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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羲之傳論

solpee 2015. 10. 16. 04:57

 

王羲之傳論-李世民

 

 

서계의 흥기는 아득한 옛날부터 시작되었으나, 결승의 문채와 새의 발자국은 보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말기에는 소박함을 버리고 화려함으로 돌아가서 종이를 펼치고 붓으로 점을 찍어 서로가 다투어 과시하고 높여서 그것의 공교하고 졸함을 겨루었다.

장지 서예의 묘는 남은 자취를 회복하지 못하였으나, 사의관의 휘장을 매단 기이함은 드물게 남은 자취가 있었다. 종요와 왕희지에 이르러서 굴복하였으니, 대략 그것을 말할 수 있다.

종요는 비록 당시에 아름답다고 찬사를 받고, 또한 월등히 뛰어났지만, 지극한 아름다움을 논함에는 혹 의심하는 바가 있었다. 가늘고 농염한 것을 포치하고 성글고 조밀함을 분간함에 이르러서는, 노을이 퍼지고, 구름이 말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이의를 제기하는 바가 없었다. 다만 그 형체가 예스럽고 지금과 같지 않으며, 자형은 길어서, 법도를 벗어났으니, 대략을 말하면 그것을 허물로 여겼다.

왕헌지는 비록 아버지의 풍격이 있었으나, 특별히 새로운 공교함은 아니었다. 글자 형세의 성글고 파리함을 보면, 마치 추운 겨울의 마른 나무와 같고, 붓 자취의 구속됨을 보면, 마치 엄한 집안의 굶주린 노예와 같다. 마른 나무는 비록 큰 나무의 그루터기일지라도 구부리거나 펴지 못한다. 굶주린 노예는 곧 굴레가 약해도 방종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를 겸하는 것이 진실로 필묵의 병폐로구나.

소자운은 근세에 강표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겨우 글씨를 이룰 수 있었으나, 장부의 기개가 없어서, 행마다 봄 지렁이가 얽힌 것과 같고, 글자마다 가을 뱀이 얽힌 것과 같았다. 왕몽이 종이에 눕고, 서언이 붓 아래에 앉은 것과 같이, 비록 천 자루의 토끼털 붓이 모지라질지라도, 모아도 터럭 하나의 근력이 없고, 수많은 계곡의 나무껍질을 다 모아도 거둠에 절반의 골력이 없었다.

이로써 아름다움을 퍼뜨린 것이 이름을 함부로 한 것이 아닌가? 이 몇 사람은 모두 명예가 실제를 뛰어넘었다. 그러므로 고금을 상세히 살펴서 비에 쓰인 전서와 비단에 쓰인 글씨들을 연마하고 정진하여 지극히 좋고 지극히 아름다운 것은 오직 왕희지뿐이로구나. 점과 끄는 필획의 공교함을 보면, 마름질하여 완성한 묘함이 있어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슬이 맺히니, 형상은 끊어진 것 같으나 또한 이어져 봉황이 날아오르고 용이 서린 것 같으며, 형세는 기울어진 것 같으나 오히려 곧다. 이것을 감상하면 권태로움을 느끼지 않고, 이것을 보면 그 단서를 알지 못한다. 마음으로 따르고, 손으로 추구하는 것은 이 사람일 뿐이다. 나머지 변변치 않은 것들을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書契之興, 肇乎中古, 繩文鳥迹, 不足可觀. 末代去朴歸華, 舒箋點翰, 爭相誇尙, 競其工拙. 伯英臨池之妙, 無復餘踪, 師宜懸帳之奇1), 罕有遺迹. 逮乎鍾王以降, 略可言焉. 鍾雖擅美一時, 亦爲逈絶, 論其盡善, 或有所疑. 至于布纖濃, 分疏密, 霞舒雲卷, 無所間然. 但其體則古而不今, 字則長而逾制, 語其大量, 以此爲瑕. 獻之雖有父風, 殊非新巧. 觀其字勢疏瘦, 如隆冬之枯樹, 覽其筆踪拘束, 若嚴家之餓隸. 其枯樹也, 雖槎而無屈伸, 其餓隸也, 則羈羸而不放縱. 兼斯二者, 固翰墨之病歟. 子云2)近世擅明江表3), 然僅得成書, 無丈夫之氣, 行行若縈春蚓, 字字如綰秋蛇, 臥王濛4)于紙中, 坐徐偃5)于筆下, 雖禿千兎之翰, 聚無一毫之筋, 窮萬谷之皮, 斂無半分之骨. 以玆播美, 非其濫名耶. 此數子者, 皆譽過其實. 所以詳察古今, 硏精篆素, 盡善盡美, 其惟王逸少乎. 觀其點曳之工, 裁成之妙, 烟霏露結, 狀若斷而還連, 鳳翥龍蟠, 勢如斜而反直. 玩之不覺爲倦, 覽之莫識其端. 心慕手追, 此人而已. 其餘區區之類, 何足論哉].




1) 조조는 사의관의 글씨를 좋아하여, 항상 그에게 글씨를 쓰도록 하고, 족자로 만들어 장막에 걸어두고 종일 감상을 하였다.


 

2) 蕭子雲(公元 486-548)은 자가 景喬이고, 蘭陵 사람이다. 양무제 때 여러 차례 관직이 國子祭酒에 이르러서, 사람들이 ‘蕭祭酒’라고 불렀다.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초서와 예서, 비백이 뛰어나, 이름이 당시에 알려졌고, 조정에 천거되어 그를 본받았다. 양무제는 소자운의 글씨를 중히 여겨,「古今書人優劣評」에서 그의 글씨를 “마치 위태로운 산봉우리에 있는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가 해를 가리는 것과 같다. 형가가 검을 지고, 장사가 활을 당기며, 웅건한 사람이 범을 잡는 것과 같이 마음과 가슴이 사납고 매서워 필봉의 칼날을 당해내기 어렵다. [如危峰沮日, 孤松一枝. 荊軻負劍, 壯士彎弓, 雄人獵虎, 心胸猛烈, 鋒刃難當].”라고 하였다. 당나라 장회관은 「書斷」에서 소자운의 예서와 비백을 묘품에 들이고, 소전과 행서, 장초와 초서를 능품으로 두고 이르기를, “소자운은 여러 서체를 겸비하고, 소전과 비백을 창조하였으며, 의취가 표일하고, 점과 획 사이에 마치 날아오르는 것과 같이 예쁘고 묘함이 지극하여 더불어 비견하기에 어려움이 있으나, 다만, 옛 풍격은 조금 부족하다[子雲諸體兼備, 而創造小篆飛白, 意趣飄然, 點畵之際, 有若鶱擧, 姸妙至極, 難與比肩, 但少乏古風].”라고 하였다. 이세민은 「王羲之傳論」에서 소자운을 일러, “겨우 글씨를 이룰 수 있었으나, 장부의 기개가 없다[僅得成書, 無丈夫之氣].”라고 하였으니, 뜻이 여러 서예가들을 무시하고, 유독 왕희지를 높이는 데 있어서 가르침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3) 江表는 남조의 宋ㆍ齊ㆍ梁ㆍ陳과 그 통치 아래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4) 王濛(公元 309-347)은 자가 仲祖이고, 어릴 때의 자는 阿奴로, 太原 晉陽 사람이다. 관직이 司徒左長史에 이르렀으며, 글씨를 잘 썼다. 남조 왕승건은「論書」에서, “왕몽의 글씨는 유익과 비교할 수 있다[王濛書, 亦可比庾翼].”라고 했고, 당나라 장회관은 「書斷」에서 왕몽의 장초와 예서를 능품에 들어간다고 열거하고 이르기를 “예서를 잘 쓰고, 종요를 법 삼아서 형상은 비슷하지만, 근골이 갖추어지지 않았다.[善隸書, 法于鍾氏, 狀貌似而筋骨不備].”라고 하였다.


 

5) 徐偃은 한무제 때의 박사로, 사람들은 특히 골력과 기운이 없다고 여겼다. 송나라 황정견의 시에 이르기를, “장정은 헛되이 드러남이 있으나, 서언은 원래 골력이 없다[張鼎徒有表, 徐偃原無骨].”라고 하였다.

 

李世民《王羲之传论》原文和译文

李世民简介和解题:

李世民(五九九年——六四九年),即唐太宗高祖李渊次子。六二六年——六四九年在位。末时劝父起兵,推翻王朝。曾镇压窦建德等农民起义军和消灭各地割剧势力。李渊即帝位,封李世民为秦王。武德九年,发动“玄武门之变”,得立为太子。即位后,任贤纳谏,励精图治,史称“贞观之治”。兼通文学,在书法上也有一定成就,其所书《晋祠铭》,首创行书勒碑。朱长文《续书断》列其书为妙品,并云:“翰墨所挥,遒劲研逸,鸾凤飞翥,虬龙腾跃,妙之最者也”。传世书迹有《晋祠铭》、《温泉铭》和《屏风帖》等。

李世民传世的论书著述有《笔法诀》、《论书》、《指意》和《王羲之传论》。其中,王羲之传论》李世民为《晋书·王羲之传》写的一篇赞辞,历数各家书法之短,独赞王羲之曰:“详察古今,研精篆素,尽善尽美,其惟王逸少乎。”封建帝王为书家亲撰传论,这是十分罕见的。经李世民大力提倡,王羲之书成为书法正宗,造成了有唐一代尊王的书风,对后世书法的发展影响甚大。此文亦有题作《书〈王羲之传〉后》的。

 

 
原文:

书契之兴,肇乎中古,绳文鸟迹,不足可观。末代去朴归华,舒笺点翰,争相夸尚,竞其工拙。伯英临池之妙,无复余踪;师宜悬帐之奇,罕有遗迹。逮乎以降,略可言焉。虽擅美一时,亦为迥绝,论其尽善,或有所疑。至於布纤浓,分疏密,霞舒云卷,无所间然。但其体则古而不今,字则长而逾制,语其大量以此为瑕。献之虽有父风,殊非新巧。观其字势疏瘦,如隆冬之枯树;览其笔踪拘束,若严家之饿隶

其枯树也虽槎枿而无屈伸;其饿隶也,则羁羸而不放纵。兼斯二者,固翰墨之病欤!子云近世擅名表,然仅得成书,无丈夫之气。行行若萦春蚓,字字如绾秋蛇,卧王濛於纸中,坐徐偃於笔下。虽秃千兔之翰,聚无一毫之筋;穷万谷之皮,敛无半分之骨。以兹播美,非其滥名邪?此数子者,皆誉过其实。所以详察古今,研精篆、素,尽善尽美,其惟王逸少乎!观其点曳之工,裁成之妙,烟霏露结,状若断而还连;凤翥龙蟠,势如斜而反直。玩之不觉为倦,览之莫识其端。心慕手追,此人而已;其余区区之类,何足论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