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春分chūnfēn

solpee 2014. 3. 21. 06:01

오늘은 陽 甲午年 (陰 甲午年,桓紀9211,神紀5911,檀紀4347,西紀 2014) 陰 丁卯月(二月大) 21日 辛卯 金曜日 春分(01:57)節 初候 玄鳥至[현조지: 제비가 오기 시작한다]候 이자 海堂花風(행당화바람)이 부는 候입니다.

 

日出은 06:35, 日入은 18:44, 月出은 23:23, 月入은 09:04 입니다. 오늘 낮은 12시간 09분 21초 입니다.

 

宋彬彬의 懺悔錄, 그리고 文革

중국 비즈니스, 결국은 소통입니다. 싸구려 농민공을 고용해, 기계만 잘 돌리면 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중국 소비자와 직접 만나 소통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들과 공감의 자기장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각을, 철학을 공부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문혁을 얘기하는 이유입니다.
 
문혁은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바로 48년 전(1966) 터진 일이니까요. 아직까지도 중장년층 중국인들은 가슴에 문혁의 바윗덩이를 안고 살아갑니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쓰라린 고통을 안고 말입니다. 10년 동안이나 사회를 갈기갈기 찢어 놓고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갔던 문혁은 오늘의 중국인, 중국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듭니다.
 
*******
 
필자가 처음 중국 문화대혁명(문혁)을 접한 것은 1999년 말, 베이징 특파원으로 갖 부임했을 때다. 외교부에서 일하던 한 중국인 친구에게 '중국어 선생님을 구해달라'고 했고, 그가 추천한 분이 바로 전직 외교관리 출신의 왕(王)선생님이었다. 그의 경험담을 듣고서야 책에서나 보았던 문혁의 실상을 접할 수 있었다.
 
"문혁이 발발했을 때 난 외교부 초급 관리였지요. 영어를 좋아했습니다. 타임스나 뉴스위크지를 자주 봤지요.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자본주의 주구(走狗)'로 지목했고, 후배 대학교 호위병들에게 끌려다니며 묻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내 책상 속에 있던 영어잡지를 꺼내 불사르기도 했습니다.
 
1969년에는 '지식인 하방(下放·지방으로 가 노동에 종사)'정책에 따라 장시(江西)성의 한 벽지 시골로 내몰렸습니다. 거기서 2년 동안 돼지우리 옆 작은 방에서 돼지를 키우며 살아야 했지요.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왕 선생님의 경험담은 거기서 끝났다. '다 지난 일인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불안한 눈 빛이다. 문혁은 그렇게 중국인들의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진, 열어서는 안되는 판도라 상자였다. 문혁의 상처는 곪고 있었다.
 

문혁1.jpg


상처가 다 아물었던 것일까....중국인들이 조금씩 문혁을 말하기 시작했다. 일부 가해자들이 오랜 침묵을 깨고 '00에게 사과합니다'라는 공개 사과문을 발표한다. 가장 주목을 받는 '참회'의 주인공은 올해 67세 나이의 여성 송빈빈(宋彬彬)이다.
 
지난 1월 12일.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 20여 명이 베이징사범대부속중학교(사대부중)를 찾았다. 그들이 향한 곳은 교정 한 편에 서있는 볜중윈(卞仲耘)의 동상(銅像). 1960년대 중반 이 학교 부교장을 지낸 여인이다. 노인들은 그 동상 앞에 서 묵념했고, 일부는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닦기도 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송빈빈이었다.
 
"나는 볜 교장의 불행한 사건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볜 교장에 사죄의 뜻을 밝힙니다. 당시 학교 선생님들을 지키지 못한 점 평생의 상처요, 후회로 남습니다"
 
1500여 자에 달하는 송빈빈의 '참회록'의 일부다(왼쪽 묵념 사진의 가운데 송빈빈. 참회의 글 발표 장면).
 

문혁3.jpg


송빈빈, 그의 얘기는 48년 전으로 돌아간다. 1966년 여름, 사대부중은 혁명의 열기로 가득찼다. '사령부를 폭격하라'는 마오쩌둥의 반(反)우파 정치 투쟁은 학생들을 혁명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고위직 딸(아버지가 혁명 시기 공군 장군이었던 송런츙.宋任穷이다)이었던 송빈빈은 홍위병 간부 완장을 찼다. 친구를 고발하고, 학생이 교장을 비판하고, 심지어 아들이 아버지의 뺨을 때리는 시절이었다. 볜중윈 부교장은 홍위병들의 표적이 됐다. 홍위병들은 볜 부교장을 끌어내 이리저리 끌고다니며 구타했고, 그는 결국 8월 5일 허망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송빈빈은 홍위병 영웅이 된다. 10일 후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문혁 축하 백만인 대회'에 참가해 마오쩌둥과 만나기도 했다. 단상에서 마오에게 홍위병 완장을 달아준 학생이 바로 그였다. 단상에 오른 송빈빈과 마오쩌둥의 대화는 이랬다(광명일보 보도)
 
마오: 이름이 무엇인고?
송빈빈: 송빈빈입니다.
마오: '文質彬彬(소박하고 점잖다)'의 '彬'인가?
송빈빈: 예, 그렇습니다.
마오: 그러면 앞으로 '송야우(宋要武)'라고 해라
 
문혁4.jpg

 
'무장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홍위병이 무장을 시작한 바로 그 시기, 송빈빈은 그때부터 '무장 홍위병'의 대명사가 됐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홍위병의 모범이었다. 전국에서  '송야우' 앞으로 칭송 편지를 보내왔고, 그의 주변에는 항상 홍위병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 역시 문혁의 피해자였다. 1969년 들어 '주자파(走資派)의 딸'로 지목받아 박해를 받는 처지로 바뀌게 된다. 아버지 송런츙은 당시 동북지방 제1서기였으나, '동북의 제1주자파'로 몰렸다. 그것으로 홍위병 세월은 끝이었다. 송빈빈은 1969년 내몽고 벽지로 쫓겨가야 했고,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렸다. 그렇게 문혁은 모두가 가해자였고, 또 피해자였다.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10년 중국을 갈기갈기 찢어놨던 문혁은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 미국 보스턴 대학의 지구화학과 석사과정에 한 중국 유학생이 입학을 한다. '홍위병' 송빈빈이었다. 그는 혁명 간부의 자식이 아니라면 꿈도 꾸기 힘들 미국 유학 길에 오를 수 있었다. 보스턴대에서 석사과정을,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아직도 미국에서 과학자로 살고 있다. 홍위병의 미국 유학, 역사의 아이러니다.
 
미국에 살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도 했다.
 
"나는 볜 부교장 구타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홍위병들을 저지했다. 마오가 나에게 '송야우'라는 이름을 지어줬다는 기사는 광명일보 기자의 날조다. 나는 그 이름을 싫어했고, '송야우'앞으로 보내온 홍위병들의 편지는 한 통도 뜯어보지 않았다. 나 역시 문혁의 피해자다."
 


문혁5.jpg


이런 그가 지난 1월 12일 사대부중을 찾아 볜윈중의 동상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중국 언론들은 문혁과 관련된 수 많은 평론을 실었다. 송빈빈의 일생을 다루는 다규멘터리가 방영되고, 문혁을 주제로 한 좌담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식의 진상 보도도 있었다. 이제 상처를 보듬고, 화해를 해야 한다는 논조였다.
 
그러나 송빈빈의 참회가 세인의 관심에서 조금 멀어졌던 2월 1일 이같은 흐름에 반전이 일어난다. 볜중윈 교장의 남편인 왕징야오(王晶堯)의 성명이 계기였다.
 
"그의 참회는 거짓이다.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술책일 뿐이다. 진실 규명이 먼저다. 당시 사건의 전모가 명확하게 밝혀지기 전까지는 나는 그의 참회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사건의 주모자(策劃者)는 아직도 법의 테두리 밖에서 노닐 고 있다.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
 
송빈빈의 참회는 당사자로부터 거절당한 것이다. 문혁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건들면 건들 수록 덪나는 상처 말이다.
 
볜 교장의 남편 왕징야오가 지목한 '주모자'는 누굴까? 송빈빈일까? 아니다. 중국 사회는 지금 '왜 19살의 어린 소녀 송빈빈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광기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답을 요구하고 있다. 송빈빈 역시 역사의 피해자였을 뿐이니 말이다. 왕징야오는 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이제 국가가, 공산당이 답해야할 때라고 말한다. 중국 사회를 갈기갈기 찢어놨던 그 10년의 진상을 말이다. 그러나 당은 아직도 말이 없다. 잊혀지기 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혁을 청산하지 않으면 문혁과 같은 또 다른 동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지식인들의 외침은 공허하다.
 
문혁의 역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Woody Han
無敵漢/All friend 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