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貧無車馬,常步,與走卒起居/호건은 항상 걸어다니며 병사들과 같이 숙식하였다.

solpee 2017. 4. 22. 17:34

《說苑 卷15 指武8故將軍者,士之心也,士者將之枝體也,心猶與則枝體不用/고로 장군은 병사들의 마음이요 병사들은 장군의 사지다. 장군의 마음이 머뭇거리면 사지가 말을 듣지 않는다.

 

田單為齊上將軍,興師十萬,將以攻翟,往見魯仲連子。仲連子曰:「將軍之攻翟,必不能下矣!」田將軍曰:「單以五里之城,十里之郭,復齊之國,何為攻翟不能下?」去上車不與言。決攻翟,三月而不能下,齊嬰兒謠之曰:「大冠如箕,長劍拄,攻翟不能下,壘於梧丘。」於是田將軍恐駭,往見仲連子曰:「先生何以知單之攻翟不能下也?」仲連子曰:「夫將軍在即墨之時,坐則織,立則杖臿為士卒倡曰:『宗廟亡矣,魂魄喪矣,歸何黨矣。』故將有死之心,士卒無生之氣。今將軍東有掖邑之封,西有淄上之寶,金銀黃帶,馳騁乎淄澠之間,是以樂生而惡死也。」田將軍明日結髮,徑立矢石之所,乃引枹而鼓之,翟人下之。故將軍者,士之心也,士者將之枝體也,心猶與則枝體不用,田將軍之謂乎!


 田單이 齊나라 상장군이 되어 십만의 군사를 일으켜 翟을 공격하려고할 때, 魯仲連子를 뵈었다. 중연자가 말했다.

 "장군이 적을 공격해도 반드시 이기지 못할 것이오."

 전장군이 말했다.

 "제가 일찍이 5리 밖에 안 되는 성(城;내성)과 10리쯤 되는 곽(郭;외성)을 가지고 제나라를 수복하였는데, 어찌 적을 이기지 못한단 말이오."

 그러고는 떠나면서 수레에 올라 다시 말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전단이 결심하고 적을 공격했으나 석 달 동안 이기지 못하니, 제나라의 어린아이들이 노래를 불렀다.

"키(箕)처럼 큰 관을 쓰고 긴 창으로 턱만 괴고 있네. 적을 공격하나 이기지 못하여 오구에 군사의 시체만 쌓이네."

 이에 전장군은 두렵고 놀라 중연자를 찾아가 뵙고 말했다.

 "선생은 제가 적나라를 공격하여도 능히 항복시키지 못할 줄울  어떻게 아셨습니까?" 

 중연자가 설명해주었다.

 "장군이 즉묵에서 싸울 때에는 앉으면 삼태기를 짜고 서면 삽을 잡고서 병사들에게 솔선수범하여 '종묘가 망하고 조상의 혼백을 잃었으니, 어디로 돌아가랴.'라고 독려하였소. 그 때문에 장수들은 목숨을 바치려는 각오가 있었고 병사들은 구차히 살려는 태도가 없었소. 그랬는데 지금 장군은 동쪽에는 액읍의 봉지가 있고, 서쪽에는 치수 가의 보물이 있으며, 황금으로 장식한 띠를 두르고 치수와 면수 사이를 마음대로 달리고 있소. 이 때문에 사는 것을 즐거워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고 있소."

  그러자 전장군은 이튿날 머리를 묶고 화살과 돌이 날아오는 곳에 똑바로 서서 곧장 북채를 잡고 북을 치며 공격하니, 적인이 항복하였다. 그러므로 장군은 병사들의 마음이고 병사들은 장군의 사지와 같은 격이다. 마음이 머뭇거리면 사지가 말을 듣지 않으니, 전장군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說苑 卷15 指武9

晉智伯伐鄭,齊田恒救之,有登蓋必身立焉,車徒有不進者必令助之。壘合而後敢處,井灶成而後敢食。智伯曰:「吾聞田恒新得國而愛其民,內同其財,外同其勤勞,治軍若此,其得眾也,不可待也。」乃去之耳。


 智伯이 鄭나라를 토벌하니, 나라 田恒이 구원하였다. 〈전항〉은 비옷을 입고 꼭 친히 서서 전차와 보병이 전진하지 못하면 반드시 돕게 하였으며, 보루가 완공된 뒤에야 감히 거쳐하고 우물과 부엌이 완성된 뒤에야 감히 밥을 먹었다. 지백이 말했다.

 "내가 듣건데, 전항이 이제 막 국정을 장악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안으로는 백성들과 재물을 나누어 쓰고 밖으로는 병사들과 노고를 함께한다고 한다. 군대를 이와같이 다스리면 민중의 마음을 얻을 것이니, 대적할 수가 없다."

 그러고는 마침내 철수하여 떠났다.

 

《說苑 卷15 指武10

太公兵法曰:「致慈愛之心,立武威之戰,以畢其眾;練其精銳,砥礪其節,以高其氣。分為五選,異其旗章,勿使冒亂;堅其行陣,連其什伍,以禁淫非。」壘陳之次,車騎之處,勒兵之勢,軍之法令,賞罰之數。使士赴火蹈刃,陷陣取將,死不旋踵者,多異於今之將也。

 

 《太公병법》에 말했다.

 "장수는 자애로운 마음을 다하고 무력의 위세로 싸울 의지를 세워 모든 군대를 지휘하며, 정예군을 훈련시키고 지절을 갈고 닦아서 사기를 고양시키며, 군대를 나누어 다섯 줄로 만들고 기치를 다르게 하여 서로 혼란하게 하지 말며, 대오와 행진을 견고하게 하고 什伍를 연좌시켜 잘못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해야 된다."
《太公병법》에 진영의 순서와 車騎의 안배와 군대를 지휘하는 권세와 군대의 법령과 상벌의 등급으로 병사를 불속에 뛰어들게 하고 칼날을 밟으면서 적진을 함락시키고 장수를 잡게 하여도 죽었으면 죽었지 발길을 돌리지 않게 한 것은 지금의 장수와 많이 다르다.

 

 

《說苑 卷15 指武11貧無車馬,常步,與走卒起居/호건은 수레가 없어 항상 걸어다니며 병사들과 같이 생활하다.

 

孝昭皇帝時,北軍監御史為姦.穿北門垣以為賈區。胡建守北軍尉,貧無車馬,常步,與走卒起居,所以慰愛走卒甚厚。建欲誅監御史,乃約其走卒曰:「我欲與公有所誅,吾言取之則取之;斬之則斬之。」於是當選士馬日,護軍諸校列坐堂皇上,監御史亦坐。建從走卒趨至堂下拜謁,因上堂,走卒皆上,建跪指監御史曰:「取彼。」走卒前拽下堂。建曰:「斬之。」遂斬監御史,護軍及諸校皆愕驚,不知所以。建亦已有成奏在其懷。遂上奏以聞,曰:「臣聞軍法立武以威眾,誅惡以禁邪。今北軍監御史公穿軍垣以求賈利,買賣以與士市,不立剛武之心,勇猛之意,以率先士大夫,尤失理不公。臣聞黃帝理法曰:『壘壁已具,行不由路,謂之姦人,姦人者殺。』臣謹以斬之,昧死以聞。」制曰:「《司馬法》曰:『國容不入軍,軍容不入國也。』建有何疑焉?」建由是名興,後至渭城令,死。至今渭城有其祠


 孝昭皇帝 시절에 北軍 監御史가 법에 어긋난 행위를 하여 북문의 담장을 뚫어서 물건을 매매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호건이 북군위로 근무하면서 가난하여 거마가 없어 항상 걸어다니며 사졸들과 생활하였다. 이 때문에 사졸들을 위로하고 사랑함이 매우 두터웠다. 호건이 감어사를 주살하려고 마침내 사졸들과 약속하여 말했다.

 "나는 그대들과 주살할 사람이 있으니, 내가 잡으라고 하면 잡고, 내가 참수하라고 하면 참수하라."

 이에 병마를 선발하는 날에 호군과 여러 교위들이 당 위에 벌여 앉았고 감어사도 앉아 있었다. 호건이 사졸들을 따라. 빠른걸음으로 당 아래에 이르러 배알하고 이어 당에 오르니 사졸들도 모두 올라왔다. 호건이 무릎을 꿇고 감어사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저자를 잡아라." 하니, 사졸들이 앞으로 나와 그를 끌고 당 아래로 내려갔다. 호건이 말하기를 "참수하라." 하니, 마침내 감어사를 참수하였다. 호군과 여러 교위들이 모두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호건은 또한 이미 작성한 상주문을 품속에 지니고 있다가 마침내 상주문을 올려 보고하였다.

 "신은 들으니, 군법에 무위를 세워 군대에 위엄을 보이고 악한 사람을 주살하여 사악한 행위를 금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북군 감어사는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기 위해 공공연히 군영의 담을 뚫어 사사로이 군사들과 물건을 거래하여, 강한 무용의 정신과 용감한 의지를 세워서 대장부들이 솔선하지 않으니, 더욱 불합리하고 불공정합니다. 신은 들으니, 《黃帝理法》에 '군영의 성벽이 이미 완비되었는데 규정된 길을 따라 다니지 않으면 이런 이를 사악한 사람이라고 이르니,  사악한 사람은 죽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이런 사람을 참수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보고합니다."

 황제가 批答을 내렸다.

 "《司馬法》에 '나라의 제도와 의절은 군대에 적용하지 않고, 군대의 제도와 의절은 나라에 적용하지 않는다.'라 하였는데, 호건은 무엇을 의심하는가?"

 호건이 이 일 때문에 이름을 떨쳐서 뒤에 渭城令에 이르러 임소에서 죽었는데, 지금까지 위성에 그의 사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