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船子和尚偈

solpee 2014. 8. 5. 08:42

 

船子和尚偈

 

千尺絲綸直下垂 / 천척 낚시 줄 곧게 드리우자

一波縡動萬波隨 / 한 물결 이니 만파가 밀려오네

夜靜水寒魚不食 /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니 입질도 없어

滿船空載月明歸 / 밝은 달빛 가득 싣고 빈 배로 돌아오네

 

【作者】德诚(?一860),唐禅僧,遂宁(今属四川)人。节操高邈,度量不群。印心于药山惟严,与道吾、云岩为同道交。离药山后,至秀州(今浙江嘉兴县)华亭吴江畔,泛一小舟,接四方往来之人,随缘度日,时人号其船子和尚。据《五灯会元》,道吾曾指示夹山问道于华亭船子和尚,待夹山豁然有悟而离去之后,船子德诚乃“覆船入水而逝”。

 

 

千尺丝纶直下垂,

一波才动万波随。
夜静水寒鱼不食,
 

 

满船空载明月归。

【正宫】六幺令

【朝代】:元代

【作者】:吕侍中

【原文】:华亭江上,烟淡淡草萋萋,浮光万顷。长篙短棹一蓑衣,终日向船头上稳坐,来往故人稀。纶竿收罢,轻抛香饵,个中消息有谁知?

【幺】说破真如妙理,唯恐露玄机。春夏秋冬,披星带月守寒溪。一点残星照水,上下接光辉。素波如练,东流不住,锦鳞不遇又空回。

【尾】谩伤嗟,空劳力,欲说谁明此理?千尺丝纶直下垂,一波动万波相随。唱道难晓幽微,且恁陶陶度浮世。水寒烟冷,小鱼儿难钓,满船空载月明归。


 張網

 

아세아문화사에서 펴낸 '梵魚寺誌'를 읽는데 마지막 면에 인장이 한 과 찍혀 있고 옆에 葦滄 吳世昌(1864~1953) 선생의 글이 적혀 있었다. 사연이 자못 흥미로웠다.

범어사 부근에 원효 스님의 遺址가 있었다. 1936년 이곳에 공사를 하면서 땅을 파다가 두 길 깊이에서 해묵은 玉印 하나가 출토됐다. 본래 鐵盒에 넣었던 것인데 오랜 세월에 합은 다 삭고 옥인만 남은 상태였다. 인장에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크게 가르침의 그물을 펼쳐 人天의 물고기를 낚는다(張大敎網 漉人天之魚)." 가르침의 그물을 크게 펼쳐 迷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을 모두 濟度하라는 뜻이다.

원효의 천년 성지 땅속 깊은 곳에서 쇠로 만든 상자가 다 삭아내려 흔적도 찾기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옥인은 그 모습을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중생 제도의 서원은 삭지도 않고 삭을 수도 없었던 것일까?

그해 白龍城(1864~1940) 스님은 東山(1890~1965) 스님에게 계맥을 전수하는 正傳玉帖에서 "해동 初祖의 寶印을 正法眼藏의 신표로 주노니 잘 지녀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며 이 옥인을 내렸다. 동산은 이를 허리에 차고 한시도 몸에서 떼지 않았다 한다. 동산 스님이 서울에 왔다가 속가의 고모부인 위창 선생을 찾아 가 옥인을 지니게 된 내력을 들려주었다. 위창은 감탄하며 그 옥인에 인주를 듬뿍 묻힌 후 정성스레 자신의 印箋紙에 찍었다. 그리고 전후 사연을 적어 두 구절의 시와 함께 써 주었다. "옥돌이 삭지 않아 魚寶를 받쳐내니, 허리에 찬 작은 인장 천년의 攷驗일세(土花不蝕漉魚寶 腰間小鑈爾千年攷)."

동산 스님은 옥인을 찬 채 '서리 솔의 맑은 절조, 물 위 달의 텅 빈 마음(霜松潔操 水月虛襟)' 같은 맵고 맑은 정신으로 성철 스님 같은 근세의 선지식들을 무수히 길러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愴然涕下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현제명 선생 작사 작곡 '고향 생각'의 1절 가사다. 저물어도 마실 오는 친구 하나 없다. 초저녁부터 허공의 흰 달을 올려다보니 외로움이 바다 같다. 타지의 초라한 거처에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 막막한 생계 걱정과 앞날 근심만 하염없다.

늦은 밤 연구실을 나와 환한 달빛을 보며 걷다가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두운 길 위로 그 처연했을 심사가 엄습해와 툇마루에 나와 앉아 하늘 보며 흘리던 그 눈물을 떠올렸다. 인터넷이나 전화가 없던 그 시절에는 그리움도 막막함도 지금과는 농도가 애초에 달랐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국의 陳子昻(659~700)은 "천지의 유유함을 생각하자니, 홀로 구슬퍼져 눈물 흐른다(念天地之悠悠, 獨愴然而涕下)"고 노래했다. 천지는 인간 세상의 모든 감정을 다 머금고 유유히 흘러간다. 차고 넘치거나 일렁임 없는 유장한 흐름이다. 이를 마주해 그 앞에 선 인간의 나약함이 급기야 서글픈 눈물로 맺혀 떨어지더라는 얘기다. 슬픔조차 유장하다.

삶의 속도는 느려터지고 팍팍한 생활고에 배고파 힘들었을망정 오가는 마음만큼은 간절하고 안타까웠다. 단추 몇 개만 누르면 바다 건너 가족 얼굴이 화면에 뜨고, 모든 정보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이 편한 세상에서는 떠올리기 힘든 감정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치약 하나를 다 짜서 먹이고 급기야 때려죽이기까지 하는 것이 요즘 군대다. 고일 틈 없이 소비되는 감정에 길들어 사람 목숨도 게임의 리셋 버튼 누르듯 할 수 있다고 믿은 걸까? 속도의 시대가 낳은 젊은 괴물들의 흉포함을 어찌해야 옳은가? 자리보전에 급급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덮기 바쁜 이들의 행태도 밉다.

2절 가사는 이렇다. "고향 하늘 쳐다보니 별 떨기만 반짝거려.… 저 달도 서쪽 산을 다 넘어가건만, 단잠 못 이뤄 애를 쓰니 이 밤을 어이해."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들의 불면도 자꾸 깊어져만 간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登幽州臺歌

                                       陳子昻( 661-702 初唐의 시인)

 

前不見古人 / 사람은 만날 수가 없고

後不見來者 / 뒷 사람도 만나지 못하네
念天地之悠悠 / 천지의 유유함을 생각하니

獨愴然而涕下 / 외롭고도 슬퍼 눈물만 흐른다네.

 

登幽州台歌
【唐】陈子昂
前不见古人,
后不见来者。
念天地之悠悠,
独怆然而涕下。

【译文】
前不见圣贤之君,后不见贤明之主。想起天地茫茫悠悠无限,不觉悲伤地流下眼泪。

【作者简介】:陈子昂(661-702)字伯玉。少任侠。其诗标举汉魏风骨,强调兴寄,反对柔靡之风,是唐代诗歌革新的先驱。有《陈子昂集》。
【注释】:幽州台:又称燕台,史传为燕昭王为招揽人才所筑的黄金台,故址在今北京市大兴县。悠悠:无穷无尽的意思。怆然:悲痛伤感的样子。涕:眼泪。
【赏析】 公元696年,契丹攻陷了营州,陈子昂奉命出征,带兵的将领是个草包,接连打了几次败仗,陈子昂提了很多建议,也未被采纳,眼看着报国的良策无法实现。有一天他登上了幽州台,想起了战国时广招天下的燕昭王,悲愤之极,写下了这首《登幽州台歌》。诗人俯仰古今,深感人生短暂,宇宙无限,不觉中流下热泪。这是诗人空怀抱国为民之心不得施展的呐喊。细细读来,悲壮苍凉之气油然而生,而长短不齐的句法,抑扬变化的音节,更增添了艺术感染力。

【背景】:

武则天万岁通天元年(696),契丹李尽忠、孙万荣等攻陷营州。武则天委派武攸宜率军征讨,陈子昂在武攸宜幕府担任参谋,随同出征。武为人轻率,少谋略。次年兵败,情况紧急,陈子昂请求遣万人作前驱以击敌,武不允。稍后,陈子昂又向武进言,不听,反把他降为军曹。诗人接连受到挫折,眼看报国宏愿成为泡影,因此登上蓟北楼(即幽州台,遗址在今北京市),慷慨悲吟,写下了《登幽州台歌》以及《蓟丘览古赠卢居士藏用七首》等诗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