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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의 江北 奪取/辛丑䄵冬至節初候蚯蚓結2日(음11/20)乙巳

solpee 2021. 12. 23. 05:05

《後周紀4 太祖 德 4年》 (丁巳, 957)

 

 ⑬. 4월 28일에 조서를 내려서 변수를 소통시켜서 북쪽으로 가서 오하장으로 들어가게 하라고 하였는데, 이로부터 제· 로의 배들이 모두 대량에 모이게 되었다.

 ⑬. 乙酉,詔疏汴水北入五丈河,〈河自都城歷曹、濟及鄆,其廣五丈,舊名五丈河;宋開寶六年,詔改名廣濟河。薛史曰:浚五丈河,東流於定陶,入于濟,以通齊、魯運路。〉由是齊、魯舟楫皆達於大梁。

 

 ⑮. 조서를 내려서 율령의 문구가 옛날식이어서 알기 어렵고, 격칙(格敕: 律· 令· 格· 則 중 格은 시행규칙을 이름)은 번잡하고 한결같지가 않아서 어사지잡사인 장식 등에게 명령하여 훈석을 달게하여 자세히 확정하여 <형통(刑統: 刑典으로 宋末까지 사용 되었다.)>을 만들었다.

 ⑮. 詔以律令文古難知,格敕煩雜不壹,命御〈【章:十二行本「御」上有「侍」字;乙十一行本同;張校同。】〉史知雜事張湜等〈唐制:御史臺有侍御史六人,以久次者一人知雜事,謂之雜端。杜佑通典曰:知雜事,謂之南床,殿中、監察不得坐。凡侍御史之例,不出累月,遷登南省,故謂之南床。百官察其行止、出入、揖讓、去就,殿以下皆稟而隨之。湜,丞職翻。〉訓釋,詳定為刑統。〈刑統一書,終宋之世行之。

 

 ⑱. 6월 22일에 전에 화주 자사였던 왕조를 영주단련사로 삼았다. 왕조는 왕부의 아버지였다. 왕부가 재상이 되었지만 왕조에게 빈객이 있으면 왕부는 항상 조복을 입고 시립하고 있었으며, 손님이 앉았다가 스스로 자리가 편안하지 않으면 왕조는 말하였다.

  "돈견(籖犬: 돼지새끼와 개새끼, 아버지가 자식을 남에게 겸손하게 부르는 말)이니 일어날 만하지 않소."

 ⑱. 丁丑,以前華州刺史王祚為潁州團練使。祚,溥之父也。溥為宰相,祚有賓客,溥常朝服侍立;〈華,戶化翻。朝,直遙翻。〉客坐不安席,祚曰:「㹠犬不足為起。」〈籖,與豚同。足為,于偽翻。

 

 ㉗. 10월 16일에 왕박을 동경유수로 삼고, 편리한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허락하였다. 삼사사인 장미를 대내도점검에 충임하였다.

 ㉗. 己巳,以王朴為東京留守,聽以便宜從事。以三司使張美充大內都點檢。

 

 19일에 황제는 대량을 출발하였는데, 11월 4일에 진회군에 도착하였고, 이날 밤 5고(鼓+更)에 회하를 건넜으며, 5일에 호주 성의 서쪽에 도착하였다. 호주의 동북쪽 18리에 여울이 있는데, 당인들이 그 위에 목책을 만들어 놓고 물을 삥 둘러서 스스로 굳게 해 놓고서 주의 군사들이 반드시 건널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壬申,帝發大梁;十一月,丙戌,至鎮淮軍,是夜五鼓,濟淮;丁亥,至濠州城西。濠州東北十八里有灘,唐人柵於其上,環水自固,〈環,音宦。〉謂周兵必不能涉。

 

 6일에 황제는 스스로 그곳을 공격하면서 내전직 강보예에게 명령하여 갑사 수백을 인솔하고 낙타를 타고서 물을 건너게 하고, 조광윤은 기병을 인솔하고 이를 이어가서 드디어 그곳을 점령하였다. 이중진이 호주의 남관성을 격파하였다.

 戊子,帝自攻之,命內殿直康保裔帥甲士數百,乘橐駝涉水,〈帥,讀曰率;下同。〉太祖皇帝帥騎兵繼之,遂拔之。李重進破濠州南關城。

 

 11일에 황제는 스스로 호주를 공격하는데 왕심기가 그들의 수채를 점령하였다. 당인들은 전선 수백 척을 성의 북쪽에 주둔시켜 놓고 또 커다란 나무를 회수에 박아 놓아 주의 군사를 제한하였다. 황제는 수군에게 그것을 공격하라고 명령하고, 그 나무를 뽑고 전선 70척을 불태우고 목을 벤 것이 2천여 급잉ㅅ으며 또 그들의 양마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니 성 안에서는 놀라서 두려워하였다.

 癸巳,帝自攻濠州,王審琦拔其水寨。唐人屯戰船數百於城北,又植巨木於淮水以限周兵。帝命水軍攻之,拔其木,焚戰船七十餘艘,〈艘,蘇遭翻;下同。〉斬首二千餘級,又攻拔其羊馬城,城中震恐。

 

 14일 밤에 당의 호주단련사인 곽정위가 표문을 올려서 말하였다.

 "신의 집안은 강남에 있는데 지금 만약에 급하게 항복할 것 같으면 아마도 당에게 족멸될까 두려우니, 청컨대 먼저 사자를 보내어 금릉에 가서 명령을 품의하게 해주시고, 그런 다음에 나가서 항복하겠습니다."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丙申夜,唐濠州團練使郭廷謂上表言:「臣家在江南,今若遽降,恐為唐所種族,〈種,章勇翻。〉請先遣使詣金陵稟命,然後出降。」帝許之。

 

 19일에 황제는 당에서 전선 수백 척이 환수의 동쪽에 있는데 곧 호주를 구원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밤중에 수륙으로 출발하여 이를 쳤다.

 21일에 당의 군사를 동구에서 대파하고 목을 벤 것이 5천여 급이엇고, 하복한 병졸이 2천여 명이었으며, 이어서 북을 치면서 동쪽으로 가니 이르는 곳은 모두 격파되었다.

 辛丑,帝聞唐有戰船數百艘在渙水東,〈渙水逕宿、亳之間,東南至巉石山西,而南入淮。〉欲救濠州,自將兵夜發水陸擊之。癸卯,大破唐兵於洞口,〈今濠州東九十里有浮山,山下有穴,名浮山洞,夏潦不能及而冬不加高,故人疑其山為浮洞口,竊意即浮山洞口。〉斬首五千餘級,降卒二千餘人,因鼓行而東,所至皆下.

 

 23일에 사주 성 아래에 도착하여 조광윤이 먼저 그 남쪽을 공격하고 성문을 불 지르며 수채와 월성을 격파하였다. 황제는 월성루에 있으면서 장사들에게 성을 공격하는 것을 독려하였다.

 乙巳,至泗州城下,太祖皇帝先攻其南,因焚城門,破水寨及月城。〈月城者,臨水築城,兩頭抱水,形如卻月。〉帝居于月城樓,督將士攻城。

 

 

 ㉙. 12월 3일에 당의 사주 수장인 범재우가 성을 들어가지고 항복하자 범재우를 숙주단련사로 삼았다. 황상은 사주 성 아래에 도착하면서부터 군대 안에 있는 추요자에게 백성들의 전지를 침범하지 말라고 금지하니 백성들은 모두 감격하고 기뻐하여 다투어 꼴과 곡식을 바쳤는데, 이미 사주에서 이기고 나서도 한 명의 병졸도 멋대로 성에 들어간 사람이 없었다. 황제는 당의 전선 수백 척이 동구에 정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병을 파견하여 엿보게 하니, 당의 군사들은 물러나서 청구를 지켰다.

 ㉙. 十二月,乙卯,唐泗州守將范再遇舉城降,以再遇為宿州團練使。上自至泗州城下,禁軍中芻蕘者毋得犯民田,〈蕘,如招翻。〉民皆感悅,爭獻芻粟;既克泗州,無一卒敢擅入城者。帝聞唐戰船數百艘泊洞口,遣騎詗之,唐兵退保清口。〈詗,古永翻,又翾正翻。清口,即清河口也。〉

 

 6일에 황상은 스스로 친군을 거느리고 회수 북쪽으로 나아가며 조광윤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회수에서 남쪽으로 나아가게 하고, 제장들은 수군으로 중류에서부터 나아가게 하여 함께 당의 군사를 쫒게 하였다.

 이때에 회수의 물가에는 오래도록 다닌 사람이 없어서 갈대가 직포처럼 되어 있고, 진흙이 도랑을 메워 놓고 있었지만 사졸들은 이긴 기세를 타고 풀뿌리를 건너면서 다투어 전진하니 모두가 그 수고로움을 잊었다.

 戊午,〈【章:十二行本「午」下有「旦」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上自將親軍自淮北進,命太祖皇帝將步騎自淮南進,諸將以水軍自中流進,共追唐 兵。時淮濱久無行人,葭葦如織,多泥淖溝塹,〈淖,奴教翻。塹,七豔翻。〉士卒乘勝氣茇涉爭進,皆忘其勞。〈茇,蒲撥翻。草行為茇,水行為涉。〉

 

 8일에 뒤쫓아 가서 당의 군사를 따라잡으니 한편 싸우고 한편 나아갔는데 금고를 울리는 소리가 수십 리까지 들렸다.

 9일에는 초주의 서북쪽에 도착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당의 군사 가운데 회수를 따라서 동쪽으로 내려간 사람이 있었는데, 황제가 스스로 이들을 쪼았고, 조광윤은 선봉이 되어 60 리를 가서 그들의 보의절도사· 호· 사· 초· 해도응원사인 진승소를 붙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庚申,追及唐兵,且戰且行,金鼓聲聞數十里。〈聞,音問。〉辛酉,至楚州西北,大破之。〈九域志:泗州西至濠州一百七十五里,東北至楚州二百二十里。〉唐兵有沿淮東下者,帝自追之,太祖皇帝為前鋒,行六十里,擒其保義節度使、濠,泗,楚,海都應援使陳承昭以歸。〈保義軍,陝州,屬周,陳承昭遙領耳。〉

 

 노획한 전선 가운데 불태워서 가라앉힌 것 외에 300여 척을 얻었고, 사졸 가운데 죽거나 물에 빠진 사람 이외에 얻은 것이 7천여 명이었다. 당의 전선으로 회수에 있던 것은 여기에서 다 없어졌다.

 所獲戰船燒沈之餘〈沈,持林翻。〉得三百餘艘,士卒殺溺之餘得七千餘得七千餘人。唐之戰船在淮上者,於是盡矣。

 

 곽정위의 사자가 금릉에 돌아왔는데, 당은 구제할 수 없는 것을 알고 녹사참군인 파양 사람 이연주에게 항복하는 표문의 초안을 쓰라고 명령하였다. 이연추가 충의를 가지고 책망하자 곽정위가 무기를 그에게 들이대니, 이연추가 붓을 던지면서 말하였다.

 "대장부가 나라에 빚을 지고 반란하는 신하가 되어 항복하는 표문을 쓰다니!"

 곽정위가 그 목을 베고 호주로 들어가서 항복하니 군사 1만 명과 양곡 수만 곡을 얻었다. 당주는 이연추의 아들에게 관직으로 상을 주었다.

 郭廷謂使者自金陵還,〈還,從宣翻,又如字。〉知唐不能救,命錄事參軍鄱陽李延鄒草降表。延鄒責以忠義,廷謂以兵臨之,延鄒擲筆曰:「大丈夫終不負國,為叛臣作降表!」〈為,于偽翻。史言李延鄒忠壯。〉廷謂斬之,舉濠州降,得兵萬人,糧數萬斛。唐主賞李延鄒之子以官。

 

 10일에 황제는 회하를 건너서 초주에 이르러서 성의 서북쪽에 주둔하였다.

 13일에 당의 응무군사· 지현수현사인 최만적이 항복하였다.

 14일에 곽정위를 박주방어사로 삼았다.

 16일에 황제는 초주를 공격하여 그들의 월성에서 승리하였다.

 壬戌,帝濟淮,至楚州,營于城西北。

乙丑,唐雄武軍使、知漣水縣事崔萬迪降。

丙寅,以郭廷謂為亳州防禦使。

戊辰,帝攻楚州,克其月城。

 

 18일에 곽정위가 행궁에서 알현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짐이 남정한 이래 강남의 제장들이 패망한 것이 이어졌는데, 홀로 경만이 와구의 부량을 끊고 정원의 영채를 격파하였으니 나라에 보답한 것은 충분하오. 호주는 작은 성인데 이경으로 하여금 스스로 지키게 하였다면 이를 지킬 수 있었겠소?"

 庚午,郭廷謂見於行宮,〈見,賢遍翻。〉帝曰:「朕南征以來,江南諸將敗亡相繼獨卿能斷渦口浮梁,破定遠寨,〈事見上五月。〉所以報國足矣。濠州小城,使李璟自守,能守之乎!」〈璟,居永翻。〉

 

 호주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천장을 공격하게 하였다. 황제는 청기좌상도지휘사 무수기를 파견하여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양주로 가게 하여 고우에 도착하였는데, 당인들은 양주의 관부와 민간들의 주거지를 다 태우고 그 사람들을 몰아서 장강을 건너게 하였다. 며칠 지난 뒤에 주의 군사가 도착하자 성안에는 병든 사람 10여 명뿐이었다.

 21일에 무수기가 보고하였다.

 황제가 태주에는 아무런 방비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25일에 태주를 점령하였다.

 使將濠州兵攻天長。帝遣鐵騎左廂都指揮使武守琦將騎數百趨揚州,至高郵;〈九域志:高郵,東南至揚州一百里。趨,七喻翻。〉唐人悉焚揚州官府民居,驅其人南渡江,〈九域志:揚州南至江四十五里。〉後數日,周兵至,城中餘癃病十餘人而已,〈癃,良中翻,疲病也。〉癸酉,守琦以聞。

帝聞泰州無備,遣兵襲之,丁丑,拔泰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