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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匡胤(宋 太祖) /辛丑䄵大䨮節末候荔挺出(타래붓꽃의 싹이 나온다)1日(음11/14)己亥

solpee 2021. 12. 16. 05:46

《後周紀4 太祖 德 3年》 (丙辰, 956)

 

 ⑯. 당의 우위장군 육맹준이 상주(강소성)에서 부터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태주(강소성)로 가니 周의 병사들이 숨어서 달아났는데 육맹준은 그곳을 다시 빼앗고 진덕성을 파견하여 태주를 지키게 하였다. 육맹준은 나아가서 양주를 공격하며 촉강(양주 서북)에 주둔하였는데, 한령곤이 양주를 버리고 달아났다.

 ⑯. 唐右衛將軍陸孟俊自常州將兵萬餘人趣泰州,〈九域志:自常州北至泰州一百九十七里。〉周兵遁去,孟俊復取之,〈復取泰州。〉遣陳德誠戍泰州。孟俊進攻揚州,屯子蜀岡,韓令坤棄揚州走。〈蜀岡在揚州城西。揚州城在蜀岡東南,城之東南北皆平地,溝澮交貫,惟蜀岡諸山西接廬、滁。凡北兵南寇揚州,率循山而來,據高為壘以臨之。今陸孟俊據蜀岡以斷周兵援路,故韓令坤懼而走。〉

 

 황제가 장영덕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그곳을 구원하게 하니 한령곤은 다시 양주로 들어갔다. 황제는 조광윤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육합에 주둔하게 하였다. 조광윤이 명령하였다.

 "양주의 군사로 육합을 지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발을 잘라버려라."

 한령곤은 비로소 굳게 지킬 생각을 가졌다.

 帝遣張永德將兵救之,令坤復入揚州。〈援兵至,故復入揚州。〉帝又遣太祖皇帝將兵屯六合。〈六合縣,屬揚州,在州西北一百三十里。劉昫曰:六合,漢臨淮郡之堂邑縣,晉置秦郡,北齊置秦州,隋置方州,後廢,唐武德初置六合縣。〉太祖皇帝令曰:「揚州兵有過六合者,折其足!」〈自揚州西北歸,須過六合,故云然。折,而設翻。〉令坤始有固守之志。

 

 황제가 스스로 수춘에 도착한 이래로 여러 군대에게 주야로 성을 공격하게 명령하였으나 오래(3개월) 되어도 이기지 못하였는데, 마침 큰 비를 만나니 군영 안에는 물의 깊이가 몇 척이나 되었고, 공격도구와 사졸들 가운데 잃고 없어진 것이 자못 많았으며 양곡의 운반도 이어지지 않았고 이덕명은 시기를 놓치고 오지 않자, 마침내 회군을 논의하였다.

 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동쪽으로 호주로 행차하여 겉으로 수주는 이미 격파되었다고 말하라고 하자 이를 좇았다. 

 4월 7일에 황제는 수춘에서 회하를 돌아서 동쪽으로 가서 13일에 호주에 도착하였다.

 帝自至壽春以來,命諸軍晝夜攻城,久不克;會大雨,營中水深數尺,〈深,式浸翻。〉攻具及士卒失亡頗多,〈時周兵以方舟載禄,自淝河中流擊壽春城。又東巨竹數十萬竿,上施板屋,號曰「竹龍」,載甲士以攻之。會淝水暴漲,禄舟、竹龍皆漂向南岸,為唐兵所焚。〉糧運不繼,李德明失期不至,〈李德明歸至金陵被誅。〉乃議旋師。或勸帝東幸濠州,聲言壽州已破;從之。己巳,帝自壽春循淮而東,乙亥,至濠州。〈九域志:壽州,東至濠州三百八十里。〉

 

 한령곤은 성의 동쪽에서 당의 군사를 패배시키고 육맹준을 사로잡았다.

 애초에, 육맹준이 마희악을 폐출하고 마희숭을 세우면서 옛날 서주 자사인 양소운의 가족을 다 없애고 그 재산을 빼앗았는데, 양씨에게는 딸이 있었고 미인이어서 마희승에게 바쳤다.

 韓令坤敗唐兵於城東,〈此揚州城東也。敗,補邁翻。〉擒陸孟俊。初,孟俊之廢馬希萼立希崇也,〈事見二百九十卷太祖廣順元年。〉滅故舒州刺史楊昭惲之族而取其財,〈惲,於粉翻。薛史曰:楊昭惲,長沙人,父謚,事馬殷為節度行軍司馬。謚仲女為衡陽王夫人。希聲襲位,昭惲遷衡州刺史。自以地連戚里,積財貨,建大第,二子為牙內都將,少長豪富,任氣凌下,士大夫惡之。長沙兵亂,陸孟俊怒曰:「楊氏怙寵滅義,為國人所患久矣。」於是族滅楊氏。「舒」,當作「衡」。〉楊氏有女美,獻於希崇。

 

 한령곤이 양주에 들어가니 마희숭은 양씨를 한령곤에게 남겨주었고 한령곤은 그를 아꼈다. 이미 육맹준을 붙잡았는데 장차 형틀에 묶어서 황제가 있는 곳으로 호송하려고 하자, 양씨가 발 아래 있다가 홀연히 가슴을 치면서 통곡을 하자 한령곤이 놀라서 그에게 물으니 대답하였다.

 "육맹준은 옛날에 담주에 있었는데, 첩의 집안사람 200명을 죽였고, 오늘 그를 보니 청컨대 그들의 억울함을 갚게 해주십시오."

 한령곤은 마침내 그를 죽였다.

 令坤入揚州,希崇以楊氏遺令坤,令坤嬖之。〈遺,唯季翻。嬖,卑義翻,又必計翻,愛也,幸也。〉既獲孟俊,將械送帝所;楊氏在簾下,忽撫膺慟哭,令坤驚問之,對曰:「孟俊昔在潭州,殺妾家二百口,今日見之,請復其冤。」令坤乃殺之。〈史言人不可妄殺,雖女子亦能復讎。〉

 

 

 ⑰. 당의 제왕인 이경달은 군사 2만을 거느리고 과보(강소성)에서 장강을 건너서 육합에서 20여리 떨어진 곳에다 목책을 설치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제장들이 그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조광윤은 말하였다.

 "저들이 목책을 설치하고 스스로 굳게 하고 있는 것은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2천을 넘지 않는데 만약에 가서 그들을 친다면 저들은 우리의 무리가 적은 것을 볼 것이니,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쳐서 그들을 깨뜨려서 분명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⑰. 唐齊王景達將兵二萬自瓜步濟江,距六合二十餘里,設柵不進。諸將欲擊之,太祖皇帝曰:「彼設柵自固,懼我也。今吾眾不滿二千,若往擊之,則彼見吾眾寡矣;不如俟其來而擊之,破之必矣!」

 

 며칠을 있으니 당은 군사를 출동시켜서 육합으로 향하였는데, 조광윤은 분발하여 쳐서 그들을 대파하고 죽이거나 잡은 것이 거의 5천 명이었고, 나머지 무리들은 오히려 1만여이었는데, 달아나서 강을 건너가면서 배를 가지고 다투다가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아주 많아서, 이에 당이 정예의 병졸들은 다 없어졌다.

 居數日,唐出兵趣六合,〈趣,七喻翻。〉太祖皇帝奮擊,大破之,殺獲近五千人,〈近,其靳翻。〉餘眾尚萬餘,走渡江,爭舟溺死者甚眾,於是唐之精卒盡矣。

 

 이 싸움에서 사졸들 가운데는 힘을 다 쏟지 아니한 사람이 있었다. 조광윤은 겉으로 독려하는 체하면서 칼로 그 가죽 투구를 찍었다.

 다음날 그 가죽투구를 전체적으로 검열하여 보니 칼자국이 난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모두 이들을 목 베었다.

 이로부터 부병들 가운데 감히 죽기로 싸우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是戰也,士卒有不致力者。太祖皇帝陽為督戰,以劍斫其皮笠。明日,徧閱其皮笠,有劍跡者數十人,皆斬之,由是部兵莫敢不盡死。

 *. 이 전투는 심히 의문스럽다. 특별한 전술도 없었으면서 2천 명이 2만 명을 거의 전멸시켰을 뿐만아니라 승리한 후에도 상을 주기 보다는 벌만 주었다. 왜 승리하였으면 상만 줘도 오히려 부족할 것 같은데 2천명이 2만명을 상대하면서 제대로 싸우지 않은 병사가 수십 명이나 되어서 사형시켰다? 그것도 장수가 전투 지휘는 않고 제대로 싸우지 않는 수십 명의 병사들 투구에 칼집을 냈다니 믿을 수 있겠는가? 이 대목은 송태조 미화를 위한 사마광의 소설 같다.

 

 이보다 먼저 당주는 양주를 지키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사방에다 군사를 내어 이를 빼앗으라고 명령하였다.

 17일에 한령곤이 주문을 올려서 양주의 군대 1만여 명을 만두언(야주 동북 만복갑)에서 패배시키고 연주 자사 진진승을 붙잡앗다고 하였으며, 장영덕은 주문을 올려서 사주의 1만여 명을 곡개언에서 패배시켰다고 하였다.

 先是,唐主聞揚州失守,命四旁發兵取之。 〈先,悉薦翻。〉己卯,韓令坤奏敗揚〈【章:十二行本「揚」作「楚」;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州兵萬餘人於灣頭堰,〈九域志:揚州江都縣有灣 頭鎮,在今揚州城北十五里。敗,補邁翻。〉獲漣州刺史秦進崇;〈唐蓋置漣州於漣水縣。九域志:漣水,西南至楚州六十里。〉張永德奏敗泗州〈【章:十二行本 「州」下有「兵」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萬餘人於曲溪堰。〈曲溪,在盱眙縣西南十里。按昭信圖經:曲溪堰,亦謂之新河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