;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女爲婢;欲自贖者人五十萬,雖免爲民,俗猶羞之,嫁娶無所售。

 

 이리하여서 그 백성들은 끝내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문호를 닫는 일이 없고, 부인은 곧고 믿음성이 있어서 음란하지 않았다. 그 전야에서는 변두(籩豆: 籩은과실과 건육을 담는 대나무 그릇, 豆는 김치나 젓갈을 담는 그릇)로 먹고 마시며, 도읍에서는 자못 관리를 본받았는데, 왕왕 배기로 먹었다.

 是以其民終不相盜,無門戶之閉,婦人貞信不淫辟。辟,讀曰僻。其田野飲食以籩豆,都邑頗放效吏,往往以杯器食。放,甫往翻。

 

 군에서는 처음에 요동에서 관리를 데려왔는데, 관리들이 백성들이 문을 닫거나 감춰두지 않는 것을 보았는데, 고인으로 갔던 사람들이 밤에 도둑이 되자 풍속은 점차로 더욱 야박해졌다. 지금은 금법을 범하는 일이 차츰 많아져서 60여 조목에나 이르렀다.

 郡初取吏於遼東,吏見民無閉臧,臧,讀曰藏。及賈人往者,賈,音古。夜則爲盜,俗稍益薄,今於犯禁寖多,至六十餘條。

 

 귀하다 할 것이다! 어질고 현명한 교화여! 그러나 동이의 천성이 유순하여 다른 세 곳의 밖에 사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공자는 도가 실행되지 않음을 애도하고, 바다에 뗏목을 띄워 구이에 살고 싶다고 하였으니 있음직 하다.

 可貴哉,仁賢之化也!然東夷天性柔順,異於三方之外。故孔子悼道不行,設浮桴於海,欲居九夷,並見《論語》。桴,編竹木爲之,大者曰筏,小者曰桴。桴,芳無翻。有以也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