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회남절도사 向訓, 南唐 사신 孫晟/辛丑䄵大䨮節末候荔挺出(타래붓꽃의 싹이 나온다)2日(음11/15)庚子

solpee 2021. 12. 17. 11:51

《後周紀4 太祖 德 3年》 (丙辰, 956)

 

 ㉘. 당의 장수인 주원이 서주를 빼앗으니 자사인 곽령도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평은 기주(호북 기춘시)를 빼앗았다. 당황은 주원을 단련사로 삼고, 이평을 기주 자사로 삼았다. 주원이 또 화주(안휘 화현)를 빼앗았다.

 ㉘. 唐將朱元取舒州,刺史郭令圖棄城走。李平取蘄州。唐主以元為舒州團練使,平為蘄州刺史。元又取和州。〈朱元、李平,皆李守貞所遣求救於唐者也,事見二百八十八卷漢乾祐元年。〉

 

 애초에, 당인들은 차와 소금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강제로 하고 그들의 속백을 징수하니 이를 '박징(博徵:널리 징수함)'이라 하였으며,  또 회남에 영전을 일으키니 백성들은 이를 아주 고생스럽게 생각하였는데 주의 군사가 오고 나자 다투어 소고기와 술을 받들어 가지고 환영하여 위로하였다.

 初,唐人以茶鹽強民而徵其粟帛,謂之博徵,〈強,其兩翻。博,博易也。言以茶鹽博易而徵其粟帛。〉又興營田於淮南,民甚苦之;及周師至,爭奉牛酒迎勞。〈勞,力到翻。〉

 

 장수들이 휼민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포로롤 잡고 약탈하는 일만 하며 백성들을 흙이나 검불처럼 보니, 백성들은 모두 희망을 잃고 서로 산이나 소택지에 모여서 보루와 성벽을 세우고  스스로 굳게 지키며 농기구를 고쳐서 무기를 만들고 종이를 겹겹이 붙여서 갑옷을 만드니 당시의 사람들은 이를 '白甲軍'이라고 하였다. 주군이 이를 토벌하였으나 누차에 걸쳐서 패배하니 먼저 얻었던 당의 여러 주에서도 대부분 다시 당의 소유가 되었다.

 而將帥不之恤,〈帥,所類翻。〉專事俘掠,視民如土芥民皆失望,相聚山澤立堡壁自固,操農器為兵,〈操,七刀翻。〉積紙為甲,時人謂之「白甲軍」。周兵討之,屢為所敗,〈敗,補邁翻。〉先所得唐諸州,多復為唐有。

 

 당의 원병이 자금산(수현 동북 팔공산)에 군영을 만들고 수춘성에 있는 봉화와 서로 호응하였다. 회남절도사 향훈이 주문을 올려서 광릉의 군사를 갖고 힘을 합하여 수춘을 공격하자고 요청하고, 성을 이기기까지 기다려서 다시 나아가서 이를 빼앗기를 도모하자고 하자 조서를 내려서 이를 허락하였다. 향훈은 부고를 봉폐하여서 양주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넘겨주고 양주의 아장에게 명령하여 부별로 나누어 성 안에서 조사하며 다니게 하였는데 조금도 범법하지 아니하였다.

 唐之援兵營於紫金山,〈紫金山在壽春南;或云即八公山。〉與壽春城中烽火相應。淮南節度使向訓奏請以廣陵之兵併力攻壽春,俟克城,更圖進取,詔許之。訓封府庫以授揚州主者,命揚州牙將分部按行城中,秋毫不犯,〈分,扶問翻。行,下孟翻。〉

 

 양주의 백성들이 감동하여 기뻐하였고, 군대가 들어오는데, 어떤 사람은 구비(糗糒: 미숫가루와 건식량 즉 전투식량)를 짊어지고 와서 그들을 환영하였다. 저주 수장 역시 성을 버리고 떠나서 모두가 군사를 이끌고서 수춘으로 갔다.

 揚州民感悅,軍還,或負糗糒以送之。〈糗,去久翻,熬米麥為之。糒,平秘翻,乾飯也。〉滁州守將亦棄城去,皆引兵趣壽春。

 

 당의 제장들은 험한 곳을 점거하고 주의 군사를 맞는데, 송제구가 말하였다.

 "이와 같이 한다면 원망만 더욱 깊어집니다."

 마침내 제장에게 명령하여 각기 스스로 보호하며 지키고 멋대로 나와서 주의 군사를 치지 말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서 수춘의 포위는 더욱 급박하게 되었다. 제왕 이경달이 호주에 진을 치고 멀리 수주를 위하여 성원하였는데 군정은 모두 진각에게서 나왓고 이경달은 종이의 끝에 서명만 할 뿐이었으며, 군사 5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전할 뜻을 갖지 않았으며 장들은 진각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唐諸將請據險以邀周師,宋齊丘曰:「如此,則怨益深。」〈【章:十二行本「深」下有「不如縱之以德於敵,則兵易解也」十三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退齋校同。】〉乃命諸將各自保守,毋得擅出擊周兵。由是壽春之圍益急。齊王景達軍于濠州,遙為壽州聲援,軍政皆出於陳覺,景達署紙尾而已,擁兵五萬,無決戰意,〈嗚呼!比年襄陽之陷,得非援兵不進之罪也!〉將吏畏覺,無敢言者。

 

 ㉝. 9월 17일에 황상이 시중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근래에 왕조에서는 곡백을 징수하여 거두는데 대부분 수확하거나 방적을 마칠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마침내 삼사에 조서를 내려서 하세는 6월로, 추세는 10월로 징수하게 하니,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를 편하게 생각하였다.

 ㉝. 丙子,上謂侍臣:「近朝徵斂穀帛,多不俟收穫、紡績之畢。」〈「侍臣」之下有「曰」字,文意乃足。近朝,猶言近代也。朝,直遙翻;下同。〉乃詔三司,自今夏稅以六月,秋稅以十月起徵,〈五代會要曰:二稅起徵,皆以月一日。〉民間便之。

 

 

 ㉞. 산남동도절도사· 수태위· 겸중서령인 안심기는 양주에서 10여 년 동안 진수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들어와서 조현하니, 수태수를 제수하여 진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미 떠났는데, 황상이 제상에게 물었다.

 "경들이 그를 배웅하였는가?"

 대답하였다.

 "배웅하여 성의 남쪽까지 갔는데, 안심기가 성스러운 은혜에 깊이 감사하였습니다."

 ㉞. 山南東道節度使、守太尉兼中書令安審琦鎮襄州十餘年,〈漢天福十二年,安審琦鎮襄陽,至是十年矣。〉至是入朝,除守太師,遣還鎮。既行,上問宰相:「卿曹送之乎﹖」對曰:「送至城南,審琦深感聖恩。」〈五代以來,方鎮入朝者,或留不遣,或易置之;今加官遣還鎮,故感恩。〉

 

 황상이 말하였다.

 "근래의 왕조에서는 대부분이 진실로 믿고 제후들을 대우하지 아니하니 제후들 가운데 비록 충절을 다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길로 말미암지 못하였다. 제왕 된 사람은 다만 그 신의를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어찌 제후가 마음으로 귀부하지 않을까 걱정하겠는가?"

 上曰:「近朝多不以誠信待諸侯,諸侯雖有欲效忠節者,其道無由。王者但毋失其信,何患諸侯不歸心哉!」

 

 

 ㉟. 23일에 장영달이 주문을 올려서 당의 군사를 하채에서 패배시켰다고 하였다. 이때에 당은 다시 수군을 갖고 장영덕을 공격하였는데 장영덕은 밤중에 수영 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배 밑으로 들어 가서 쇠줄로 묶어 놓게 하고, 군사를 풀어서 그들을 치니 배는 나아가거나 물러날 수 없어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아주 많았다. 장영덕은 금대를 풀어서 수영 잘하는 사람에게 상으로 주었다.

 ㉟. 壬午,張永德奏敗唐兵于下蔡。〈敗,補邁翻。〉是時唐復以水軍攻永德,〈復,扶又翻。〉永德夜令善游者沒其船下,縻以鐵鎖,縱兵擊之,船不得進退,溺死者甚眾。永德解金帶以賞善游者。

 

 

 ㊲. 장영덕과 이중진은 서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장영덕이 비밀리에 표문을 올려서 이중진은 두 마음을 가졌다고 하니 황제는 이를 믿지 않았다.

 이때에 두 장수는 각기 많은 군사를 가지고 있어서 무리들은 마음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이중진이 하루는 혼자 말을 타고 장영덕으 군영으로 가서 조용하게 연회를 열고 술을 마시면서 장영덕에게 말하였다.

 ㊲. 張永德與李重進不相悅,永德密表重進有二心,帝不之信。時二將各擁重兵,眾心憂恐。重進一日單騎詣永德營,〈李重進時在壽州城下,張永德營下蔡。〉從容宴飲,謂永德曰:

 

 "나는 공과 더불어 다행스럽게 폐부로서 함께 장수가 되었는데, 어찌하여 서로 이처럼 의심하는 것이 깊습니까?"

 장영덕은 마음으로 마침내 풀어버리니 무리들의 마음도 역시 편안 해졌다. 당주가 이 소식을 듣고, 납환으로 이중진에게 편지를 보내어 후한 이익을 가지고 유혹하였는데, 그 편지는 모두 훼방하거나 반간하는 말들이어서 이중진은 이것을 상주하였다.

 「吾與公幸以肺附俱為將帥,〈從,千容翻;下同。李重進,太祖之甥;張永德,太祖之伲,故云然。〉奚相疑若此之深邪﹖」永德意乃解,眾心亦安。唐主聞之,以蠟丸遣重進,誘以厚利,其書皆謗毀及反間之語;〈遺,唯季翻。誘,以久翻。間,古莧翻。〉重進奏之。

 

 애초에, 당의 사자인 손성과 종모가 화에를 좇아서 대량에 도착하였는데 황제는 그를 아주 후하게 대우하였으며 매 조회 때마다 중서성의 관료들 뒤에 있게 하고, 때로는 불러서 보고 진한 술을 마시고 당의 일을 물었다. 손성은 다만 말하였다.

 "당주는 폐하의 신성한 무력을 두려워하며 폐하를 섬기는데 두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당의 납서를 얻고 나자 황제는 크게 화가 나서 손성을 불러서 그가 대답한 것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나무랐다. 손성이 정색을 하며 항의하는 말을 하고 죽여 달라고 할 뿐이었다. 당의 허실을 물었더니 대답하지 않았다.

 初,唐使者孫晟、鍾謨從帝至大梁,帝待之甚厚,每朝會,班於中書省官之後, 時召見,飲以醇酒,〈飲,於鴆翻。〉問以唐事。晟但言「唐主畏陛下神武,事陛下無二心。」及得唐蠟書,帝大怒,召晟,責以所對不實。晟正色抗辭,請死而 已。問以唐虛實,默不對。

 

 11월 17일에 황제는 도승지 조환에게 명하여 우구순원으로 손성을 호송하게 하고 다시 황제의 뜻을 가지고 그에게 묻게 하였으며, 조환이 그와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여러 순배를 돌자 조용히 그에게 물었지만 손성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조환이 마침내 말하였다.

 "칙명이 있었는데, 상공에게 죽음을 내리라 하오."

 十一月,乙巳,帝命都承旨曹翰送晟於右軍巡院,〈侍衛親軍分左右軍,各有巡院,以鞫繫囚。〉更以帝意問之;翰與之飲酒數行,從容問之,晟終不言。翰乃謂曰:「有敕,賜相公死。」〈以唐所授官稱之。〉

 

 손성은 정신과 얼굴색은 기뻐하며 포와 홀을 찾아가지고 남향하여 절을 하고 말하였다.

 "신은 삼가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겠습니다."

 마침내 형을 집행하였다. 아울러 그를 좇아온 사람 100여 명도 모두 죽이고 종모를 깎아 내려서 요주사마로 하였다. 이미 그렇게 하고 나서 황제는 손성이 충절한 것을 가련하게 생각하여 그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종무를 불러서 위위소경으로 제수하였다.

 晟神色怡然,索袍笏,整衣冠,南向拜曰:「臣謹以死報國。」乃就刑。〈索,山客翻。孫晟可謂盡節於所事矣。〉并從者百餘人皆殺之,〈從,才用翻。〉貶鍾謨耀州司馬。既而帝憐晟忠節,悔殺之,召謨,拜衛尉少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