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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hra(Maitra,Mithras,Maitri,Maitreya,Messiah)

solpee 2009. 12. 20. 05:51

 

 

304년 로마에서는 한 신의 아들이 '제국의 보호자'로 선포되었다. 이 신의 아들은 동지 전날 12월 25일에 기적적으로 태어났으며, 신도들이 상징적인 빵과 포도주 의식으로 죽음과 부활을 기념했다.

 

<그는 12월 25일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태어나 12제자를 거느리고 목자, 어린 양으로 불리웠다. 40일 동안 마귀의 시험을 받았다.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죽은 그는 무덤에 들어갔다가 3일 후에 부활하고 종말의 날 재림하여 세상의 악을 일소하고 천국을 건설하는 신의 아들이다.>

 

여기까지 말하고 그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예수'라고 대답할 것이다.

 

<창조신은 빛과 어둠을 가르고 해, 달, 별을 만들고 식물과 동물을 만들고, 최초의 인간을 만들고 휴식을 취했다. 암흑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은 암흑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대홍수로 세상을 정화시켜 지금의 세계를 완성했다. 그 창조신의 화신은 처녀가 구세주를 잉태하여 마지막날 구세주가 내려와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게 되고 구세주로부터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예언했다.>

 

구세주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그는 유대교나 예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조로아스터 교의 창조신인 아후라마즈다는 빛과 어둠을 가르고 해, 달, 별을 만들고 식물과 동물을 만들고, 최초의 인간 가요마르트를 만들고 휴식을 취했다. 이후 암흑신 아리만이 반란을 일으키자 창조신은 아리만과의 선, 악 전투에서 승리하고 대홍수로 세상을 정화시켜 마침내 현재의 땅이 되었다. 그 아후라마즈다의 화신 조로아스터의 예언에 의하면 처녀가 구세주를 잉태하게 되고 마지막날 구세주가 내려와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게 되고 구세주로부터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한다. 이 구세주는 바로 '미트라'이다.

 

미트라는 본래 고대 아리아 인들이 믿던 신이었다. 이 종교는 조로아스터의 교리를 흡수하면서 그리스를 통해 로마로 유입되었고 AD 첫 세기에 로마 제국 전역에 급속도로 확산되었으며 기원전 2~1세기 로마의 군인들에게 인기 있는 종교였다. 당시 로마 군대가 주둔 했던 곳 에서는 어김 없이 발견되는 것이 바로 미트라 교 숭배의 흔적으로, 어떤 인물과 장면을 묘사하는 그림과 유물들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이 동굴들이 바로 미트라 숭배 장소였다. 3세기, 미트라의 교세는 절정에 이르러 흑해의 제방에서 스코틀랜드의 산맥까지, 사하라 사막의 접경 지대까지' 미트라를 섬기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 때 신앙되던 미트라는 초기 페르시아 종교의 미트라와는 의미가 많이 바뀌게 된다.  미트라교는 조로아스터의 신앙을 흡수해 아후라마즈다(아후라는 '주님'이라는 뜻), 미트라, 이쉬타르의 성삼위일체를 만들고 제 2위(성자) 격이자 아후라 마즈다 그 자신이 된다. 처녀에게서 탄생하고 세상을 구원하러 태어나 죽었다 부활하며 마지막 날 재림해 최후 심판으로 세상을 악이 없는 곳으로 만들 구세주이다. 

 

(1) 미트라는 동굴에서 태양이 가장 낮은 날  목자 3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탄생했다. 복음서의 '동방박사'는 실제로 마기Magi라고 불렸는데, 마기는 페르시아의 미트라 사제를 부르는 말이었다. 그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가져왔다.

 

(2) 미트라는 천체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존재이자 12궁으로 표현되는 변화의 수레바퀴에서 고요히 자리를 지키는 영적 중심으로, 선회하는 황도의 중심으로 묘사되었다. 미트라 교의 입문식을 치르는 동안 신인 둘레에는 12사도가 자리를 잡았다. 미트라의 사도들은 황도의 12궁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입문자 주변을 돌며 춤을 추었다. 이때 입문자는 미트라를 상징한다.

 

(3) 미트라 교는 새로운 입문자에게  성체인 빵과 포도주 섞은 물, 혹은 십자가 표시가 새겨진 성체를 주었는데 이는 미트라가 죽인 황소의 피와 살로 여겨졌다. 

 

'네가 나와 더불어 하나가 되고, 나 또한 너와 더불어 하나가 되도록 내 몸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그러하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미트라의 말씀이다.

 

(4) 지상에서의 사명을 마친 미트라는 태양의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미트라는 세계의 지배자인 빛의 신으로 즉위해 창조신 다음의 제 2위격(성자)이 되어 하늘에서 종말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종말의 날에 그는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죽은 자를 깨워서 심판하고 세상의 악을 일소하는 것이다.

 

(5) 어떤 그림에는 미트라의 양 옆에 횃불을 든 두 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횃불로 하늘을 가리키는 사람은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을 상징하고, 땅을 가리키는 다른 사람은 지옥에 떨어졌다는 것을 상징한다.

 

(6)미트라를 기리는 날, 창조신이 세상을 만들고 휴식을 취한 날은 위대한 태양의 날인 일요일(sunday)였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는 서기 321년 법정은 더이상 유대인의 안식일이 아니라 존엄한 태양의 날(sunday)에 폐정해야 한다고 선언하여 휴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으로 바뀌었다.

 

(7)미트라는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목자' '목장의 주인' 등으로 일컬어졌으며 종종 어린 양을 끄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황소의 목을 따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되는 미트라는 태초의 거대한 황소를 쓰러뜨려 그 피로 대지를 비옥하게 물들인 신이다.  그가 황소를 쓰러뜨린 날은 불길한 금요일이라 하여 그가 도살한 황소를 기념하는 날이었다. 

 

(8) 미트라는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다가 3일 후 부활했다. 그가 살아난 날은 당시의 춘분으로, 이스터(Eastre)로 불리는 봄의 여신 에오스터(Eostre)의 축제날이었는데 이 날이 바로 미트라의 부활절 (Easter)이다. (이스터는 지구의 여신을 뜻하며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의 어원이다.) 훗날 이 날은 기독교의 예수 부활절로 대체되었다.


신도들은 마지막 날에 인간이 모두 살아나 선한자와 악한자로 나뉘고, 이윽고 '아름다운 기도'를 하는 자들의 기도에 따라 신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모든 사악한 자들을 말소할 것을 믿었다.  

 

 인도 힌두교의 크리슈나(B.C. 7세기경 약 2,600년전)는 천사와 현인들 그리고 목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탄생을 맞이했다. 크리슈나도 동정녀에게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목수였고 갠지스강 강가에서 세례를 받았다. 역시 나무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그는 그를 죽인자들 가운데에서 일어나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진다. 또 자신을 아버지에게로 가는 길이라고 했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모든 것의 생명이며, 세상을 떠받치는 자이며, 세상의 길이며, 그 피난처이다."  

 

디오니소스, 아티스, 아도니스 등 수많은 신의 아들들이 예수와 똑같은 일생을 살며 제자들을 두고 십자가에 매달렸다 부활하여 승천한다.(아마도 한 종교의 원형 전승이 있어 같은 신이 각 나라마다 퍼져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게 아닐까 싶다)

 

 

'기적과 이적은 사실상 모든 곳에서 모든 시대에 일어났다'

 

 

미트라 = 메시아 = 미륵
 


미륵(彌勒)의 어원은 범어로‘마이트레야’(Maitreya, 자비로운 어머니)이며, 마이트레야는 미트라(Mitra)에서 유래되었다.

미트라는 인도, 페르시아 등지에서 섬기던 고대의 태양신이다. 또 기독교의 메시아(Messiah)도 미트라에서 유래되었다.

 

즉 ,불교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분으로 수천년 동안 고대해왔던‘미륵부처님’과 기독교에서 수천년 동안 외쳐왔던 구원의‘메시아’는 모두 우주의 통치자 하느님을가리키는 같은 의미의 단어인 것이다. 【213쪽】
 

 
 
위일체론의 진실
 

2세기 중엽, 당시 페르시아의 태양신 미트라 신앙이 쇠퇴하고 기독교가 로마의 상류층까지 전파되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313년에는 국교로 인정된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삼위일체론은 확고하게 정립된 교리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삼위일체의 인정 여부를 놓고,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258-336)파와 예수가 곧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297-373)파가 대립하게 된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교회의 권위가 파괴되어 결국 로마제국까지 흔들릴 것이라 판단하여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예수성자가 하나님 아버지다’라고 공인되면서 이후로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곧 하나님 아버지라고 믿게 되었다. 말하자면 인간의 지배 논리에 의해 예수님이 순식간에 하나님 아버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새 문명을 여시는 구원의 부처, 미륵


 미륵불은 석가모니의 제자가 아니다


 많은 불교 신자들이 기존의 그릇된 상식에 사로잡혀, 바바리의 제자였던 수행승 미륵은 석가여래의 제자로서 56억 7천만년 뒤에 미륵불로 출세할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 최고(最古)의 경전인『숫타니파타』마지막 장인「피안도품(彼岸道品)」에도 바바리의 16제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수행승 미륵이 미래불이 된다는 내용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팔리어 연구의 권위자인 리스 데이비스(Rys Davis)는 미래불인 미륵불은 수행승 미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미륵사상연구의 대가인 일본의 와타나베 쇼코(渡邊照宏)도『미륵하생경,『미륵대성불경』등 미륵불과 관련된 주요 경전에, 수행승 미륵이 미래불이 된다는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음을 지적한 바 있다.
 

미륵은 도솔천의 천주님이시며 하나님으로서 석가를 내려보낸 분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오고 미래불인 미륵불의 사상이 전래되자 미륵불에 귀의하여 용화낙원 세계에 나고자 하는 미래적인 신앙이 보편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에 미륵신앙을 대중화시킨 분은 통일신라시대의 진표율사이다. 진표율사는 미륵신앙의 중심도장으로 모악산 금산사, 금강산 발연사, 속리산 법주사를 확장 창건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곳곳에 미륵불 신앙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성경에 빠져 있는 예수의 유년시절


 
12~29세까지 인도에서 불교법전을 공부했던 예수님
예수님의 언행을 기록한 신약성서에는 그의 탄생과 설법,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12~29세까지는 무엇을 했는지 통째로 빠져있다.

30대에 설법을 펴기 전,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신약성서에 빠져있는 예수의 그 잃어버린 생애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서적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리바이 도우링(Levi H.Dowling, 1844~1911)목사가 천상 영계의 기록(아카샤)을 보고 썼다는[성약성서(보병궁복음서)]와 1963년 예수의 무덤에서 발견된 [탈무드 임마누엘] 그리고 러시아의 고전학자인 니콜라스 노토비치(Nicholas Notovich, 1858~?)가 인도 라마승으로부터 전해받은 예수에 관한 두 권의 기록을 바탕으로 출간한 [이사전](이사(ISSA)는 예수의 불교식 이름) 등이 그것이다.

 
 대표적으로 보병궁 복음서에서 기록하고 있는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가 12세 때, 남부 인도 오릿사 주의 왕족인 라반나가 유대의 제례에 참석차 왔다가 예수의 총명함에 반하여 예수의 부모를 찾아가 그에게 동양의 지혜를 배우도록 인도 유학을 청원한다.
 

 그리하여 예수는 남부 인도 오릿사 지방의 쟈간나스의 절에 들어가 4년간 수행하면서 베다 성전과 마니 법전을 배우고 승려 라마스와 깊은 우정을 나눈다.


 예수는 인도의 의술을 배우기 위해 당시 인도 최고의 의원이었던 우도라카의 제자로 입문한다. 그러다 절대평등을 주장하던 예수는 인도의 신분제도(카스트)를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정죄하려는 승려들을 피해 네팔로 피신을 가게 된다.

그 뒤 티벳의 사원에서 성현 멘구스테를 만나 고전을 공부하고, ‘광명의 부처’‘살아있는 신탁(神託)’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24세 되던 해에 고향에 들렀다가 다시 희랍을 거쳐 이집트에서, 성자들의 모임인 형제단 입회를 허락받고  

 

`성실, 공정, 박애, 신앙, 의열, 성애 의 여섯 단계의 시험을 진실과 용기로써 극복을  하고 애굽 밀교의 비밀과 생사의 문제, 그리고 태양계 밖의 세계의 비밀을 배우고 보랏빛의 방에서 마지막 7번째의 시험을 마치고 마침내,

 

그리스도(하느님의 사랑)라는 최고의 법명(法名)을 받는다. 그렇게 오랜 수도생활을 한 뒤 티벳을 마지막으로 29세에 귀국하였다.

 

미트라교

BC 1세기 전반 그리스도교의 유럽 침투 이전에 로마제국()에 널리 유포되어 있어서 새 종교인

그리스도교와는 유력한 경쟁적 종교였다. 미트라의 기원은 고대 인도 ·이란의 민족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데

, 이 미트라 숭배는 BC 3세기경에 페르시아에서 성행하였다.
따라서 페르시아의 발전에 따라 그리스로 건너가게 되었으며, 거기서 자연히 로마로 전파되어 밀의종교로서

특히 군인층에 널리 신앙되었다. 미트라교에 대해서는 고대 페르시아의 아르탁세륵세스 2세

(재위 BC 404∼BC 358)의 비문()에 그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로마에 나타났던 종교 형태는 이미 그 내용이 크게 변질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소()아시아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토착종교와 혼성()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폼페이우스(BC 106∼BC 48)황제의 동정() 이후에는 로마제국의 수호신으로까지 격상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하고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 점차 모습이

사라져 갔다. 신자의 제례는 종종 맑은 샘물이 솟아나오는 바위굴 안에서 행해졌는데, 그 깊숙한 곳 암벽에는

‘숫소를 도살하는 신’의 부조()를 볼 수 있다.
미트라 신전에 건조되었던 우상()은 그리스도교도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당시의 건조물을 포함한 종교적

유적은 현재 유럽에 많이 남아 있다.미트라는 페르시아의 아베스타 경전에 연유된 신으로 그리스에서는

빛의 신, 로마에서는 광명과 진실의 신, 죽음의 구세주, 치고의 행복을 내리는 주, 승리와 역전의 용사라는

 존칭으로 예찬되어 널리 숭배되었다. 미트라교는 원래 아후라마즈다를 최고신으로 모셨는데,

기원전 7~6세기에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종교개혁을 통해 아후라마즈다를 선과 빛의 지고신, 아흐리만은

악마의 신으로 대칭시키고 인류역사는 선과 악 두 원리의 대립과 항쟁의 역사라고 가르쳤다.
미트라교는 로마에서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전 4세기 동안 월등한 교세를 자랑하며 크게 성행하였고,

미트라를 황제의 보호신으로 모셨다. 미트라는 정복 불가능한, 페르시아 모자를 쓴 젊은 신으로 표현되고,

쓰러뜨린 황소 위에 무릎을 대고 한 손으로는 뿔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단도로 목을 찌르는 상으로 묘사되었다.

이 숭배는 서기 2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후원으로 막강해져 로마 병사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 나갔다.

미트라 숭배에서는 독신 남자만이 사제가 될 수 있으며 심지어 여자는 신전 출입도 금지당하였다.
대신 여성은 데메테르, 이시스, 헤라 또는 디오니소스 신전에 모여 의식과 축제에 참여하였다. 
엘레우시스는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신앙의 중심지였으며, 엘레우시스 밀의의 봄 가을 2번에 걸친 축제에는

그리스 전체에서 신자들이 모였다. 기원전 2000년대 이전부터 시작된 이 신앙은, 서기 5세기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금지되기까지, 로마 시대에도 이 지역의 신앙은 쇠퇴하지 않았다.
엘레우시스 밀의는 데메테르의 신격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풍요로운 추수에 대한 기원과 감사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엘레우시스 밀의는 고대 세계에서 예식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으로 가장 유명했다.
수많은 고대 작가와 철학자들은 이 예식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제전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이 예식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되었다. 예식에 참가한

사람들은 죽어 지하세계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만약 밀의의 비밀을 누설하면

큰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 믿음이 얼마나 확실했던지 참석자들 중 아무도 황홀한 종교적 체험을 했다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비밀도 누설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이 엘레우시스 밀의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지만, 오르페우스교에서

그러하듯이지하세계에서 돌아오는 페르세포네를 맞는 예식을 치름으로써 죽음 뒤에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경험했다는 것 뿐이다 또 데메테르가 행방불명된 페르세포네를 찾아다니며 행한 행적들, 즉 침묵과 금식,

포도주를 거절하고 박하향이 나는 보리차를 마시는 행위, 밤에 횃불을 밝히고 딸을 찾아 헤매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엘레우시스 제전 동안 이와 비슷한 행위들이 행해졌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미트라(크리스마스와 부활절에 관한 펌글) 
 미트라(Mithras)는 고대 아리아인의 남신(男神)으로 빛, 진실, 맹약(盟約)을 관장했다. BC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 문헌인 '리그베다'는 미트라의 이름을 전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미트라를 태양신이라고도 기록했으며, 소마술과 암소를 둘러싼 신화와 관련이 있다. 다음으로 오래된 사료는 BC 14세기의 '보아즈쾨이문서'로, 거기에서는 히타이트인과 미탄니인 사이의 '맹약의 신'으로 나타난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아베스타'에서는 미트라(Mithra)라고 불리며, '미트라 찬가'에서 '죽음에서의 구세주','축복을 주는 자', '승리자', '전사(戰士)', '목장(牧場)의 주인' 등으로 불렸다.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은 페르시아제국의 전신인 아케메네스 왕조의  아르탁세륵세스 1세가 BC 449년경에 남긴 비문(碑文)에는 아후라 마즈다 외에 토착신앙의 미트라와 아나히타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미트라의 기원에 관해서는 조로아스터교 보다 도 더 오래된 고래 아리아인의 토속신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로마인이 처음 미트라에 접했을 무렵 이 종교는 페르시아의 조르아스터교의 영향 아래 진실과 빛의 신으로 되어 있었고, 최고의 창조신인 아후라 마즈다 신성(神性)의 한 분신으로 등장했다. 아케메네스, 아르사케스, 사산왕조 등에서 왕조의 수호신으로 숭배되었고, 그것이 로마제국에서는 밀의종교(密儀宗敎)로 크게 유행을 떨쳤다.



두산세계대백과는  미트라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BC 1세기 전반 그리스도교의 유럽 침투 이전에 로마제국(帝國)에 널리 유포되어 있어서 새 종교인 그리스도교와는 유력한 경쟁적 종교였다. 미트라의 기원은 고대 인도 ·이란의 민족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데, 이 미트라 숭배는 BC 3세기경에 페르시아에서 성행하였다. 따라서 페르시아의 발전에 따라 그리스로 건너가게 되었으며, 거기서 자연히 로마로 전파되어 밀의종교로서 특히 군인층에 널리 신앙되었다. 미트라교에 대해서는 고대 페르시아의 아르탁세륵세스 2세(재위 BC 404∼BC 358)의 비문(碑文)에 그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로마에 나타났던 종교 형태는 이미 그 내용이 크게 변질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소(小)아시아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토착종교와 혼성(混成)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폼페이우스(BC 106∼BC 48)황제의 동정(東征) 이후에는 로마제국의 수호신으로까지 격상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가 그리스도교로 개종(改宗)을 하고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 점차 모습이 사라져 갔다. 신자의 제례는 종종 맑은 샘물이 솟아나오는 바위굴 안에서 행해졌는데, 그 깊숙한 곳 암벽에는 '수소를 도살하는 신'의 부조(浮彫)를 볼 수 있다. 미트라 신전에 건조되었던 우상(偶像)은 그리스도교도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당시의 건조물을 포함한 종교적 유적은 현재 유럽에 많이 남아 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미트라교 (Mithraism)항목]    



미트라의 비밀이 흥미로운 것은 그 종교가 기독교의 근원을 추적할 수 있는 공통점들 때문이다. 미트라의 전승은 기독교의 것에 비해 적어도 600년은 앞서고 있으며, 초대기독교와 같은 시기에 번성하였다. 이 종파는 엄청난 인기를 모았으며, 3세기에는 수백 개의 미트라에움(미트라를 숭배하는 지하 사원)들이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던 소아시아, 아프리카, 이탈리아, 그리스 독일과 스코틀랜드 국경에 퍼졌다. 당시 초대교회와 미트라교가 공존했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서로에 대해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두 종교가 로마에서 서로를 맞대고 존재하던 수 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미트라교가 기독교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두 종교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유사성들을 낳았다.



그러나 AD 5세기에 이르면 기독교가 힘을 얻고, 미트라교를 이단으로 선언하고 무자비하게 응징한다. 기독교는 미트라교의 추종자들을 자신들에게 편입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며 수많은 미트라에움들을 교회로 변신시켰다. 오늘날 많은 로마 교회들, 특히 로마의 성 클레멘타인 교회의 지하의 아치형 매장 토굴은 이것이 미트라에움들이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미트라 신전에 건조되었던 우상(偶像)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에 많이 파괴되었지만, 당시의 건조물을 포함한 종교적 유적은 현재 유럽에 많이 남아 있다.



특히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황제는 로마의 미트라 솔 인빅투스의 숭배자였고, 그의 영향아래 예수는 솔 인빅투스와 동화 되어 버렸다. 심지어 카톨릭의 교황이나 주교들이 대관식이나 미사 때 쓰는 큰 모자의 이름은 '미트라'(Mitra)이다! (이 모자의 한글이름은 '주교관'인데 영어로는 'Mitra'이다)



미트라는 아래의 특징을 예수와 공유하고 있다.



① 미트라는 12월 25일에 태어났다.

② 미트라는 동굴, 바위, 처녀 등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③ 미트라를 기리는 거룩한 主의 날은 즉 일요일(sunday)이었다.

④ 미트라는 천궁의 12궁도에 해당되는 제자를 거느렸다.

⑤ 미트라 교도들은 그가 부활한 날에 축제를 베풀었는데, 그 날은 지중해의 여러 나라에서 춘분축제였으며, 나중에 기독교의 부활절이 되었다.

⑥ 미트라는 태양신의 아들로서 미트라 성 삼위일체설을 형성하였다.

⑦ 전투를 끝낸 미트라는 무덤에 들어갔으며 3일 후에 다시 일어났다.

⑧ 미트라는 소와 관련이 있으며 '목장의 주인'(목자)으로 불렸다.



최근에 20~30 명이 들어 설 수 있는 지하 동굴들이 이탈리아를 포함 해서 북쪽 으로는 영국, 남쪽 으로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굴 되었다. 당시 로마 군대가 주둔 했던 곳 에서는 어김 없이 발견되는 이 동굴들에는 이상한 인물과 장면을 묘사 하는 그림과 유물들이 공통적으로 발견 되었는데, 학자들은 이 동굴들이 미트라교의 예배 장소 임을 밝혀 내었다. 이 미트라 숭배의 흔적이 발견된 지역은 영국, 이탈리아, 로마니아, 독일, 헝가리, 불가리아, 터키, 이란, 알메니아, 시리아, 이스라엘 및 북부 아프리카 등이다. 밀교였던 관계로 그들의 경전과 여타 정보가 전무 했지만, 부분적인 정보들이 당시 역사가들의 서술이나 초대교회인들의 비판서에서 등에서 엿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정보는 영웅전으로 유명한 역사가 플루타르크의 진술이다. BC 67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 하고 있다



"소 아시아 남 동부 해안의 '실리시아'에 미트라의 밀교 의식을 행 하는 큰 무리의 해적 떼가 있었다"



실리시아는 바울이 출생한 다소 라는 도시가 위치한 지역 이었다. 가장 오래 된 유물들은 AD 1 세기 말의 것으로, 3 세기에 교세가 가장 확장 되었으며, 5 세기 초 기독교의 득세로 수그러 들었다. 신도들은 군인, 관료, 상인이 주를 이루었고 여성은 배제 되었다. 태양신 미트라는 '정복 불가능한 신' 또는 '불멸의 젊은 신'으로 묘사되어 주로 신도들은 군인, 관료, 상인이 주를 이루었으며 여성신도는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이후 미트라는 귀족과 황실에서 받아들여 제국과 황제의 수호신으로도 격상되었다. 5 세기경 기독교는 맹위를 떨쳐 많은 미트라의 지하 사원을 접수 하여 기독교 사원으로 개조 한 곳이 여기 저기 드러난다. 기독교 교회라고 생각 된 곳에서 채 지워지지 않은 미트라 그림들이 발견된 것이다.



몇 단계의 의식을 거쳐야만 최고의 진리에 접 할 수 있었던 그 들의 가르침은 철저히 신도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수 되었기에 학자들 사이에서 그들의 교의에 대해 학설이 분분 하였다. 미트라 라는 이름은 페르시아 어로 계약 을 뜻하고, 지역에 따라 마이트로스, 미어, 메어 등 으로 불리기도 한다. 힌두교의 마에트라는 불교와 결합해 미륵신앙으로 발전해 나갔다. 로마의 미트라 솔 인빅투스라고도 불렸으며, 로마의 저술가들에 따르면 미트라의 근원이 페르시아에 있다고 서술했다.



세상의 어둠과 악을 정복하기 위해 태양신 보냈다는 미트라는 사자상으로도 상징되었는데, 사자의 입에는 벌(Bee)이 물려져 있다. 그 벌은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갈대아어에서 '벌'은 '로고스'란 뜻도 된다.)

미트라는 '우라노스'(Ouranos, 빛을 비추는 자)로도 불리는데, 우라노스는 '크로노스'(Kronos)와 동의어로서 크로노스는 '광선을 보내는 자' 혹은 '뿔이 나온 자'란 뜻을 가지고 있다[Alexander Hislop / 두 개의 바빌론 / P193~194]. 그들은 태양신의 아들인 미트라가 빛을 준다는 것을 타오르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등불과 켜진 밀랍초를 사용하였고(특히 밀랍초(wax-candle)를 사용토록 한 것은 밀랍이 벌에 의해 생산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태양신 숭배종교의 모든 의식에는 타오르는 등불과 밀랍 촛불의 행렬이 필수적 요소가 되었다 [Alexander Hislop / 두 개의 바빌론 / P.194~197]. 이런 영향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세상의 빛으로 불리어졌고, 예수와 마찬가지로 미트라 성 삼위 일체의 두 번째, 즉 아들의 존재로써 중개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의 생일은 12 월 25 일로 경축 되었으며, 만인의 죄를 대속 하기 위하여 죽었다가 3 일만에 부활 했다. 그의 부활은 기독교의 부활절 주기(더 정확이 말하면 춘분이다)와 일치 하며 점성학의 12궁도(宮圖)에 해당되는 12 제자를 거느렸다고 전해진다. 당시 로마제국에서 국가적 축제로 행했던 농신제(農神祭)중에 미트라신을 섬기는 절기로 12월 25일을 정하고 있었다. 이 12월 25일이 로마달력으로는 서양의 동지절에 해당되는데 이 문제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초기교회의 신자들이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안식일(토요일)을 지켰으나, 일요일을 신성하게 여긴 미트라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송낙원은 '제2기 사도 후 시대'(100~313년)를 정리하며 초대교회에서의 안식일 전례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예배의 시기로는 주(週) 예배로서 안식일 예배가 이 시기까지 계속되었으나, 말기에 점차로 주의 첫날 즉 일요일로 대용케 되었다." [송낙원 / 세계기독교회사 /이건사 P.101]



결국 이런 문화적 토양속에서 로마교회는 일요일 예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나, 모든 교회가 일요일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자 태양신 숭배자 콘스탄티누스가 "모든 재판관과 시민 그리고 기술자들은 존엄한 태양의 날(Sunday)에 쉬어야 한다"고 법령을 제정하게 된다. [교회사 핸드북/ 생명의 말씀사 P.144]



"콘스탄틴 대제는 처음으로 칙령을 내려 일요일에 정무와 사법의 일을 쉬게 하고 이어서 이날에는 군대의 조련, 공연물의 관람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의 제도를 그대로 옮기려고 하지는 않았다. 동방에 있어서는 토요일을 안식일로서 지켰다." [김의환 박사 감수 / 교회사 / 세종문화사 P.145]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들은 2세기경에 미트라교의 태양신 숭배일인 일요일 예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나, 동방 교회들은 321년 황제의 일요일 휴업령이 내려질 때까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다. 황제의 칙령 속에 나타난 '존엄한 태양의 날'이라는 표현을 볼 때, 일요일 휴업령은 로마의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미트라교도들을 배려한 칙령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트라교에 따르면 그 전에 등장했던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따라 세상이 선과 악의 끊임없는 전쟁터였다고 주장했다. 이 세계는 악마의 숙주들과 신을 섬기는 선민들 사이의 치열한 투쟁장소인 것이다. 신성이 육체들, 그리고 빛의 선한 운명을 망치는 어둠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미트라는 태양신의 신성한 아들이자 우주의 어둠에 대항해 싸웠던 선한 구원자를 나타낸 것이며, 그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악의 앞잡이들과 싸웠다. 미트라는 천체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우주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아졌다. 미트라는 남녀간의 동침을 거치지 않고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동굴 속의 바위에서 솟아났다. 미트라의 조각이 알 모양의 '생식 바위'(petra genetrix)로부터 뛰쳐나오는 벌거벗은 아기의 모습으로 그의 출생을 나타내고 있다. 미트라는 악마의 억압으로 동굴속 바위에 감금되어 있다가 '애욕의 열에 의해서'(solo aestu libidinis)태어난다. 미트라는 12월 25일, 태양이 하늘에서 가장 낮은 날에 있는 동지 전날, 목동들만 출생의 과정을 지켜보는 가운데 태어났다. 새벽빛이 밝아올 때, 사제가 미트라의 동굴사원에서 나와 "신이 태어났도다!'"하고 외쳤다고 한다. 신도들은 종을 울리고, 축가를 부르고, 촛불을 켜고, 선물을 나누고, 빵과 물로 성찬례를 행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신화를 살펴보면, 어머니인 데메테르 여신에 의해 동굴에 감춰진 페르세포네에게 제우스가 뱀으로 변장하고 그녀를 임신시켰다. 미트라와 디오니소스 신화속에서 그들이 태어나고 잉태된 동굴은 대지(垈地)의 자궁(子宮)을 상징한다.






미트라는 점성학에서 말하는 천궁의 12궁도에 해당되는 제자들을 거느렸으며, 길, 진리, 빛, 말씀, 하느님의 아들, 착한 목동 등 다양하게 묘사되었다. 종종 죄를 어깨 위에 짊어지고 어린양을 이끄는 것으로 그려졌다. 미트라교의 신자들에게는 정의와 사랑의 신인 오시리스를 찾는 40일이 있었다. 이 종파는 또한 불길한 금요일(예수가 처형된 성 금요일과 유사)을 지켰는데, 그 날은 지구를 비옥하게 한 미트라의 희생적인 황소 도살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전투에서 지친 미트라는 상징적으로 시체로 표현되며, 신성한 동굴(바위 무덤)에 안치된다. 이것은 후에 기독교의 부활절 전의 예수의 고난주간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미트라는 3일후에 동굴에서 부활한다. 이것은 당시의 (춘분)이었으며, 이스터 여신의 축제(봄의 여신축제, 이스터는 지구의 여신을 이르는 라틴어에서 딴 말)는 미트라의 부활절이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종교회의에서는 이날이 예수의 부활절이 되어버린다. 또, 미트라의 숭배자들은 태양의 에너지가 인간의 두뇌에 축적 된다고 믿었고 이것이 후광으로 나온다고 믿었다. 이것은 후에 중세시대 성화에서 예수의 얼굴모습을 표현할 때 나타냈던 얼굴의 후광에 영향을 끼쳤다. 미트라 숭배자들은 천국과 지옥, 마지막 심판, 구원, 부활 등의 교리를 믿었다. 마지막 성만찬의 이야기도 매우 흡사하다. 카톨릭의 성직자 계급 제도나 예배 형식 및 예배 시 쓰이는 도구들 즉 향불, 예배 의복 등등 모두 미트라와 흡사 하다. 십자가 목걸이, 염주알 등도 마찬가지 이다. 미트라 교의 입문은 맑은 샘물이 솟아나오는 바위굴 안에서 세례를 시행했다고 한다.



미트라 동굴에서 자주 발견되는 하나의 벽화가 있는데, 그것은 태양 신의 아들인 미트라가 황소를 죽이는 그림이다. 돌에 새겨진 벽화에는 황소, 개, 까마귀, 뱀, 전갈들이 나타나며 여러 곳의 그림 중 사자와 물잔도 종종 포함 되어 있다. 뒷 배경으로 많은 별들이 그려져 있다. 이 벽화 부조물에 나타나는 동물들은 모두 별자리를 가리킨다. 황소는 황소자리이며 그 외에 개, 사자, 뱀, 까마귀, 전갈 등 각각 별자리에 해당된다. 이 그림이 페르시아의 미트라 에서는 발견 되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은 최근의 학자들은, 로마의 미트라가 이름 만 빌렸을 뿐이지 새로운 신앙 체계 임을 밝혀 내었다. 로마의 미트라 지하사원에는 황소 도살 장면이 항상 동굴 안에 놓여져 있었는데 이것은 점성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