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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屋山丘

solpee 2013. 10. 18. 18:50

 

華屋山丘 (华屋山丘 )[huá wū shān qiū]

1) 흥망성쇠의 빠름  2) 급격히 쇠망하다

[華:빛날 화, 屋:집 옥, 山:메 산, 丘:언덕 구]

 호화로운 집이 산과 언덕으로 변한다는 뜻으로 상전벽해와 의미가 통하는 성어이다.

 

【동의어】

- 상전벽해((桑田碧海):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함.

- 창해상전(滄海桑田):푸른 바다가 뽕나무 밭으로 변함.

【출전】조식(曺植) : <공후인>

【고사】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조식(曺植)이 지은 <공후인>이라는 시에서 유래되었다.

   <공후인>이라는 제목은 '공후'라는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부른 노래(시)라는 뜻으로,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

   "살아서는 화려한 집에 머물더니, 죽어서는 산언덕에 돌아가네(生存華屋處, 零落歸山丘)"

라는 구절이 있다. 부귀영화를 누린 자도 죽어서는 한낱 산언덕에 묻히는 신세가 된다는 말로써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 시구는 <진서(晉書)>의 ‘사안전(謝安傳)’에 인용되었다. 사안은 동진(東晉)의 명재상으로, 그에게는 양담(羊曇)이라는 외조카가 있었다. 사안은 생전에 총명한 양담을 매우 사랑하였다. 사안이 죽은 뒤에 양담은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사안의 무덤을 보는 일조차 너무 마음이 아파서 일부러 무덤이 있는 서문(西門) 쪽으로는 다니지 않았다.

   어느 날, 양담은 술이 많이 취한 탓에 저도 모르게 서문으로 가게 되었다. 좌위의 사람들이,

   "여기는 서문입니다"

라고 말하자, 양담은 말채찍을 휘두르며,

   "살아서 화려한 집에 머물더니, 죽어서는 산언덕에 돌아가네."

라는 조식의 시구를 높이 읊조리고는 통곡하면서 가버렸다.

   여기서 유래하여 화옥산구(華屋山丘)는 인생의 덧없음을 뜻하게 되었다.

 

【解释】华屋,美丽的房屋;山丘,土山,此处指坟墓。人的奉命有限,宝贵的人也终于死亡。语本三国曹植《箜篌引》诗:“盛时不可再,百年忽我遒,生在华屋处,零落归山丘。[1]
【用法】作谓语、分句;比喻兴亡盛衰的迅速
【结构】紧缩式
【年代】古代
【英文】magnificen thouse has become amound of earth up sand downs
【相近词】华屋丘墟
【押韵词】铁画银钩、七魄悠悠、语不惊人死不休、唯食忘忧、水能载舟,亦能复舟、水则载舟,水则复舟、以乐慆忧、反水不收、一发而不可收、函盖充周

 

 《箜篌引》曹植

 

置酒高殿上,亲交从我游/치주고전상 친교종아유/높은 전각에 술상 차리고 친구들과 어울린다

中厨办丰膳,烹羊宰肥牛/중주판풍선 팽양재비우/부엌엔 풍성한 찬 만들고 양 삶고 살찐 소 잡는다
秦筝何慷慨,齐瑟和且柔/진쟁하강개 제슬화차유/진 아쟁은 애절하고 제 비판 부드럽다

阳阿奏奇舞,京洛出名讴/양아진기무 경락출명구/양아곡에 맞춰 멋진 춤추고 낙양의 유행가 부른다
乐饮过三爵,缓带倾庶羞/낙음과삼작 완대경서수/즐겁게 삼배를 넘기니 허리띠 풀고 안주를 즐긴다

主称千金寿,宾奉万年酬/주칭천금수 빈봉만년수/주인과 객들 서로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久要不可忘,薄终义所尤/구요불가망 박종의소우/오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야박하지 않는 것

谦谦君子德,磬折欲何求?/겸겸군자덕 향절욕하구/겸손은 군자지덕 내 무엇을 구하랴?
惊风飘白日,光景驰西流/경풍표백일 광경치서류/바람이 태양을 밀어 서쪽으로 달려 가네

盛时不再来,百年忽我遒/성시부재래 백년홀아주/좋은 시절 다시 오지 않고 백년도 홀연 지나네

生存华屋处,零落归山丘/생존화옥처영락귀산구/살아서 화려하더니 죽어서 산언덕에 묻히네
先民谁不死,知命复何忧?/선민수불사 지명부하우/앞선 자 누군들 죽지 않으리 다시 무엇을 근심하랴?

 

別東林寺僧(별동림사승) - 이백(李白)

 

東林送客處(동림송객처) : 동림에서 객을 보내는 곳

月出白猿啼(월출백원제) : 달뜨고 흰 잔나비 우네.

笑別廬山遠(소별려산원) : 웃으며 떠남에 여산이 멀어지니

何煩過虎溪(하번과호계) : 어찌 호계를 지나는 걸 꺼려하리오.

☞.‘백원첩(白猿帖)’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친필과 그것을 명나라 사행 때 가져온 포은 정몽주의 친필 발문(跋文), 그리고 팔공산 동화사에서 함께 모인 13인의 친필 단시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태조의 친필 시는 916년 원나라 장수 유덕양(劉悳梁)에게 써준 이태백의 시 두 편 가운데 하나인 ‘소사’(所思*別東林寺僧이 맞다*)로 정몽주가 400여년 뒤 명나라 사신으로 가 유덕양의 후손으로부터 얻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친필시 '소사'

所思(소사)

그리워 하다.

 

                                 杜甫(두보)

苦憶荊州醉司馬(고억형주취사마)하니

謫官樽酒定常開(적관준주정상개)라

九江日落醒何處(구강일락성하처)요?

一柱觀頭眠幾回(일주관두면기회)가?

可憐懷抱向人盡(가련회보향인진)하니

欲問平安無使來(욕문평안무사래)라

故憑錦水將雙淚(고빙금수장상루)하니

好過瞿塘灔澦堆(호과구당염여퇴)하라

 

형주의 술 취한 사마를 애써 생각하니

적관(좌천된 관리)의 술통은 항상 열려있구나

구강에 해 지면 어디에서 술을 깨며

일주관 위에선 몇 번을 졸았을꼬?

가련하게도 마음은 남을 향해 다하고

평안을 묻는 심부름꾼은 오지를 않구나

고로 비단물결에 맡겨 쌍루(두 눈의 눈물)를 보내니

구당협의 염여퇴를 잘 통과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