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淮堰축조

solpee 2019. 8. 30. 08:29

 

《梁紀4 武帝 天監 15 (丙申, 516

 

 

 7.여름, 4월에 회언이 완성되었는데, 길이가 9리(1里≒455m), 밑바닥의 너비가 140장(1丈≒296cm), 윗면의 너비가 45장, 높이가 20장이었고, 기류나무(갯버들)로 심어져 있었으며, 군사진지가 그 위에 열을 지어 있었다.

 7.夏,四月,淮堰成,長九里,下廣一百四十丈,上廣四十五丈,高二十丈,樹以杞柳,軍壘列居其上。

 

 어떤 사람이 강현에게 말하였다.

 "4개의 강(長,珠,淮,漢)은 하늘이 조절함으로써 그 기를 베푸는 것이기에 오랫동안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강의 밑바닥을 뚫어서 동쪽으로 몰을 댄다 해도, 흐르는 물결이 느리게 간다면 방죽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강현이 마침내 강의 밑바닥을 열어서 동쪽으로 흘러가도록 하였다.

 或謂康絢曰:「四瀆,天所以節宣其氣,不可久塞,若鑿湫東注,則游波寬緩,堰得不壞。」絢乃開湫東注。

 

 또 반간을 위에 멋대로 풀어놓고 말하였다.

 "양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강의 밑바닥을 여는 것이지, 들판에서 싸우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소보인이 그것을 믿고 산을 5장 깊이로 뚫어서 강의 밑바닥을 열어 북쪽으로 물을 댔는데, 물은 밤낮으로 나누어 흘렀으나 오히려 줄지 않았기에 위의 군대는 마침내 그만두고 돌아갔다. 물이 미친 곳은 회수를 끼고 사방 수백 리였다.

 又縱反間於魏曰:「梁人所懼開湫,不畏野戰。」蕭寶寅信之,鑿山深五丈,開湫北注,水日夜分流猶不減,魏軍竟罷歸。水之所及,夾淮方數百里。

 

 이숭은 협석의 수자리 사이에 부교를 놓고, 또 팔공산의 동남부에 위창성을 쌓아서 수양성이 무너지는 것을 대비하였는데, 거주하는 백성들은 흩어져서 산등성이나 고개로 갔고, 그 물은 맑고 투명하여서 허리를 구부려 가옥과 무덤을 보면 아래에 있는 물체들이 분명하였다.

 李崇作浮橋於硤石戍間,又築魏昌城於八公山東南,以備壽陽城壞。居民散就岡壟,其水清澈,俯視廬舍塚墓,了然在下。

 

 애초에, 방죽은 서주의 경내에서 시작되었는데, 자사 장표자가 선언하기를 자기가 반드시 그 일을 관장하겠다고 말하였고, 이미 그리하였으나, 강현이 다른 관직을 가지고 와서 이 일을 감독하면서 만들자, 장표자는 대단히 부끄럽게 여겼다.

 初,堰起於徐州境內,刺史張豹子宣言,謂己必掌其事;既而康絢以他官來監作,豹子甚慚。

 

 잠시 후에 장표자에게 칙서를 내려서 강현의 통제를 받게 하니, 장표자는 마침내 강현이 위와 왕래한다고 참소하였고, 황상이 비록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 일이 끝났다고 하여 강현을 돌아오라고 불렀다.

 俄而敕豹子受絢節度,豹子遂譖絢與魏交通,上雖不納,猶以事畢征絢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