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북위 세종의 사망

solpee 2019. 8. 29. 11:08

 

《梁紀4 武帝 天監 14 (乙未, 515

 

 

 3. 갑인일(10)에 위세종이 병이 났고, 정사일(13)에 식건전에서 죽었다(33세). 시중·중서감·태자소부인 최광과 영군장군 우충, 첨사 왕현, 중서자인 대 사람 후강이 동궁에서 태자 원후(6)를 맞이하여 현양전에 도착하였다. 왕현이 밝기를 기다려서 즉위하는 예를 거행하려고 하자, 최광이 밀하였다.

 3.正月, 甲寅,魏主有疾;丁巳,殂於式乾殿。侍中、中書監、太子少傅催光,侍中、領軍將軍於忠,詹事王顯,中庶子代人侯剛,迎太子詡於東宮,至顯陽殿。王顯欲須明行即位禮,崔光曰:

 

 "천자의 자리는 잠시라도 비울 수 없는데, 어찌 밝기를 기다립니까?"

 왕현이 말하였다.

 "마땅히 중궁에 아뢰어야 합니다.

 최광이 말하였다.

 "황제가 죽으면 태자가 등극하는 것은 나라의 일반적인 법도인데, 어찌 중궁의 명령을 기다립니까?"

「天位不可暫曠,何待至明!」顯曰:「須奏中宮。」光曰:「帝崩,太子立,國之常典,何須中宮令也!」

 

 이에 최광 등은 태자에게 소리 내 우는 것을 그치라고 요청하고 동서에 서니, 우충과 황문랑 원소가 태자를 부축하여 서쪽을 향하여 10여 번 곡소리를 내고 그쳤다.

 於是光等請太子止哭,立於東序;於忠與黃門郎元昭扶太子西面哭十餘聲:止。

 

 최광이 섭태위여서 책서를 받들고 옥새와 인수를 올리니 태자는 무릎을 꿇고 받았고, 곤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쓰고 태극전으로 가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최광 등은 밤에 숙직하는 여러 관료 등과 함께 마당 안에 서서 북쪽을 향하여 머리를 숙이고 만세를 외쳤다. 원소는 탁발준의 증손자이다.

 光攝太尉,奉策進璽綬,太子跪受,服袞冕之服,御太極殿,即皇帝位。光等與夜直群官立庭中,北面稽首稱萬歲。昭,遵之曾孫也。

 

 고황후가 호귀빈을 죽이려고 하자, 중급사인 초군 사람 유등이 후강에게 알리고, 후강은 그것을 우충에게 알렸다. 우충은 최광에게 계책을 묻자, 최광은 그를 시켜서 귀빈을 다른 곳에 안치하여 삼엄하게 지키도록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귀빈은 네사람에게 깊은 은덕을 느꼈다.

 高後欲殺胡貴嬪,中給事譙郡劉騰以告侯剛,剛以告於忠。忠問計於崔光,光使置貴嬪於別所,嚴加守衛,由是貴嬪深德四人。

 

 무오일(14)에 위는 크게 사면하였다. 기미일(15)에 서쪽으로 정벌에 나선 군대와 동쪽으로 방어하러 간 군대를 모두 불러서 돌아오도록 하였다.

 표기대장군인 장평왕 원회가 병든 몸을 부축하고 들어와 임석하는데, 지름길로 태극전의 서쪽에 있는 곁채에 이르러 애통해하면서 시중·영군장군·황문시랑·이위를 불러서 말하였다.

 戊午,魏大赦。己未,悉召西伐、東防兵。驃騎大將軍廣平王懷扶疾入臨,逕至太極西廡,哀慟,呼侍中、黃門、領軍、二衛,云:

 

 "몸소 태극전에 올라가서 대행께 소리 내 울고 싶고, 또 반드시 대전에 들어가서 주상을 뵙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겁하면서 서로 보았지만 감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최광이 상복을 걷어올리고 지팡이를 흔들면서, 한의 광무제가 붕어하자 조희가 제왕들을 부축하여 전각에서 내려가도록 한 고사를 인용하였는데, 목소리와 표정이 대단히 사나우니 들은 자들은 훌륭하다고 칭찬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身欲上殿哭大行,又須入見主上。」眾皆愕然相視,無敢對者。崔光攘衰振杖,引漢光武崩趙熹扶諸王下殿故事,聲色甚厲,聞者莫不稱善。

 

 원회는 소리 내 우는 것을 모두 그치고 말하였다.

 "시중께서 고대의 예의를 가지고 나를 제재하니, 내가 어떻게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마침내 돌아가서 오히려 자주 측근들을 보내어 용서를 빌었다.

 懷聲淚俱止,曰:「侍中以古義裁我,我敢不服?」遂還,仍頻遣左右致謝。

 

 이보다 먼저 고조가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면서 종실 중에서 당시 촉망받고 있는 자가 있는 것을 대단히 꺼렸기 때문에 태자태부인 임성왕 원징이 자주 고조에게 참소당하니, 두렵고 마음이 온전하지 않아서 마침내 하루 종일 술에 취하여 하는 행동이 미치광이와 같았기에 조정의 중요한 업무는 관여할 수 없었다.

 先是,高肇擅權,尤忌宗室有時望者。太子太保任城王澄數為肇所譖,懼不自全,乃終日酣飲,所為如狂,朝廷機要無所關豫。

 세종이 죽기에 이르자 고조가 밖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있기에 조정의 안팎에서 펀안하지 못하였다. 우충이 문하성과 의논하여 숙종이 어려서 아직은 정사를 볼 수 없으므로, 의당 태보인 고양왕 원옹을 시켜서 들어와 서백당으로 거주하면서 여러 정무를 살펴서 처리하도록 하고, 임성왕 원징을 상서령으로 삼아서 모든 관료를 장악하도록 하며 황후에게 주문을 올리니, 즉각 칙서가 내려왔다. 

 及世宗殂,肇擁兵於外,朝野不安。於忠與門下議,以肅宗幼,未能親政,宜使太保高陽王雍入居西柏堂省決庶政,以任城王澄為尚書令,總攝百揆,奏皇后請即敕授。

 

 2월 경진일(7)에 황후를 높혀서 황태후로 삼았다.

 二月,庚辰,尊皇后為皇太后。

 

 위 숙종은 이름을 부르며 편지를 써서 고조에게 애사를 알리고 또 그에게 돌아오라고 불렀다. 고조는 변화가 있음을 받아들이고 근심하면서 두려워하여 아침저녁으로 소리 내 울고 눈물을 흘리니 여위고 파리해졌고, 돌아오는 중에 전간에 도착하니 집안사람들이 그를 맞이하였으나 그들과 서로 보지 않았고, 신사일(8)에 대궐 바로 밑에 도착하여 상복을 입고 울부짖으면서 태극전에 올라가서 애도를 다하였다.

 魏主稱名為書告哀於高肇,且召之還。肇承變憂懼,朝夕哭泣,至於羸悴。歸至瀍澗,家人迎之,不與相見。辛巳,至闕下,衰服號哭,升太極殿盡哀。

 

 고양왕 원옹이 우충과 함께 몰래 모의하여 직침(당직무관) 형표 등 10여 명을 사인성(숙직실) 밑에 매복시켜놓았다가 고조가 소리 내 우는 것을 끝내자 서쪽에 있는 곁채로 유인되어 들어갔는데, 청하왕 등 여러 왕들이 모두 소곤거리며 그를 눈여겨보았다.

 高陽王雍與於忠密謀,伏直寢邢豹等十餘人於舍人省下,肇哭畢,引入西廡,清河諸王皆竊言目之。

 

 고조가 사인성에 들어가자, 형표 등이 그의 목을 졸라서 죽였고, 조서를 내려서 그의 죄악을 폭로하고는 고조가 자살하였다고 발표하니, 나머지 친척과 한패거리에게는 모두 소식도 알리지 않고 그의 관직과 직위를 삭탈하여 사례(선비신분)로써 장사 지내도록 하였는데, 저녁이 되자 변소의 문을 통해 시체를 내어서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肇入省,豹等扼殺之,下詔暴其罪惡,稱肇自盡,自餘親黨悉無所問,削除職爵,葬以士禮;逮昏,於廁門出屍歸其家。

 

 

 6.갑오일(21)에 위는 선무황제를 경릉에서 장사지내고 묘호를 세종이라 하였다. 을해일(26)에 호귀빈을 높여서 황태비로 삼았다. 3월 초하루 갑진일에 고태후를 비구니가 되게 하여 금융의 요광사로 옮겨 거주하도록 하니, 큰 명절과 경축일이 아니면 궁궐에 들어올 수 없었다.

 6.甲午,魏葬宣武皇帝於景陵,廟號世宗。己亥,尊胡貴嬪為皇太妃。三月,甲辰朔,以高太后為尼,徙居金墉瑤光寺,非大節慶,不得入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