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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의 北漢征伐과 遼의 侵略/辛丑秊末候閉塞成冬2日(陰10/29)乙酉

solpee 2021. 12. 3. 11:02

《後周紀3 太祖 德 元年》 (甲寅, 954)

 

 ②. 5월 3일에 황제가 진양성 아래에 도착하였는데 기치가 성을 40리 둘러쌌다.

 양곤(遼將)은 북한의 대주방어사인 정처겸이 주에 두 마음을 품었다고 의심하고 불러서 더불어 일을 계획하지고 하고 그를 도모하려고 하였는데, 정처겸은 이를 알고 가지 않았다.

 양곤이 요기 수십으로 하여금 그의 성문을 지키게 하였는데, 정처겸이 그를 죽이고 이어서 문을 닫고 양곤을 막으니, 요황은 그가 공로를 세우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그를 가두었다. 정처겸은 성을 들억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4일에 대주에 정색군을 설치하고 정처겸을 절도사로 삼았다.

 ②. 丙子,帝至晉陽城下,〈帝自上黨趣晉陽,七日而至。〉旗幟環城四十里。〈史言周兵之盛。幟,昌志翻。環,音宦。〉楊哀疑北漢代州防禦使鄭處謙貳于周,召與計事,欲圖之;處謙知之,不往。袞使胡騎數十守其城門,處謙殺之,因閉門拒袞;袞奔歸契丹。契丹主怒其無功,囚之。處謙舉城來降。丁丑,置靜塞軍於代州,以鄭處謙為節度使。〈創置方鎮以懷撫鄭處謙。處,昌呂翻。〉

 

 요의 수천 기병이 흔과 대주 사이에 주둔하고서 북한의 후원이 되었는데, 7일에 부언경 등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1만여를 거느리고 이를 치게 하여 부언경이 흔주에 들어가니 요는 물러나서 흔구를 지켰다.

 14일에 녕화군을 분주에 설치하고, 석· 심· 두 주를 그곳에 예속시켰다.

 대주의 장수인 상규와 해문우가 정처겸을 살해하고 무고하는 주문을 올려서 몰래 요와 연락하였다고 하였다.

 契丹數千騎屯忻、代之間,為北漢之援,庚辰,遣符彥卿等將步騎萬餘擊之;彥卿入忻州,契丹退保忻口。〈九域志:忻州秀容縣有忻口寨,在石嶺關南。〉

丁亥,置寧化軍於汾州,以石、沁二州隸之。

代州將桑珪、解文遇殺鄭處謙,〈沁,七鴆翻。解,戶買翻,姓也。姓苑云:自唐叔虞食邑於解;晉有解狐、解揚。〉誣奏云潛通契丹。

 

 부언경이 주문을 올려서 군사를 더 보태 달라고 청하였는데, 20일에 이균과 장영덕을 파견하여 군사 3천을 거느리고 그곳에 가게 하였다.

 요의 유기는 그때에 흔주의 성 아래에 도착하였는데, 23일에 부언경은 제장들과 더불어 진을 치고 이를 기다렸다.

 符彥卿奏請益兵,癸巳,遣李筠、張永德將兵三千赴之。契丹游騎時至忻州城下,丙申,彥卿與諸將陳以待之。〈陳,讀曰陣。〉

 

 사언초는 2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었는데 거란 사람들을 만나서 더불어 전투하였고, 이균이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이어주어 거란 사람 2천 명을 죽였다.

 사언초는 용감한 것을 믿고 가볍게 나아갔는데, 대군에서 떨어져서 점점 멀어졌다가 종과부적하여 거란 사람들에게 살해 되었고, 이균은 겨우 몸만 벗어나니 주의 군사들 가운데 죽거나 다친 사람이 아주 많았다.

 부언경은 물러나서 흔주를 지키다가 조금 후에 군사를 이끌고 진양으로 돌아왔다.

 史彥超將二十騎為前鋒,〈二十太少,恐當作「二千」。〉遇契丹,與戰,李筠引兵繼之,殺契丹二千人。彥超恃勇輕進,去大軍浸遠,眾寡不敵,為契丹所殺,筠僅以身免,周兵死傷甚眾。彥卿退保忻州,尋引兵還晉陽。〈還,從宣翻,又如字;下同。〉

 

 부주방어사 절덕의가 주병을 거느리고 와서 조현하였는데, 28일에 다시 영안군을 부주에 설치하고 절덕의를 절도사로 삼았다.

 府州防禦使折德扆將州兵來朝;〈將,即亮翻。〉辛丑,復置永安軍於府州,〈復,扶又翻。漢乾祐二年罷永安軍,見二百八十九卷。〉以德扆為節度使。

 

 이때에 대대적으로병사와 민부를 징발하였는데 동쪽으로는 회와 맹에서부터 서쪽으로는 포와 섬에 이르렀지만 진양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으며, 마침 오랜 비를 만나서 사졸들이 지치고 병들어서 마침내 이끌고 돌아오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時大發兵夫,東自懷、孟,西及蒲、陝,以攻晉陽,不克;會久雨,士卒疲病,〈【章:十二行本「病」下有「及史彥超死」五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退齋校同。】〉乃議引還。〈陝,失冉翻。考異曰:世宗實錄:「徵懷、孟、蒲、陝丁夫數萬攻城,旦夕之間,期於必取。會大雨,軍士勞苦,又聞忻口之師不振,帝數日憂沮不食,遂決還京之意。」晉陽見聞錄:「六月旦,周師南轅返獏,惟數百,間之以步卒千人,長槍赤甲,衒趫捷跳梁於城隅,晡晚殺行而抽退。」今從世宗實錄。〉

 

 애초에, 왕득중이 거란에서 돌아오니, 바로 주의 군사가 진양을 포위하고 있어서 대주에 머물러 있었다. 상규가 정처겸을 죽이게 되자 왕득중을 가두어서 주의 군대로 호송하였는데, 황제는 이를 석방하고, 허리띠와 말을 하사하면서 물었다.

 "오랑캐의 군사가 어느 때에 도착하겠는가?"

 왕득중이 말하였다.

 "신은 명령 받기를 양곤을 호송하라고 하였자 다른 것은 요구한 것이 없습니다."

  初,王得中返自契丹,〈北漢主遣王得中求救於契丹,見上卷本年三月。〉值周兵圍晉陽,留止代州。及桑珪殺鄭處謙,得中,送于周軍,帝釋之,賜以帶、馬,問「虜兵何時當至﹖」得中曰:「臣受命送楊袞,他無所求。」

 

 어떤 사람이 왕득중에게 말하였다.

 "거란이 공에게 군사를 내겠다고 허락하였다는데, 공이 사실대로 보고하지 아니하니, 거란의 병사가 바로 도착하면 공은 위태함이 없겠소?"

 왕득중이 숨을 크게 쉬고서 말하였다.

 "나는 유씨의 녹을 먹고 있고, 늙은 어머니는 포위 된 지역 안에 있는데, 만약에 사실대로 보고하면 주인들이 반드시 군사를 발동하여 험한 곳 점거하고 이를 막을 것이며, 이와 같이 된다면 집안과 나라가 둘 다 망할 것인데, 내가 혼자 살아남아서 무슨 이득이 있겠소. 내 몸을 죽여서 집안과 나라를 온전하게 하여 얻은 것이 많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오."

 或謂得中曰:「契丹許公發兵,公不以實告,契丹兵即至,公得無危乎﹖」得中太息曰:「吾食劉氏祿,有老母在圍中,若以實告,周人必發兵據險以拒之,如此;家國兩亡,吾獨生何益!不若殺身以全家國,所得多矣!」甲辰,帝以得中欺罔,縊殺之。〈王得中之死,知所惡有甚於死者也。〉

 

 6월 2일에 황제는 왕득중이 속였기 때문에 그를 목매여 죽였다.

 3일에 황제는 진양을 출발하였다. 광국절도사 약원복이 황제에게 말하였다.

 "진군하기는 쉬우나, 퇴군하기는 어렵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짐이 한가지로 경에게 위임하겠소."

 약원복이 마침내 군사를 챙겨서 열을 만들고 전군이 되었다. 

 북한은 과연 군사를 내어 뒤를 쫓았다. 약원복이 이들을 쳐서 도망하게 하였다.

 乙巳,帝發晉陽。匡國節度使藥元福言於帝曰:「進軍易,退軍難。」〈進軍者,或乘初至之銳,或乘屢勝之勢,敵人自畏讋自守,不敢迎戰,故易。退軍者,士有歸志,敵人據險遮其前,率眾躡其後,輜重老弱皆足為吾之累,故難。易,以豉翻。〉帝曰:「朕一以委卿。」元福乃勒兵成列而殿。〈殿,丁練翻。〉北漢果出兵追躡,元福擊走之。

 

 그러나 군사들은 아직도 바쁘고 급하여 추량 수십만이 성 아래에 있었으나 이것을 모두 태워버렸다. 군대 안에서는 와전된 말에 서로 놀라고 혹은 서로 사납게 약탈하니, 군수물자를 잃어버린 것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얻었던 북한의 주현과 주에서 설치하였던 자사등은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오직 대주의 상규만은 이미 북한을 배반하였고, 또 감히 주로 복귀하지도 못하여 농성하며 스스로 지켰는데, 북한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공격하여 그곳을 점령하였다.

 然軍還忽遽,〈還,從宣翻。〉芻糧數十萬在城下,悉焚棄之。軍中訛言相驚,或相剽掠,軍須失亡不可勝計。〈剽,匹妙翻。凡行軍所欲得以為用者,皆謂之軍須。勝,音升。〉所得北漢州縣,周所置刺史等皆棄城走,惟代州桑珪既叛北漢,又不敢歸周,嬰城自守,北漢遣兵攻拔之。〈前所謂都府未拔,雖得屬郡而無益者,要其終也。〉

 

 13일에 황제는 노주에 도착하엿고, 22일에 정주에 도착하였고, 24일에 숭릉을 배알하였고, 28일에 대량에 이르렀다.

 乙酉,帝至潞州;甲子,至鄭州;〈以乙巳發晉陽甲子至鄭州考之;中間不應以乙酉至潞州,恐是乙卯。〉丙寅,謁嵩陵;〈嵩陵復土,帝適有軍旅之事,不獲親之;此其謁陵,與彝制謁陵其情有不同者。〉庚午,至大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