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宦者黃泰平刀傷其膝,仆地,張齊斬之/환관 황태평이 칼로 무릎을 베자 장제가 동혼후의 목을 베었다.

solpee 2019. 8. 19. 20:41

 

《齊紀10 和帝 中興 元年 (辛巳, 501

 

 

 35. 대항에서 패하게 되자 무리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여법진 등은 병사와 백성들이 도망가서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성을 닫고 다시 병사를 내보내지 않았다. 이미 그렇게 하고 길게 울타리를 세워놓고 해자와 목책을 대단히 단단하게 하였으며, 그런 뒤에도 나와서 흔들었고, 여러 번 싸움을 하여도 이기지 못하였다.

 35.十一月, 及大桁之敗,衆情兇懼。兇,凶勇翻。茹法珍等恐士民逃潰,故閉城不復出兵。復,扶又翻。旣而長圍已立,塹栅嚴固;然後出盪,屢戰不捷。塹,士豔翻。

 

 동혼후는 더욱 금전을 아끼며 상금을 내려주지 않았는데, 여법진이 머리를 조아리며 청하자 동혼후가 말하였다.

 "역적들이 오면 오로지 나만을 잡으려 할 것인가? 어찌 내게 와서 재물을 요구하는가?"

 후당에 수백 개의 나무 조각을 쌓아놓고 아뢰어 성을 막는데 쓰려고 하였지만, 동혼후는 남겨놓았다가 궁궐을 짓는데 쓰려고 끝내 내주지 않았다.

 東昏尤惜金錢,不肯賞賜;法珍叩頭請之,東昏曰︰「賊來獨取我耶!何爲就我求物!」後堂儲數百具榜,榜,比朗翻,木片也。啓爲城防;東昏欲留作殿,竟不與。

 

 또한 어부를 재촉하여 300명 분의 정교한 무기를 만들도록 하였는데, 포위가 풀리기를 기다렸다가 병제(비밀장막)로 하려고 하였으며, 금과 은으로 아로새겨 넣은 여러 가지 물건들을 보통 때보다 두배나 급하게 재촉하였다. 무리들이 모두 원망하며 게으름을 피우고 힘을 다하지 않았다. 밖에서 포위한 지가 이미 오래되자 성 안에서는 모두 일찍이 도망할 것을 생각하였지만 감히 먼저 출발하지 않았다.

 又督御府作三百人精仗,待圍解以擬屛除,屛,必郢翻。金銀雕鏤雜物,倍急於常。衆皆怨怠,不爲致力。外圍旣久,城中皆思早亡,莫敢先發。

 

 여법진·매충아가 동혼후에게 유세하였다.

 "대신들이 마음을 두고 있지 않으며 포위를 풀도록 하지 않고 있으니 마땅히 이들을 모두 주살하여야 합니다."

 왕진국·장직은 재앙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왕진국이 몰래 친한 사람을 파견하여 소연에게 밝은 거울을 바치자 소연이 쇠를 잘라서 그에게 회보하였다.

 茹法珍、梅蟲兒說東昏曰︰鏤,盧侯翻。爲,于僞翻。說,式芮翻。「大臣不留意,使圍不解,宜悉誅之。」王珍國、張稷懼禍,珍國密遣所親獻明鏡於蕭衍,衍斷金以報之。鏡所以照物;獻鏡者,欲衍照其心也。《易‧大傳》曰︰二人同心,其利斷金。故衍取以爲報。斷,丁亂翻;王肅丁管翻。

 

 연주의 중군참군 장제가 장직의 심복이었으므로 왕진국이 장제를 통하여 몰래 장직과 모의하여 함께 동혼후를 시해하기로 하였다. 장제가 밤에 왕진국을 이끌고 장직에게로 가서 무릎을 맞대고 계책을 정하였다.

 兗州中兵參軍【章︰十二行本「軍」下有「馮翊」二字;乙十一行本同。】張齊,稷之腹心也,珍國因齊密與稷謀,同弒東昏。齊夜引珍國就稷,造膝定計,造,七到翻。造,至也。對席而坐,兩下促席俱前至膝,以定密謀,故曰造膝定計。

 

 장제가 스스로 촛대를 잡았는데, 또한 계책을 후합사인 전강에게 알렸다. 12월 병인일(6) 밤에 전강이 몰래 사람으로 하여금 운용문을 열도록 하고 왕진국·장직이 병사를 이끌고 궁전으로 들어갔는데 어도 풍용지가 안에서 호응하였다.

 齊自執燭;又以計告後閤舍人錢強。後閤舍人,蓋江左所置,使主殿後閤者也。按後閤舍人,常在宮中,觀徐龍駒事可見。十二月,丙寅夜,強密令人開雲龍門,珍國、稷引兵入殿,御刀豐勇之爲內應。豐勇之,右衞軍人,爲東昏所委任。《姓譜》︰豐姓,鄭七穆子豐之後。

 

 동혼후가 함덕전에서 생가를 연주하게 하며 잠이 아직 깊게 들지 않았는데 병사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북쪽 창문으로 달려나가 후궁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문이 이미 닫혀 있었다.

 東昏在含德殿作笙歌,寢未熟,聞兵入,趨出北戶,欲還後宮,門已閉。

 

 환관 황태평이 칼로 동혼후의 무릎에 부상을 입혀 땅에 엎어지자 장제가 그의 목을 베었다. 장직이 상서좌복야 왕량 등을 불러서 궁전 앞 서쪽에 있는 종루 아래에 차례대로 늘어서 앉히고 백관들로 하여금 전소에 서명하도록 하고 누런 기름을 먹인 비단으로 동혼후의 머리를 싸고 국자박사 범운 등을 파견하여 석두로 보내어 가게 하였다.

 宦者黃泰平刀傷其膝,仆地,張齊斬之。東昏時年十九。稷召尚書右僕射王亮等列坐殿前西鍾下,令百僚署牋,以黃油裹東昏首,黃絹施油可以禦雨,謂之黃油。以黃油裹物,表可見裏,蓋欲蕭衍易於審視也。遣國子博士范雲等送詣石頭。《考異》曰︰《南史‧王亮傳》曰︰「張稷等議立湘東嗣王寶晊。領軍王瑩曰︰『城門已久,人情離解,征東在近,何不諮問!』」按時和帝已立,稷等知建康不可守,故弒東昏,豈敢復議立寶晊!今從《齊紀》。

 

 우위장군 왕지가 탄식하였다.

 "관이 비록 닳아서 해졌다고 하여서 어찌 발에 쓰게 할 수 있겠는가?"

 정원에 있는 낙엽을 모아서 두 손으로 비벼서 이것을 옷에다 묻혀 정신이 없는 것처럼 가짜로 꾸미고 서명하지 않았다. 소연은 전소에 왕지의 이름이 없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그를 칭찬하였다.

 右衞將軍王志歎曰︰「冠雖弊,何可加足!」取庭中樹葉挼服之,挼,奴禾翻,兩手相切摩也;今俗語云挼莎。僞悶,不署名。衍覽牋無志名,心嘉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