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槿堂 梁澤東 自敍帖

solpee 2017. 8. 31. 19:50

 범고래방 방주 率皮 眞如 尹泰東은 槿堂 梁澤東을 師事하고 있다. 이 방에 올라오는 거의 모든 체본은 근당의 체본이다. 저의 장인어른은 대구에서 서실을 오십여년 운영하시다가 타계하셨다. 생전에 제가 근당을 사사하려고 근당에 대해서 여쭈었을 때 장인께서는 젊은 분이 오체에 능하면서 당대 서예계의 최고봉이라는 모선생보다 낫다고 일언지하에 말씀하셨다.  근당문하에 입문한지 벌써 7년이 지났다. 이제 겨우 대문에 들어선 느낌이다. 십년이 지나면 마당에 들어서겠지 다짐하면서 스승 근당의 자서첩을 삼가 올린다.

 

槿堂 梁澤東 自敍帖

梁澤東, 1949414日生. , 槿堂. 三無齋人. 半村居士. 涪叟. 出於湖南 和順. 二十四歲, 國展(1973) 初入選後, 切學尋道中, 數次渡海臺灣, 留探古書房當代著名書家, 李超哉, 張松齡, 簡顯忠, 李秀雅先生等 書法問答, 觀書展, 以爲書學一念.

 1984年 大韓民國 美術大展 特選. 1990, 1991, 大韓民國 書藝大展 連任 審査委員. 歷任, 大韓民國現代美術大展 審査委員長, 大韓民國 書藝大展 審査委員長, 世界書藝 全北 biennale組織委員, 作家選定委員公募展 審査委員長. 全州大學校 敎育大學院 出講, 中國, 日本,臺灣, 獨逸, 巴西等 國際的 作品交流. 法務部, 言論人財團, 辯護士會, 學校等 十餘次 施行 人文學 講座.

 1978年 擧行 臺灣 現地 著名 書法家 書法交流 現場揮毫. 1980年代 以後 書藝雜誌 月刊書藝紙上 藝術家 吳昌碩專題 十回連載, 300年間 中國書學十二回專題 連載. 2000年代初 書藝雜誌 月刊書藝紙上 愛國之 窓專題 5年間 連載 書藝界 愛國精神 加重. 月刊美術artist 紙上 中國文化之 根’ 6回 連載. 1990年 純粹文學誌 隨筆登壇新人賞. 1994中國西安 書法binnale 邀請 參加兼 出品, 當時 中國書法家協會 副主席 沈鵬, 柳靑 尉天池等 多數作家 擧行現場揮毫.

 1996年 中國 杭州 中國美術學院 敎授 王冬齡 陳振濂 祝遂之 韓天雍等 書法硏討會修了. 現任 中央僧伽大學校 出講, 韓國書藝博物館長.自幼家傳韓醫 然不承篤好書畵金石, 曾臨習六朝造像, 張孟龍碑, 智永楷書千字文 顔眞卿, 米芾, 黃山谷明末淸初諸家. 然沒上溯漢魏碑帖, 兼文人畵 近者 尤深畵竝書, 借鑒 韓契民間書法, 兼收竝蓄, 熔鑄陶冶, 此風格上强調對比關係, 取前人所長又不專師一家, 形成自己的風格, 追求朴素大美的 美學思想表現, 道法自然之境界的書法, 率眞奇逸 姿肆勁健, 氣韻通達別有情趣, 古朴老辣的書風 探尋書法之道五十多年 入通會之際人書俱老, 人生以借古人之風神形成厚重古雅拙朴之氣 東坡有此語 吾書雖不甚佳 然自出新意可以名言也.

 양택동은 1949414일 생이다. 호는 근당이며, 삼무재인, 반촌거사, 부수이고 호남 화순에서 태어났다.

 24세에 첫 출품으로 국전에 입선하였고, 서학에 불타 길을 찾던 중 여러 차례에 걸쳐 바다건너 대만으로 가, 수시로 고서방을 찾아 머물렀으며, 대만 당대의 저명한 서법가인 이초재 장송령 간현충 이수아선생 과의 서법에 대한 問答書展을 통해서 書學에 대한 길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84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특선하였고, 19901991년에는 연이어 대한민국 서예대전에 심사위원을역임하기도했다. 그뒤 대한민국 현대미술대전 심사위원장과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장, 세계서예 全北biennale조직위원, biennale작가 선정위원, biennale공모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전주 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명작 감상등을 주제로 강의하기도 하였다.

 중국을 비롯한 일본 대만 독일 브라질등 국제적 작품교류에 참가하였고, 법무부, 언론인 재단, 서울변호사회, 학교등에서 십 여차에 걸쳐 인문학 강좌를 갖기도 했다. 1978(당시28)에는 대만에서 유명한 서법가들과 서법 교류회를 갖고 현장휘호도 하였다.   1980년대 이후 서예잡지 월간서예를 통해 예술가 오창석을 주제로 10회에 걸쳐 연재 하였고, 연이어 근 삼백년간의 중국서학이란주제로 일 년에 걸쳐 연재하였다. 19841990년쯤에 순수문학잡지를 통해 수필 신인상으로 뽑혔으며, 1994년에 중국 서안서법 비엔날레의 요청으로 참가하여 출품하였고, 당시 중국서법가협회 부주석으로 있던 심붕, 유청, 위천지등을 비롯한 저명 서법가와 현장 휘호도 즐겼다. 1996년에는 중국 항주 중국미술학원교수 왕동령, 진진렴, 축수지, 한천옹 등과 서법연토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와 서예잡지 월간서예를 통해 애국의 창이란 주제로 한국 애국지사등의 정신을 5년 가까이 연재하여 서예인들에게 애국 혼을 더하게 하였고, 또 월간 미술잡지 아타스트에 중국 문화의 뿌리란 제목으로 6회에 걸쳐 집중 연재하였다.  현재는 20년간 중앙승가대학교에서 서예 수업 지도 중에 있고, 한국서예박물관장이다.

 어려서 韓醫 家門이었으나 이를 계승하지 않고유달리 서화와 금석을 좋아하였으며 일찍이 육조의 조상과 장맹룡비, 지영천자문, 안진경, 미불, 황산곡 및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초기까지를 익히며 걸어 왔다. 그러면서도 한위비첩으로 거슬러 올라가 익히는 데도 빠뜨리지 않으려 했고 문인화를 겸하기도 하였다. 근래에 와서 그림과 글씨를 아우르는데 더욱 깊숙하게 여기며 잠깐씩 한글 민체를 거울처럼 보고, 함축적이고 짙게 녹여, 작품에 베여나도록 하였다. 이는 작품 품격 상, 강조되거나 한자와 한글의 대비적 관계 설정에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여겼다. 앞 사람들의 장점은 취했으나 또는 한 스승만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기적 서풍을

성공시키기 위함이어서 소박하고 대미적인 면을 추구하여, 미학 사상이 표현되면 도법자연과 같은 서법이 진솔하고도 기발하며 신일하기에 더욱 강건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글씨는 기운이 통달하고, 작가의 정취가 있으며, 고박하고 깔깔한 서풍을 자아낸다. 서예의 길을 찾아 떠난 지 50여년. 쉽지 않은 길에 들어섰지만, 사람과 글도 결국엔 노숙하게 되는 것. 인생이란 옛사람의 풍부한 정신 형성과 중후하고 고아하면서 졸박의 기운을 빌리는 것이니 만큼, 동파가 말한 나의 서는 비록 아름답다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지만 스스로 새롭게 함이라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三無齋에서 槿堂自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