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隋記1 文帝 開皇 20年》〈庚申,600年〉
楊廣의 陰謨
진왕 양광은 태자의 엽색행각등 약점을 두루 알고, 스스로 겉을 꾸미고 오직 소비와 더불어 거처하고, 후정에 아들이 생기면 모두 내쫓아 기르지 않았는데, 황후는 이로 말미암아 자주 양관이 어질다고 칭찬하였다. 대신 중에 일 좀 하는 대신들을 마음을 기울여 사귀었다.
晉王廣,彌自矯飾,唯與蕭妃居處,後庭有子皆不育,後由是數稱廣賢。大臣用事者,廣皆傾心與交。
황상과 황후가 매번 좌우에 있는 사람을 보내어 양관의 처소에 도착하면 귀천을 불문하고 반드시 소비와 더불어 맞이하여 융숭하게 접대하고 후한 예의를 펼쳤으니, 왕래하는 비첩들과 노복들은 양광이 어질다고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上及後每遣左右至廣所,無貴賤,廣必與蕭妃迎門接引,為設美饌,申以厚禮;婢僕往來者,無不稱其仁孝。
황상이 황후와 더불어 행차하니 양관은 놀던 미희들을 모두 숨기고, 무늬가 없는 비단옷을 입고서 오직 늙고 추한 사람만 남겨서 좌우에서 시중들도록 하고, 병풍과 휘장은 합사로 짠 흰 비단으로 바꾸고, 고의로 악기의 줄을 끊고 먼지는 털지 않도록 시켰다.
上與後嘗幸其第,廣悉屏匿美姬於別室,唯留老醜者,衣以縵彩,給事左右;屏帳改用縑素;故絕樂器之弦,不令拂去塵埃。
황상이 그것을 보고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겼으며, 궁궐로 돌아와서 시중드는 신하들에게 말하고 속으로 아주 기뻐하니, 신하들이 모두 경사스런 일이라고 칭찬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다른 아들과 특별히 다르게 생각하였다.
上見之,以為不好聲色,還宮,以語侍臣,意甚喜。侍臣皆稱慶,由是愛之特異諸子。
........................................중략.........................................
진왕 양광은 자태와 행보를 아름답게 하고, 성격은 민첩하고 지혜로웠으며 아주 엄격하고 중후하였는데, 배우기를 좋아하며 글쓰기를 잘하고, 조정에 있는 인사들을 공경하여 접대하고 예의를 지극히 하고 낮추고 굽혔는데, 이로 말미암아 명성이 아주 자자하여기가 여러 왕들 중에서 으뜸이었다.
晉王廣美姿儀,性敏慧,沉深嚴重;好學,善屬文;敬接朝士,禮極卑屈;由是聲名籍甚,冠於諸王。
양광이 양주 총관이 되어 조정에 들어갔다가 곧부임지로 돌아가려 하면서 궁전에 들어가 황후에게 인사하며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니, 황후 역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양광이 말하였다.
廣為揚州總管,入朝,將還鎮,入宮辭後,伏地流涕,後亦泫然泣下。廣曰:
"신의 성품은 어리석고 떨어짐을 알아서 항상 형제의 뜻을 평생 지키고 있으나 무슨 죄로 동궁에게 사랑을 잃어서 항상 격노한 생각을 쌓고 죽이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매번 헐뜯어서 무고하는 말로 북(증삼의 어머니 가 북을 던지고 달아난 고사)을 던지는 일을 만들고, 짐독을 잔과 국자에서 만날까 두려워하며, 이로써 걱정을 자주하여 근심으로 쌓여 위태롭고 또 죽을까 두렵습니다."
「臣性識愚下,常守平生昆弟之意,不知何罪失愛東宮,恆蓄成怒,欲加屠陷。每恐讒譖生於投杼,鴆毒遇於杯勺,是用勤憂積念,懼履危亡。」
황후가 화를 내며 말하였다.
"태자는 점점 참을 수 없으니, 나는 그를 위하여 원씨의 딸을 아내로 들였는데, 끝내 그녀를 부부의 예로 대하지 않고 오로지 아운만 총애하여 이와같이 개돼지같은 자식들만 얻었다. 이전 신부가 짐독으로 죽었으니 내가 끝까지 파헤치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로 다시 너에게 이처럼 대하는가!
後忿然曰:「睍地伐漸不可耐,我為之娶元氏女,竟不以夫婦禮待之。專寵阿雲,使有如許豚犬。前新婦遇毒而夭,我亦不能窮治,何故復於汝發如此意!
내가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는데도 이러하니 내가 죽은 후에는 너를 어육으로 만들겠구나! 매번 동궁이 끝내 본차 소생이 없는 것을 생각하면서 지존께서는 천년만년이 지난 뒤에 너희 형제를 보내어 아운의 아이 앞에서 두 번 절하고 문안하도록 할 것이니, 이것이 얼마나 고통이겠는가!"
我在尚爾,我死後,當魚肉汝乎!每思東宮竟無正嫡,至尊千秋萬歲之後,遣汝等兄弟向阿雲兒前再拜問訊,此是幾許苦痛邪!」
양광은 또 절하고 오열하기를 그치지 못하고 황후 또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황후는 양용을 폐하고 양광을 새우기로 뜻을 세웠다.
廣又拜,嗚咽不能止,後亦悲不自勝。自是後決意欲廢勇立廣矣。
....................................................................................
11월 무자일에 진왕 양광을 세워서 황태자로 삼았다.
十一月,戊子,立晉王廣為皇太子。
....................................................................................
문제는 전태자양용을 동궁에 가두고 태자 양광에게 관장토록 하였다. 용은 폐위가 자기 때문이 아니라 태자 광의 모함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주 문제를 만나 원통함을 호소하기로 하였으나 태자가 막아서 만날 수가 없었다.
帝囚故太子勇於東宮,付太子廣掌之。勇自以廢非其罪,頻請見上申冤,而廣遏之不得聞。
이에 용은 나무에 올라가 크게 외치며 황제의 처소에 들리기를 바랐다. 양소는 양용이 미쳐서 다시 거둘 수 없다고 말하였다. 문제는 그럴 것이라고 여겨서 끝내알현 할 수 없었다.
勇於是升樹大叫,聲聞帝所,冀得引見。楊素因言勇情志昏亂,為癲鬼所著,不可復收。帝以為然,卒不得見。
애초에, 황제가 진을 하병하면서 천하 사람들이 태평세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감찰어사 방언겸은 사사로이 친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주상은 시기하면서 각박하고 가혹하며, 태자는 비굴하고 사악하며, 여러 친왕들은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니 천하가 비록 안정되었으나 바야흐로 위태롭고 어지러워질까 걱정된다."
初,帝之克陳也,天下皆以為將太平,監察御史房彥謙私謂所親曰:「主上忌刻而苛酷,太子卑弱,諸王擅權,天下雖安,方憂危亂。」
그의 아들 방현령 또한 몰래 방언겸에게 말하였다.
"주상은 본래 공덕 없이 거짓으로 천하를 탈취하였고, 여러 아들은 모두 교만하고 사치스럽고 어질지 아니하여서 반드시 서로 죽일 것이니, 지금 비록 평화로우나 그들이 망하는 것은 발돋움하고 기다릴 만합니다."
其子玄齡亦密言於彥謙曰:「主上本無功德,以詐取天下,諸子皆驕奢不仁,必自相誅夷,今雖承平,其亡可翹足待。」
《隋記3 文帝 仁壽 2年》〈壬戌,602年〉
8월 갑자일에 황후 독고씨가 붕하였다. 태자는 문제와 궁인들을 마주하면서 애통하여 숨이 막혀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것같이 하였는데, 사사로이 쓰는 방에 머물러서는 마시고 먹고 말하고 웃는 것이 평상시와 같았다.
八月,甲子,皇后獨孤氏崩。太子對上及宮人哀慟絕氣,若不勝喪者;其處私室,飲食言笑如平常。
또 아침마다 두 웅큼으니 쌀을 바치도록 하고 몰래 살찐 짐승의 고기와 포육, 젓갈을 얻어서 대나무 통 안에 넣고 밀랍한 후에 옷과 두건을 덮어 두었다.
又,每朝令進二溢米,而私令外取肥肉脯鮓,置竹桶中,以蠟閉口,衣袱裹而納之。
...................................................................................
문제가 상의동삼사 소길로 하여금 황후의 장지를 찾도록 하였는데 길지를 찾고서 말하였다.
길지는 햇수로는 2천 년이고 세대는 200세대입니다."
上令上儀同三司蕭吉為皇后擇葬地,得吉處,云:「卜年二千,卜世二百。」
문제가 말하였다.
"길흉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땅에 있지 않다. 고위가 아버지를 장사 지내면서 어찌 풍수를 헤아리지 않았겠는가! 제는 곧 망하였다. 바로 우리 집안처럼 만약 불길하였다면 짐은 응당 천자가 되지 않았어야 하였고, 흉하지 않았다고 하면 응당 나의 동생이 전사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과 똑 같다."
上曰:「吉凶由人,不在於地。高緯葬父,豈不卜乎!俄而國亡。正如我家墓田,若雲不吉,朕不當為天子;若雲不凶,我弟不當戰沒。」
그러나 끝내는 소길의 말을 좇았다. 소길이 물러나서 친족 소평중에게 말하였다.
"황태자는 우문좌솔을 파견하여 나에게 깊이 사과하며 말하기를, '공이 예전에 내가 태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었는데 결국 그것이 맞았으니 끝내 잊지 않겟다. 지금 산릉을 점쳐서 나로 하여금 빨리 세워지도록 힘쓰라. 내가 세워진 후에는 응당히 부귀로써 보답하겠다.' 라고 하였다.
然竟從吉言。吉退,告族人蕭平仲曰:「皇太子遣宇文左率深謝余云:『公前稱我當為太子,竟有其驗,終不忘也。今卜山陵,務令我早立。我立之後,當以富貴相報。』
나는 그에게 '4년 후 태자는 천하에 군림하십니다.'라고 말하였다. 만약 태자가 정치를 하게 되면 수는 망한다!
吾語之曰:『後四載,太子御天下。』若太子得政,隋其亡乎!
내가 예전에 속여서 말한 '점복으로 나타난 햇수는 2천'이라고 한 것은 30이라는 글자이고, '점복으로 나타는 세대는 200'이란 것은 세대가 두 번 전해지는 것이다. 너는 그것을 알아두라."
吾前紿云『卜年二千』者,三十字也;『卜世二百』者,取世二傳也。汝其識之!」
임인일에 문헌황후를 태릉에 장사 지냈다.
壬寅,葬文獻皇后於太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