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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의 晉 合幷 1. / 立冬節中候地始凍2日(陰10/9 )乙丑.

solpee 2021. 11. 12. 11:05

《後漢紀1 高祖 天福 12年》〈丁未· 947

 

 ⑤. 정월 5일에 요에서는 진주(晉主: 황제 석중귀)를 부의후로 삼고 황룡부에 안치하였다. 황룡부는 즉 모용씨의 화룡성이다. 요황제가 이태후에게 말하였다.

 "듣건대 석중귀는 어머니의 명령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는데 스스로 편안한대로 하여 더불어 가지 않겠다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태후가 말하였다.

 "석중귀는 첩을 섬기면서 심히 공손하였습니다. 실수한 것은 선황의 뜻을 어기고 두 나라의 우호관계를 끊은 것뿐이었습니다. 지금 다행스럽게도 큰 은혜를 입어 생명을 온전히 하고 가문을 보전하였으니 어미가 아들을 따르지 않으면 누구에게 돌아가기를 바라겠습니까?"

 ⑤. 辛卯,契丹以晉主為負義侯,置於黃龍府。黃龍府,即慕容氏和龍城也。〈歐史曰:自幽州行十餘日,過平州;出榆關,行沙磧中,七八日至錦州;又行五六日,過海北州;又行十餘日,渡遼水至勃海國鐵州;又行七八日,過南海府,遂至黃龍府。按契丹後改黃龍府為隆州,北至混同江一百三十里。又按慕容氏之和龍城,若據晉書及邳道元水經註,當在漢遼西郡界。今晉主陷蕃,渡遼水而後至黃龍府,又其地近混同江,疑非慕容氏之和龍城。〉契丹主使謂李太后曰:「聞重貴不用母命以至於此,可求自便,勿與俱行。」太后曰:「重貴事妾甚謹。所失者,違先君之志,絕兩國之歡耳。今幸蒙大恩,全生保家,母不隨子,欲何所歸!」

 

 7일에 요는 진주와 그의 집안들을 봉선사로 옮겼으며 대동절도사· 겸시중인 하내 사람 최정훈을 파견하여 군사로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요황제가 자주 사자를  파견하여 안부를 묻게 하였는데, 진주는 매번 사자가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모든 가족이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癸巳,契丹遷晉主及其家人於封禪寺,遣大同節度使兼侍中〈此契丹所授官。〉河內崔廷勳以兵守之。〈宋白曰:崔廷勳本河內人,少陷虜。〉契丹主數遣使存問,〈數,所角翻。〉晉主每聞使至,舉家憂恐。〈恐見殺也。〉

 

 당시에 비와 눈이 열흘 동안 계속 내리자 밖에서 공억(供億:재난구휼)할 것이 없어 아래위의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렸다. 태후가 사람을 시켜서 절에 있는 승려에게 말하게 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곳에서 승려 수만 명에게 밥을 먹였는데 오늘 다만 한명이라도 생각해줄 사람이 없는가?"

 승려가 사양하였다.

 "오랑캐의 생각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감히 음식을 바치지 못하겠습니다."

 진주가 몰래 지키는 사람에게 빌자, 마침내 조금 먹을 수 었었다.

 時雨雪連旬,外無供億,〈毛居正曰:供儗有儲偫之意。供億,猶供儗也。億,度也;料度其所須之物,隨多少而供之,以待其乏也。〉上下凍餒。太后使人謂寺僧曰:「吾嘗於此飯僧數萬,〈飯,扶晚翻。〉今日獨無一人相念邪!」僧辭以「虜意難測,不敢獻食。」〈噫!孰知緇黃變色,其徒所為,有甚於不敢獻食者耶!有國有家者,崇奉釋氏以求福田利益,可以監矣。〉晉主陰祈守者,乃稍得食。

 

 이날에 요황제가 적강에서부터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왔으며, 도성의 여러 문과 궁금문은 모두 요군이 지키고 보위하였는데 낮밤으로 병장기를 풀어 놓지 않았다. 문에서 개의 고기를 찢고 뜰에서 장대로 양가죽을 달아매어 엽승(厭勝: 비방으로 액운을 물리치는 것)하였다. 요황재가 진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지금으로부터 갑옷과 병장기를 수선하지 말고 전마를 사고팔지 않으며 부세를 가볍게 하고 부역을 줄이면 천하가 태평할 것이다."

 是日,契丹主自赤岡引兵入宮,〈入晉宮。〉都城諸門及宮禁門,皆以契丹守衛,晝夜不釋兵仗。〈懼有變也。〉磔犬於門,以竿懸羊皮於庭為厭勝。〈磔,陟格翻。厭,於葉翻。〉契丹主謂〈【章:十二行本「謂」下有「晉」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退齋校同。】〉群臣曰:「自今不脩甲兵,不市戰馬,輕賦省役,天下太平矣。」〈談何容易!斯言甫脫口,而打草榖繼之矣,天下果太平乎!〉

 

 동경(개봉)을 철폐하고 개봉부를 강등하여 변주라 하고 윤을 방어사로 하였다.

 9일에 요황제가 중국의 의관으로 고쳐 입고, 백관들이 문안드리는 것은 옛날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

 조연수와 장려는 모두 이숭의 재주를 천거하였는데, 마침 위승절도사 풍도가 등주에서부터 들어와서 조현하자 황제가 평소 두 사람의 이름을 들은터라 그들을 모두 예의로 존중하였다.

 얼마 안 있다가 이숭을 태자태사로 삼아 추밀사에 충임하였고, 풍도를 수태부로 삼고 추밀원에서 공경하고 문후하면서 고문에 대비하게 하였다.

 廢東京,降開封府為汴州,尹為防禦使。乙未,契丹主改服中國衣冠,百官起居皆如舊制。〈史言契丹主猶知用夏變夷。〉

趙延壽、張礪共薦李崧之才;會威勝節度使馮道自鄧州入朝,契丹主素聞二人名,皆禮重之。〈二人歷唐、晉,位極人臣,國亡不能死,視其君如路人,何足重哉!〉未幾,以崧為太子太師,充樞密使;道守太傅,於樞密院祗候,以備顧問。

 

 황제는 사자를 나누어 파견하여서 조서를 가지고 진의 번진들에게 내려 주엇는데, 진의 번진들은 표문을 올려 칭신하며 부름을 입은 사람으로 말을 달려서 도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창의절도사 사광위는 경주를 점거하고 명령을 받지 않았다. 사광위는 사건당의 아들이다. 용무절도사 하건중은 요의 사자를 목 베고 秦· 階· 成 세 주를 가지고 촉에 항복하였다.

 契丹主分遣使者,以詔書賜晉之藩鎮;晉之藩鎮爭上表稱臣,被召者無不奔馳而至。〈被,皮義翻。〉惟彰義節度使史匡威據涇州不受命。匡威,建瑭之子也。〈史建瑭事晉王克用以及莊宗,皆有戰功。〉雄武節度使何重建斬契丹使者,以秦、階、成三州降蜀。〈史匡威不降契丹,以其地遠,契丹兵威不能至也。何重建則以其鎮與蜀接境,遂棄遼而附蜀耳。〉

 

 애초에, 두중위는 이미 진의 군사를 거느리고 요에 항복하고 나자, 요황제가 그들의 갑옷과 병장기 수백만 개를 모두 거두어 항주에 쌓아두고 수만 마리의 말을 몰고 그의 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두중위를 파견하여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자기를 좇아서 남쪽으로 가게 하였다. 하에 이르자 요황제는 진의 군사가 많았으므로 그들이 변고를 일으킬까 두려워하여모두 오랑캐 기병으로 끌어안아서 그들을 황하의 흐르는 물에 잡아넣으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간하였다.

 初,杜重威既以晉軍降契丹,〈杜重威初避晉主重貴名,去「重」,單名「威」。及晉既亡國,重威即復舊名;其忘恩背主,此特末節耳。〉契丹主悉收其鎧仗數百萬貯恆州,〈貯,丁呂翻。恆,戶登翻。〉驅馬數萬歸其國,遣重威將其眾從己而南。〈將,即亮翻。〉及河,契丹主以晉兵之眾,恐其為變,欲悉以胡騎擁而納之河流。或諫曰:

 

 "진의 군사들 가운데 다른 곳에 있는 사람이 오히려 많습니다. 저들이 '항복한 사람은 모조리 죽인다.' 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모두 명령을 거부할 것입니다. 또 이들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이 계책을 생각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요황제가 마침내 두중위로 하여금 그의 무리를 가지고 진교에 주둔하게 하였다. 마침 오래도록 눈이 내렸고 관부에서는 공급하는 것이 없게 되자 사졸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렸고 모두 두중위를 원망하고서로 모여서 울었으며, 두중위가 매번 나갈 때마다 길옆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욕하였다.

 「晉兵在他所者尚多,彼聞降者盡死,必皆拒命。〈【章:十二行本「命」下有「為患」二字;乙十一行本同。】〉不若且撫之,徐思其策。」契丹主乃使重威以其眾屯陳橋。〈陳橋在陳橋門外,有陳橋驛。〉會久雪,官無所給,士卒凍餒,咸怨重威,相聚而泣;重威每出,道旁人皆罵之。

 

 요황제가 여전히 진의 군사를 죽이려고 하였다. 조연수가 황제에게 말하였다.

 "황제께서는 친히 시석을 무릅쓰고 진국을 빼앗았는데 스스로 그들을 소유하시려는 것입니까? 장차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것을 빼앗은 것입니까?"

 황제가 얼굴을 변하며 말하였다.

 "짐이 온 나라를 들어서 남쪽을 정벌하면서 5년 동안 갑옷을 벗지 아니하고서 겨우 이를 얻을 수 있었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위해서이겠는가?"

 契丹主猶欲誅晉兵。趙延壽言於契丹主曰:「皇帝親冒矢石以取晉國,欲自有之乎,將為他人取之乎﹖」〈冒,莫北翻。為,于偽翻;下同。趙延壽志在帝中國,以此言覘契丹主之意,不特為晉兵發也。〉契丹主變色曰:「朕舉國南征,五年不解甲,〈天福八年,契丹始攻晉,至是五年。〉僅能得之,豈為他人乎!」〈趙延壽聞契丹主此言,可以絕望矣。〉

 

 조연수가 말하였다.

 "진국 남쪽에는 당이 있고 서쪽에는 촉이 있어서 항상 원수가 되고 있는데 황제께서도 역시 이를 아시는지요?"

 말하였다.

 "이를 알고 있소."

 조연수가 말하였다.

 "진국은 동쪽으로 흔(忻: 산동 임흔)과 밀(密: 산동 제성)에서부터 서쪽으로 진(秦: 감숙 진안 서북)과 봉(鳳: 섬서 봉현)까지 길이가 수천 리를 뻗어 잇는데, 오와 촉에 변경을 가지고 잇어서 항상 군사를 거느리고 그곳에서 수자리를 서고 있습니다. 남방은 덥고 습기가 많아 상국의 사람들이 살 수 없습니다.

 延壽曰:「晉國南有唐,西有蜀,常為仇敵,皇帝亦知之乎﹖」曰:「知之。」延壽曰:「晉國東自沂、密,西及奏、鳳,延袤數千里,〈袤,音茂。〉邊於吳、蜀,常以兵戍之。南方暑濕,上國之人不能居也。〈時偏方割據者,謂中原為上國。晉奉契丹,又稱契丹為上國。〉

 

 다른 날에 거가가 북쪽으로 돌아가시면 진국이 이와 같이 크기 때문에 이를 지킬 군사들이 없으며, 오와 촉은 서로 더불어 빈틈을 타서 침입할 것이며, 이와 같다면 어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이를 빼앗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나는 알지 못하겠소.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겠소?"

 조연수가 말하였다.

 "진교에서 항복한 사졸들은 나누어서 남쪽 변경에서 지키게 할 수 있다면 오와 촉은 걱정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他日車駕北歸,以晉國如此之大,無兵守之,吳、蜀必相與乘虛入寇,如此,豈非為他人取之乎﹖」契丹主曰:「我不知也。然則柰何﹖」延壽曰:「陳橋降卒,可分以戍南邊,則吳、蜀不能為患矣。」

 

 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옛날에 상당에 잇으면서 자르고 나누는 것에서 실수하여 당의 군사를 모두 진에 주었소. 이미 그렇게 하고 나서 돌아갔더니 원수가 되어 북쪽을 향해서 나와 더불어 싸웠고, 여러 해 동안 고생하며 부지런하여 겨우 그들을 이길 수 있었소. 지금 다행히 나의 손에 들어왓으니 이런 때를 이용하여 그들을 모두 제거하지 아니하고 다시 남겨두어서 후환이 되게 할 수 있겠소?"

 契丹主曰:「吾昔在上黨,失於斷割,悉以唐兵授晉。〈事見二百八十卷晉高祖天福元年。斷,丁亂翻。〉既而返為寇讎,北向與吾戰,辛勤累年,僅能勝之。今幸入吾手,不因此時悉除之,豈可復留以為後患乎﹖」〈復,扶又翻。〉

 

 조연수가 말하였다.

 "저번에 진의 군사를 하남에 남기면서 그의 처자를 인질로 삼지 않아서 이런 걱정거리를 갖게 된 것입니다. 지금 만약 그 집안을 항· 정· 운· 삭 사이로 모두 옮기고 매년 번을 나누어 남쪽 변경을 지키게 한다면 어찌 그들이 변고를 일으킬까 걱정하겠습니까? 이것이 상책입니다."

 황제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좋소! 오직 대왕만이 그것을 처리하시오."

 이로 말미암아 진교의 군사들은 비로소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며 나누어 파견하여 군영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延壽曰:「曏留晉兵於河南,不質其妻子,〈質,音致。〉故有此憂。今若悉徙其家於恆、定、雲、朔之間,每歲分番使戍南邊,何憂其為變哉!此上策也。」契丹主悅曰:「善!惟大王所以處之。」〈契丹封趙延壽為燕王,故稱之為大王。處,昌呂翻。〉由是陳橋兵始得免,分遣還營。

 

 ⑦. 17일에 진주는 이태후· 안태비· 풍후 그리고 동생인 풍예· 아들인 석연후· 석연보와 더불어 모두 북쪽으로 옮겨갔으며, 후궁과 좌우에서 좇는 사람은 100여 명이었다. 용에서는 300명의 기병을 파견하여서 그들을 도우며 호송하게 하였고, 또 진의 중서령인 조영· 추밀사인 풍옥· 마군도지휘사인 이언도를 파견하여 그들과 더불어 함께하게 하였다.

 ⑦. 癸卯,晉主與李太后、安太妃、馮后及弟睿、子延煦、延寶俱北遷,後宮左右從者百餘人。〈從,才用翻。〉契丹遣三百騎援送之;〈援送者,送其行以為防援。〉又遣晉中書令趙瑩、樞密使馮玉、馬軍都指揮使李彥韜與之俱。

 

 진주는 길에 잇는데, 음식 올리는 것이 이어지지 않았으며, 어떤 때에는 태후와 더불어 모두 음식이 끊어졌어도 옛날의 신하들 가운데 감히 나와서 알현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자주 자사 이곡만이 길에서 영접하고 알현하니, 서로 마주 대하고 눈물을 흘렸다.

 晉主在塗,供饋不繼,或時與太后俱絕食,舊臣無敢進謁者。獨磁州刺史李榖迎謁於路,相對泣下。

 

 이곡이 말하였다.

 "신은 꼴이 아니어서 폐하에게 빚을 졌습니다."

 이어서 재물을 기울여 바쳤다.

 진주는 중도교에 도착하여 두중위의 영채를 보자, 탄식하며 말하였다.

 "하늘이시여! 우리 가문이 무슨 죄를 져서 이 도적놈에게 파괴되었습니까?"

 통곡하다가 떠나갔다.

 榖曰:「臣無狀,負陛下。」因傾貲以獻。〈天下之士,苟有所負者,其所為必有異於人。磁,牆之翻。〉

晉主至中度橋,見杜重威寨,歎曰:「天乎!我家何負,為此賊所破!」慟哭而去。〈於晉之時,通國上下皆知杜重威之不可用,乃違眾用之以致亡國。詩云:「啜其泣矣,何嗟及矣。」今至於慟,庸有及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