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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원의 뇌물수수

solpee 2016. 8. 9. 05:10

조선시대 관원의 뇌물수수

 

卞九祥嘗爲水原敎官, 有一朝官奉使至, 貪黷無厭. 於廣坐中求靴材, 卞大言曰:“君面上有九牛皮靴材.” 今人嗜官如赴家, 黷貨如飮渴, 苟可以貨也, 不問其來之當否, 原其本情, 與盜賊何別?
- 正祖(1752~1800), 『弘齋全書 권134 故寔6』

卞九祥이 전에 水原敎官으로 있을 때 한 조정 관원이 使命을 받들고 왔는데 탐욕스럽기가 그지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있는 자리에서 가죽신 만들 재료를 요구하니, 변구상이 큰 소리로 “당신 面上에 소 아홉 마리 분의 가죽신 재료가 있다.”고 하였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치 집으로 달려가듯이 벼슬을 좋아하고, 목마를 때 물을 마시듯이 재물을 탐하여, 참으로 재물을 불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온당하게 온 것인지 아닌지는 전혀 따지지 않으니, 그 심보를 따져 본다면 도적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윗글은 정조 때 신하인 金熙洛( 1761∼1803)이 왕에게 본받을 만한 옛날 고사를 아뢴 내용입니다. 중앙 관원이 공무차 지방에 내려와 대놓고 뇌물을 요구한 데 대해 세종 때 수원 교관으로 있던 변구상이 일침을 놓은 이야기입니다. 탐욕에 눈이 어두우면 낯가죽이 소 아홉 마리 분량만큼이나 두꺼워지나 봅니다.

 

   근래 우리나라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고위직의 비리 사건과 김영란법 시행을 앞둔 논란을 보며 조선에서였다면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어떻게 다스렸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날 賂物授受에 해당하는 죄를 조선에서는 ‘受贓罪’, 또는 ‘受賂罪’라고 하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사람이 재물을 주고받는 데는 그에 맞는 義理가 있으므로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을 취하면 이는 不義의 재물이 되는 것이라 여겼고 그렇게 해서 얻은 재물이라면 贓 또는 贓物로 취급하였습니다. 이런 관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라는 것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관원이나 吏典이 재물을 받으면 받은 贓物을 계산하여 처벌한다.……관원은 관직과 작위를 빼앗고 관원 명부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이전은 職役을 그만두게 하며, 모두 서용하지 않는다.[凡官吏受財者, 計贓科斷.……官追奪除名, 吏罷役, 俱不叙.]  『大明律 刑律 受贓 官吏受財』

 

   이것은 조선이 수용한 『대명률』 조문인데, 관원이든 이전이든 뇌물을 받으면 파면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뿐 아니라 받은 장물의 양을 합산하여 그에 따라 笞刑이나 杖刑의 처벌을 받으며, 장물이 많으면 최고 수위인 교수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습니다.(대명률 형률 수장 관리수재) 뇌물을 받으면 일단 그 직책에서 쫓아내고 받은 장물의 양에 따라 교수형까지 가능한 것에서, 중국이든 조선이든 관원의 부정부패에 대하여 오늘날보다 엄격하게 다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실제 뇌물을 받지는 않고, 받겠다는 의사 표시만 하여도 受贓罪로 처벌하였다는 것입니다. 또 법규를 어기고 뇌물을 받았는지, 법규는 어기지 않으면서 뇌물을 받았는지, 일이 다 끝난 뒤에 뇌물을 받았는지에 따라 枉法受賂, 不枉法受賂, 事後受賂로 나누어 처벌하였습니다.(대명률 형률 수장) 그리고 이들 죄인은 국가에서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릴 때도 사면 대상에 포함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續大典 刑典 赦令)

 

   뇌물을 받은 당사자만 엄격하게 처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에서는 관원들에게 신규 관원 대상자를 추천하게 하였는데, 만약 추천된 자가 재직 중에 뇌물을 받으면 추천한 자까지도 連坐되어 처벌을 받았습니다.(경국대전 吏典 薦擧)뇌물수수로 처벌받은 관원의 아들과 손자들은 의정부, 육조, 한성부,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장예원, 관찰사, 수령 등의 관직에 임명될 수 없었습니다.(경국대전 이전 京官職) 한마디로 그 집안에서 누군가 뇌물수수로 처벌받으면 가문 전체에서 공무원은 나올 수 없게 만든 시스템입니다.

 

   이쯤 되면 옛날이든 오늘날이든 법규가 없어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근래 淸廉이라는 말이 참 듣기 힘든 말이 되었습니다만, 그래도 간간이 따뜻한 美談이 들립니다. 어떤 고위 공무원은 외부의 식사 대접을 피하려 늘 도시락이나 구내식당을 이용한다는 일화라든가, 대법관을 지내다 퇴임한 분이 전관예우를 누릴 수 있는 변호사 개업을 마다하고 부인과 함께 작은 편의점을 운영한다는 소식 등을 접하면 아직 공직사회에 청렴한 기풍이 남아 있다고 생각되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청렴은 어찌 보면 ‘편협함’ ‘융통성 없음’ ‘고지식함’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인식에 不義가 비집고 들어갑니다. 이제 김희락이 정조에게 아뢴 또 다른 말로 청렴에 대한 저의 의견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相臣 黃喜政府의 모임에 갈 때 호조의 관원이 그가 추울까 걱정되어 율무죽을 드렸다. 그러자 황희가 “호조에서 어찌 재상의 아문에 음식을 지급하는가. 장차 論啓하여 정배시키겠다.” 하였다 합니다. 한 그릇 율무죽이 호조의 財用에 별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닌데도 이를 물리쳐 거절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정배하겠다고까지 말하였으니, 어찌 보면 지나치게 청렴한 것이고 어찌 보면 너무 편협한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임금을 보좌하여 나라를 경영하는 시초에는 이와 같이 기강을 세워야 합니다.[故相臣黃喜赴政府會, 度支官悶其寒, 以薏苡粥進. 喜曰:“度支豈支供宰相衙門? 將論啓定配也.”一盂薏苡, 在度支財用, 不足爲有無, 而揮之不足, 至有定配之語, 甲視之則傷於廉, 乙視之則近於隘. 然佐理經邦之初, 其立紀綱如此.]  『홍재전서 권134 고식6』

 

글쓴이김진옥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