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강(11/11)
1. 字學
☞. 山上靑松君子節 水中蓮花佳人香-出處不詳
山上靑松君子節 / 山위의 저 푸른 소나무는 君子의 절개요,
水中蓮葉佳人香 / 물 가운데 蓮잎은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로구나.
父不憂心因子孝 / 부모 마음에 근심 없으면 자식의 효도 때문이고
夫無煩惱是妻賢 / 남편이 煩惱함이 없음은 아내가 어질기 때문이다.
心不厭精, 手不忘熟, 若運用盡於精熟, 規矩闇於胸襟. - 書譜
마음은 정심세밀하게 손은 태만함이 없이 연습해야 한다. 양자가 서로 조화되어 운필이 숙달되고 서법은 서로 흉중에 있다는 상태에 이르면 붓은 자연히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紙上에 유유히 움직인다.
眞香心地芝蘭
至味書田菽粟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책방에서 먹는 공조밥
眞香心地芝蘭 / 진정 향기로운 것은 마음속의 지초와 란초 향.
書田菽粟皆真味 心地芝蘭有異香 .- 王杰(1725-1805),字伟人,号惺国,陕西韩城人.
☞.韓盧(獹)逐塊獅子咬人 -景德傳燈錄 卷十一 中에서
韓의 검은 개 獹는 흙덩이를 던지면 흙덩이를 물지만 사자는 흙덩이를 던진 사람을 문다.
【出典】
襄州王敬初常侍視事次, 米和尙至, 王公乃擧筆.
양주 왕경초 상시가 청사에서 일을 보고 있엇는데 미화상이 들어오자 공이 붓을 들어 보였다.
米曰, "還判得虛空否?" 公擲筆入廳, 更不復出.
미화상이 말하기를 "그런 것으로 虛空을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자 왕상시가 붓을 던져버린 뒤 청사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米致疑, 至明日憑鼓山供養主入探其意.
미화상이 의아하게 생각했는 데 다음 날이 되자 공양주 빙고산이 그 뜻을 알아보려고 들어갔다.
米亦隨之, 潛在屛蔽間偵伺.
미화상도 따라 들어가 몰레 엿들었다.
供養主才坐問曰. "昨日米和尙有甚麽言句, 便不相見?
공양주가 자리에 앉자마자 물엇다. "어제 미화상이 무엇이라 했기에 만나보지 않으셨습니까?"
公曰. "獅子咬入, 韓獹逐塊."
米聞此語, 卽省前謬.
미 화상은 즉시 깨달았다.
愛犬黃耳 - 陸機
狗兒畜己見生兒 / 강아지 길러 새끼 났는데
主是知從犬⑴是知 / 주인도 개도 따를 것을 알았다.
不願韓獹⑵逐狡塊 / 한로가 흙덩이 쫒듯 원하지 않았었지
只憐黃耳⑶報書遲 / 다만 어여쁜 황이의 답이 더딜 뿐.
⑴. 犬兎之爭 : 개가 토끼를 쫒아 산을 돌다가 개도 토끼도 지쳐 죽었다. 지나던 농부가 주워갔다는 고사로 제삼자가 이익을 봄을 뜻한다. . 漁夫之利, 蚌鷸之爭, 鷸蚌之爭.
⑵. 韓獹 : 韓나라의 검은 개 이름.
⑶. 黃耳 : 晉 陸機의 愛犬名. 竹筩에 편지를 넣어 목에 걸고 천리를 달려 陸機의 고향 吳都까지 전하고 답장을 받아 洛陽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한다.
2. 書論
☞. 至如初學分布, 但求平正, 旣知平正, 務追險絶, 旣能險絶, 復歸平正. -孫過庭 書譜에서
만약 처음 분포를 배움에 이르러서는 단지 평정함만 구하고, 이미 평정을 알았으면 힘써 험절함을 추구하여야 한다. 이미 험절할 수 있으면 다시 평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有簡架結構八十餘格, 不從此入 妄點一 盲施一波 如近日俗匠 顚倒猖狂 俱是惡札耳 - 秋史 書論에서
"간가 결구는 80여 법칙이 있는데 이로부터 쫓아 들어가지 않으면 정신 없이 한 획을 긋고 눈감고 한 삐침을 쓰는 것이다. 근일 속된 글씨장이 들이 뒤죽박죽 미처 날뛰어 모두 못 쓸 글씨가 될 뿐이다." 라고 하였다.
3. 體本
☞.藝道無涯
☞.物極必反[wù jí bì fǎn]
사물의 발전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反轉한다.
당의 궁녀로서 두 명의 황제(太宗, 高宗)를 섬겼고, 일개 궁녀에서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두 명의 황제(中宗, 睿宗)를 낳았고, 스스로는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가 된 則天武后는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지닌 여걸 중의 여걸로 원명은 武照다.
원래 태종의 후궁이었던 그녀는 태종이 병이 든 후 황태자 李治(후의 고종)와 서로 연모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태종이 죽자 感業寺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후사를 보지 못한 궁녀는 자기가 모시던 황제가 죽으면 궁에서 나가 절이나 도량에 들어야 한다는 규정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이 후궁 蕭淑妃를 총애하자, 왕황후는 무조를 이용해 고종과 소숙비 사이를 갈라놓을 생각으로 비구니가 된 무조를 환속시키고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궁중으로 돌아온 무조는 고종과 왕황후의 사랑과 신임을 받아 昭儀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왕황후와 한편이 되어 소숙비를 모함하여 유폐시킨 후, 음모를 꾸며 왕황후까지 몰아내고 황후가 되었다. 황후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세력 구축에 열을 올리는 한편, 고종과 함께 수렴정치를 하면서 정치에 깊이 개입했다. 고종이 죽고 중종이 즉위하자 섭정을 하였으며, 마침내는 중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고는 나라 이름도 周로 바꾸고 스스로 神聖皇帝라 칭했다. 측천무후는 690년부터 705년까지 15년 동안 황제의 자리를 지켰는데,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기간은 황후가 된 655년부터 치자면 무려 50년이나 된다.
측천무후는 고종이 죽고 어린 중종이 즉위하자 섭정을 했는데, 중종이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섭정을 그만두지 않았다. 대신들은 이에 대해 불만을 갖고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그 중 대신 蘇安桓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이제 태자를 생각해 보면 나이 적지 않고 재덕도 갖추고 있는데, 폐하께서는 황제의 보위를 탐하여 모자지간의 정을 잊고 계십니다. ······ 폐하께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얼굴로 唐 왕조의 종묘를 뵐 것이며, 무슨 고명으로 대제의 능묘를 알현할 것입니까. 폐하께서는 무슨 까닭에 밤낮으로 근심을 쌓으시며 이미 새벽종이 울리고 물시계의 물이 다 떨어진 것(나이 먹고 힘은 달려 말년이 가까웠음)을 모르십니까? 신이 알기로는 하늘의 뜻과 백성의 마음은 모두 李氏에게 돌아갔습니다. 무후께서는 편안하게 황제의 자리에 계시지만,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하고, 그릇도 가득 차면 넘친다는 도리를 모르고 계십니다. 옛말에 “마땅히 끊어야 할 때 끊지 않으면 그 혼란을 입게 된다.”고 했는데 바로 이를 이르는 말입니다.(當今太子追回, 年德俱盛, 陛下貪其寶位而忘母子深恩, ······ 惟陛下思之, 將何聖顔以見唐家宗廟, 將何誥命以謁大帝墳陵. 陛下何故日夜積憂, 不知鐘鳴漏盡. 臣以爲天心人事, 還歸李家. 陛下雖安天位, 殊不知物極必反, 器滿則傾. 故語曰, 當斷不斷, 將受其亂. 此之謂也.)」
이 이야기는 《新唐書 〈蘇安桓傳〉》에 나온다. ‘물극필반’의 전고는 《예기》, 《여씨춘추》, 《갈관자》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릇이 가득 차면 기울게 되고, 뜻이 가득 차면 뒤집히게 된다.(器滿則傾, 志滿則覆.)」(《禮記 〈曲禮〉》)
「온전해지면 반드시 이지러지고, 극에 달하면 반드시 뒤집힌다.(全則必缺, 極則必反.)」(《呂氏春秋 〈博志〉》)
「사물이 극에 달하면 뒤집히게 되니 이를 환류라고 한다.(物極則反, 命曰環流.)」(《鶡冠子 〈環流〉》)
道家哲学。指事物发展到极端,会向相反方向转化。
☞. 傲岸泉石 咀嚼書(文)義 - 劉勰의 文心雕龍에서
샘이 솟는 바위 언덕에 오연하게 서서 書(文)의 뜻을 곱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