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紀16 武帝 太淸 2年》 〈戊辰,548年〉
④...광록대부 소개가 표문을 올려서 간하였다.
"가만히 듣건데 후경은 와양에서 패배가 거듭되어 한 필의 말을 타고 귀순하였으나 폐하께서는 이전에 있었던 화를 후회하지 않으시고 다시 칙령을 내려서 용납하였습니다.
④...光祿大夫蕭介上表諫曰:「竊聞侯景以渦陽敗績,隻馬歸命,陛下不悔前禍,復敕容納。
신이 듣건데 흉악한 사람의 성품은 고쳐지지 아니하며 천하의 악은 동일하다 합니다. 예전에 여포는 정원을 죽이고서 동탁을 섬겼으나 끝내 동탁을 주살하고 도적이 되었으며, 유뢰는 왕공을 배반하고서 진으로 돌아갔으나 다시 진을 등지고서 요사스러운 일을 꾸몄습니다.
臣聞凶人之性不移,天下之惡一也。昔呂布殺丁原以事董卓,終誅董而為賊;劉牢反王恭以歸晉,還背晉以構妖。
왜일까요? 이리의 거친 마음은 끝내 순종하고 가까이하는 성품이 없고 호랑이를 기르는 것에 비유되니, 반드시 굶주리면 물리는 화를 당합니다.
何者?狼子野心,終無馴狎之性,養虎之喻,必見饑噬之禍。
후경은 흉악하고 교활한 재주를 가지고 고환의 비호를 받아서 지위는 태사를 더럽혔고 임무는 방백에 머물렀는데, 그러나 고환의 무덤이 아직 마르지도 않아서 곧바로 거꾸로 그를 물었습니다. 반역한 힘이 이르지 못하자 이에 다시 죽기로 하고 관서로 도망하였는데, 우문태가 용납하지 않자 다시 몸을 우리에게 던진 것입니다.
侯景以凶狡之才,荷高歡卵翼之遇,位忝台司,任居方伯,然而高歡墳土未干,即還反噬。逆力不逮,乃復逃死關西;宇文不容,故復投身於我。
폐하께서 이전에 작은 물줄기라도 거스르지 않은 까닭은 바로 인근 속국의 항복한 호족으로 흉노를 토벌하려는 것이었고, 한 번 전쟁의 효과를 얻으려고 하였을 뿐인데, 지금 이미 군대를 잃고 땅을 잃었으니, 바로 이는 변경 근처에 있는 필부일 뿐인데, 폐하께서는 필부를 아끼시어 우방을 버리고 계십니다.
陛下前者所以不逆細流,正欲比屬國降胡以討匈奴,冀獲一戰之效耳;今既亡師失地,直是境上之匹夫,陛下愛匹夫而棄與國,臣竊不取也。
만약 국가가 아직 그가 다시 새벽을 알리며 울거나 해가 끝날 때에 나타나는 효과를 기대하신다면, 신은 엎드려 생각하건데, 후경은 반드시 세모의 신하가 아닌데, 향리와 나라를 버리는 것을 마치 신발을 벗는 것처럼 하고, 군주와 측근을 등지는 것을 풀을 버리듯이 하니, 어찌 멀리에서 성스런 덕을 사모하여 강·회에 사는 순수한 신하가 되기를 기대하십니까! 사적이 분명하니 의혹할 것이 없습니다.
若國家猶待其更鳴之辰,歲暮之效,臣竊惟侯景必非歲暮之臣;棄鄉國如脫屣,背君親如遺芥,豈知遠慕聖德,為江、淮之純臣乎!事跡顯然,無可致惑。
신은 나이가 많고 기력이 쇠하여 병이 차츰 깊어져서 조정의 정사에 간여하지 않아야만 합니다마는, 다만 초낭이 장차 죽으려고 할 때 영에 성을 쌓는 충성을 가졌으며, 위어는 죽을 때를 맞아 역시 서신으로써 간하는 절개를 가졌습니다. 신은 종실과 유로의 명예를 더렵혔으니 감히 유향의 마음을 잊겠습니까!
황상은 그의 충성에 탄식하였으나 채택할 수 없었다. 소개는 소사화의 손자이다.
臣朽老疾侵,不應干預朝政;但楚囊將死,有城郢之忠,衛魚臨亡,亦有尸諫之節。臣忝為宗室遺老,敢忘劉向之心!」上歎息其忠,然不能用。介,思話之孫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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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4월 소개의 간언을 듣지 않은 양무제는 후경의 쿠데타로 꿀이 먹고 싶어도 못먹고 죽었다.
《武帝 十八 太清 三年》〈己巳,549年〉
여름 4월....후경이 그 군사로 혀여금 궁전에 들어가서 마음대로 당직을 서고, 당나귀와 말을 몰고 활과 칼을 차고 궁전에 출입하였으며,...
夏,四月....景使其軍士入直省中,或驅驢馬,帶弓刀,出入宮庭,上怪而問之....
이후 황상이 바라는 것은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고 마실 것과 먹을 것 역시 줄이니 근심하고 화를 내다 병이 되었다. 태자는 어린 아들 소대환을 상동왕에게 맡기고 아울러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서 그에게 보냈다.
是後上所求多不遂志,飲膳亦為所裁節,憂憤成疾。太子以幼子大圜屬湘東王繹,並剪爪發以寄之。
5월 병진일에 황제는 정거전에 누워 있는데 입이 써서 꿀을 요구하였으나 얻지 못하니, 다시 '하! 하!'하다가 마침내 죽었다. 나이 여든 여섯이었다.
五月,丙辰,上臥淨居殿,口苦,索蜜不得,再曰:「荷!荷!」遂殂。年八十六。
후경이 비밀에 붙여 발상하지 않았으며 빈소를 소양전으로 옮기고 태자를 영복성에서 맞이하여 일상에 같이 입조하도록 하였다. 왕위·진경 모두 태자를 모셨는데, 태자는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으나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하니, 전 밖의 문무백관들은 모두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景秘不發喪,遷殯於昭陽殿,迎太子於永福省,使如常入朝。王偉、陳慶皆侍太子,太子嗚咽流涕,不敢洩聲,殿外文武皆莫之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