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熙載의 九問에 答하다

solpee 2012. 10. 20. 09:38

熙載의 九問에 答하다

(吳熙載가 스승 包世臣과 질의하고 답한 내용이다)

其一

 

熙; 묻겠습니다.지금까지 楷書에 대해서 그 우열을 논의할 경우에 전서,팔분의 붓 사용의 맛(遺意)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훌륭하다고 해왔습니다. 이 경우에 筆劃의 형이 닮아 있는 것으로써 그것을 증명해 왔습니다만 선생님께서 여기에 반론한 것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전서.팔분의 붓 사용이 해서 가운데 남아 있다고 한다해도 어디에서 그런 것을 알 수 있습니까?

 

臣; 전서에서 충분히 둥근 맛을 가진 붓사용을 하는데는 필봉의 중심이 필획의 중앙을 지나가게 하여야 하며 팔분의 재빠른 움직임(駿發)이 충분히 나타나게 하는데는 筆毫가 紙上에 平連되게 운필하여야만 한다.진서(唐隸)를 쓸 경우에는 墨을 적게 하여(摄墨) 필봉이 종이에 닿고 나서는 側筆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필봉에 충분히 묵을 적시지만 필봉의 주위 호가 중심을 싸넣어 버리지 않게하는 것이 팔분의 필법이다. 남는 묵이 점획의 주위에 넘처나오면(漲墨) 篆書가 가지는 맛이 가라앉고 側筆이 되어버리면 팔분이 지니는 맛이 엷어진다.

 

其二

熙; 샘은 항상 "초서를 쓰는데는 말할 것도 없이 그 방법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字形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만, 결국 무엇을 초서의 법칙이라 하는 지는 말씀하시 않았습니다.

 

臣; 손과정의 서보에 "眞書(隸)는 點畵을 形質로 하고 使轉(轉折등의 붓사용)을 性情으로 하지만, 초서는 點畵을 性情으로 하고 使轉을 形質로 한다."라 하여 참으로 초서의 서법을 잘 전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眞(隸)의 妙味가 使轉에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초서의 묘미가 점획의 형에 있는 것이어서 슬렁슬렁 흐르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초서의 서법이 전해지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왕헌지의 초서는 항상 붓이 轉換하고, 火著로써 灰에 글씨를 쓸 때와 같이 처음과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잘 바라보면 붓이 轉換하는 곳에서는 붓이 선 곳과 누운 곳과 강한 세가 급히 없어지는 곳(頓挫)을 한결같이 갖추고 있다. 왕헌지의 초서는 모든 점획에 세가 갖추어져 있어 필력이 충분하게 성숙되어 있음에 기인한다. 때문에 서보에서 '늘어지기만 하고 오그러지지 않는 게 아니고 가기만 하고 멈추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우선 형질이 되고 그리고 성정이 나타나는 것이다.

서보에 "일획 가운데서도 변화가 있어 필봉으로 일으키거나 뉘이거나(起伏) 하며 일점 가운데서도 변화가 있어 붓끝을 누르거나 굽히기도(衄挫) 한다."라 하고 또 "이것을 당겨 붙히면(導) 샘물이 흐르듯 하는 것이며 이것을 멈추면(頓) 산과 같이 중후하다."라고 하지만 이 말이 정확하게 왕헌지의 서에 맞는 말은 아니다.

 

후세 사람들이 초서를 쓸 경우에 마음 속에 이미 잘 정해진 초서의 법칙을 갖고 있지 않으며 筆先의 轉換도 빨리하는 것인지 천천히 하는 것인지 분명히 하지 않고  붓에 맡겨 쓰고 있기 때문에 다 쓰여진 글씨도 亂하기만 하여형편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으로써 형질이 아직 갖추어진 것이 아니기에 그 위에 어찌하여 性情에 대하여 말할 수가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건데 반드시 점획의 형이 使轉 가운데 포함되어 있을 떄는 그대로 성정이 형질 가운데에 發現하기 때문에 그 서체와 필세를 보면 자유자재로 취해진 것이 아니고 거의 한점 한획을 하나하나 구별할 수가 없는 것이며 一節마다 필봉을 전환하기 때문에 필봉의 중심은 모두 필획의 중앙을 지나고 있으며 필봉의 움직임은 초서라 해도 진서의 경우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손과정이 "張芝의 초서는 진서는 아니지만 그 점획은 자유로운 형태를 하고 있으며 진서의 필법을 취해 넣은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게 모범을 보이고 그 깊은 곳을 잡고 있으며 또 "鍾繇는 진서는 초서는 아니지만 그 붓사용은 자유자재이며 초서의 필법을 취해 넣은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진서의 서법을 잘 예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건데 횡획,종획을 올바르게 잘 쓰는 것은 진서의 필세이다.

옛사람은 일점 일획에도 모든 필봉을 전환시켜 쓰고 있으며 처음과 끝 같은데에서 비로소 使轉을 쓴다는 것은 아닌 것이다. 종횡이란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의미이다. 또한 빙글빙글 돌리거나 자유롭게 휘두르고 있는 것은 초서의 필세이다. 옛사람은 一牽,一連에도 필봉은 모두 전환시키며 필봉을 올바르게 紙面에 댔기 때문에 한톨의 좁쌀이나 쌀도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狼藉란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그와 같다는 것을 말한다.

 

초서의 서법이전해지지 않는 것은 진서의 서법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眞,草는 동원이지만 다만 운필과 필봉의 전환에 대해서 말한다면 진서는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며 초서는 배우는 사람이 적어 초서의 서법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다.

 

진서는 온화를 제일로 하고 강한 움직임(駿宕)을 제이로 한다. 초서는 簡靜을 제일로 하고 강한 움직임을 제이로 한다. 따라서 形質이 있어도 性情이 없으면 완전하다고 할 수가 없고 성정이 올바른 상태가 아니면 어찌 완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내가 말한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스스로 체득하며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선인들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도 없는 것이다.

 

其三

熙; 샘은 항상 '서에는 좌우로 강한 표현과 약한 표현이 牝牡가 되어 서로 조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말씀해 왔습니다만, 최근에는 또 '氣滿'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같은 한가지 방법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달리 두가지 입니까?

臣; 쓰는 자로서는 한가지 방법이지만 보는 자에게는 두가지 방법인 것이다. '左右에 牝牡가 있다'란 말할 것도 없이 정신 가운데의 일이지만 형세에 대해서도 말한다. '氣滿'이란 형세를 떠나서 오로지 정신을 설하고 있다. 때문에 '左右에 牝牡가 있고 제각기 조화를 득하고' 있어도 '氣'가 채워지고 있지 않는 것이 있다. '氣滿'의 때에는 '左右에 牝牡가 있고' 자연히 제각기 조화하지 않는 것이 없다. 좌우라는 점에서 말한다면 밤드시 中이 있지만 中은 川의 깊은 곳과 같은 것이다. 좌우의 물은 모두 깊은 곳으로 흘러 모이지만 만약 '氣滿'의 때에는 상류로부터의 흐름은 지극히 왕성해서 川의 구석구석까지 차서 흘러내려 여기가 중간쯤이라는 구별이 되지 않고 보기에는 다소 모자란다고 하는 것조차 없는 것이 된다. 그러면서 먼저 '左右에 牝牡가 있는' 것을 목표로 하여 공부하는 것이 아니면 어찌하여 '氣滿'이라는 상태에 이를 수가 있을 것인가. 기만 때에는 拳法에 精通한 사람이 아무런 방비가 없어도 사방에서 덤비는 자가 있을 때 재빨리 대응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소위 自運을 말함인가.마음이 있으면 몸이 움직이는 경지 그렇네...

 

其四 

 

熙; 趙孟頫는 "필획의 조립 방법에 의한 결체는 시대에 따라 변천하지만 용필은 어느 시대라도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陳隨代 사람들의結體는 고래로부터의 방법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멋진 氣迫이 부족한 것은 용필자의 솜씨에 의한 것이다" 하고 하고 또 동기창은 "옛사람은 章法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하고 있다. 이전에 米芾이 쓴 「西園記」를 본 적이 있지만 먹줄이라도 친듯이 똑바로 쓰여있다. 이것은 반드시 형상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 결체와 장법에 충분히 주의하고 있있기에 이렇게 된 것이리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臣; 두사람의 설 모두가 올바르지 않다. 결체는 용필에 입각한 것이다. 옛사람의 용필은 한결같이 기필은 예리하게 하고 수필은 재빨리 하여 결체는 당연히 생생하고 멋지게 된 것이다. 만약 조맹부의 정직한 필법을 사용하여왕희지를 쓰고자 한다 해도 글자가 잘 될 리 없다. 장법과 결체의 어느쪽도 똑바르게 정돈되어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먹줄을 친듯 반듯하게 된 것이 결체에 의한 장법에도 깊이 통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문자를 새기는 석공이 전문으로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고로 결체에 의한 장법에서 왕희지가 가장 뛰어나 있다고 생각된다. 송대에 淳化閣帖에 실린 「黃庭經」이나, 「東方朔畵贊」은 한눈에 보아서 그 기력이 충만하고 필세가 대단히 뛰어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자마다, 또 한획마다, 최근의 서체에 비교해 보아도 거의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다. 생각해 보니 그 필력은 들쑥날쑥한 것이 아니고 점획을 공간에 잘 어울리게 하고 잘 대응시켜 훌륭한 멋을 내고 있는 것이다. 왕헌지의 「洛神賦十行」은

 여기에 뒤이어지는 훌륭한 작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