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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 侵攻과 晉 滅亡 2. / 立冬節中候地始凍(땅이 얼기 시작)1日(陰10/8 )甲子.

solpee 2021. 11. 9. 18:54

《後晉紀6 齊王 開運 3年》〈丙午· 946

 

 16일에 황제는 비로소 두위 등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날 저녁에 또 장언택이 활주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송· 풍옥· 이언도를 불러 금중에 들어가서 일을 계획하게 하고, 유지원에게 조서를 내려서 군사를 징발하여 들어와서 구원하라고 하려고 하였다.

 壬申,帝始聞杜威等降;是夕,又聞彥澤至滑州,召李崧、馮玉、李彥韜入禁中計 事,欲詔劉知遠發兵入援。〈太原距洛陽一千二百里,洛陽至大梁又二百八十里,就使劉知遠聞命投袂而起亦無及矣。〉

 

 17일에 아직 날이 밝지 않았는데, 장언택이 봉구문에서 관문을 부수고 들어오니 이언도가 금군 500을 거느리고 그들에게 나아갔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 장언택은 명덕문 밖에서 군사를 정돈시키니 성 안은 크게 시끄러웠다.

 癸酉,未明,彥澤自封丘門斬關而入,李彥 韜帥禁兵丕百赴之,不能遏。〈帥,讀曰率。〉彥澤頓兵明德門外,〈五代會要日:明德門,大梁皇城南門。薛史:天福三年十月,改大寧宮門為明德門。〉城中大擾。

 

 황제는 궁 안에서 불이 나자 스스로 검을 지니고 후궁 10여 명을 몰아서 장차 불난 곳으로 향하려다가 친군의 장수인 설초에게 붙잡혔다. 얼마 안 있어 장언택이 관인문에서부터 요황제와 태후의 편지를 전달하여 그를 위로하고 어루만졌고, 또 상유한과 경연광을 부르니, 황제는 마침내 불을 끄라고 명령하고 궁성의 문들을 모두 열게 하였다.

 帝於宮中起火,自攜劍驅後宮十餘人將赴火,為親軍將薛超所持。俄而彥澤自寬仁門傳契丹主與太后書慰撫之,〈五代會要曰:大梁皇城之東門為寬 仁門。〉且召桑維翰、景延廣,帝乃命滅火,悉開宮城門。

 

 황제는 어원 안에 앉아서 후비들과 서로 모여서 눈물을 흘렸으며 한림학사 범질을 불러 항복하는 표문을 기초하게 하고 스스로 말하였다.

 "손자 아이인 신 석중귀는 재앙이 이르러 정신이 혼미하고, 운명이 다하여 하늘이 망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태후와 처인 풍씨는 집안사람들을 거느리고 교야에서 면박하고 차례로 대죄하고 있습니다. 아들인 진녕절도사 석연후와 위신절도사 석연보가 국보 하나와 금인 세 개를 받들고 나가서 영접합니다."

 태후도 역시 표문을 올려 '신부이씨첩' 이라 칭하였다.

 帝坐苑中,與后妃相聚而泣,召翰林學士范質草降表,自稱「孫男臣重貴,禍至神惑,運盡天亡。今與太 后及妻馮氏,舉族於郊野面縳待罪次。遣男鎮寧節度使延煦,威信節度使延寶,奉國寶一,金印三出迎。」〈國寶,即高祖天福三年所制受命寶也。煦,吁,句翻。〉太后亦上表稱「新婦李氏妾」。〈臣妾之辱,惟晉、宋為然。嗚呼,痛哉!上,時掌翻。〉

 

 부주아가 들어와서 요황제의 명령을 선포하자 황제는 황포를 벗고 흰 적삼을 입고서 두 번 절하고 선서를 받으니,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황제는 장언택을 불러 더불어 일을 계획하려고 하였다. 장언택이 말하였다.

 "신은 폐하를 알현할 면목이 없습니다."

 황제가 다시 그를 불렀으나, 장언택은 미소를 지으면서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傅住兒入宣契丹立命,帝脫黃袍,服素衫,再拜受宣,左右皆掩泣。帝使召張彥澤, 欲與計事。彥澤曰:「臣無面目見陛下。」帝復召之,〈復,扶又翻。〉彥澤微笑不應。

 

 어떤 사람이 상유한에게 도망갈 것을 권고하였다. 상유한이 말하였다.

 "나는 대신인데 도망간들 장차 어디로 가겠소?"

 앉아서 명령을 그다렸다. 장언택이 황제의 명령을 가지고 상유한을 부르니 상유한이 천가에 이르러서 이숭을 만났으며, 말을 멈추고 대화가 아직 마치지도 않았는데 어떤 군리가 말  앞에서 상유한에게 읍하고 시이사로 향하여 걸어갔다.

 或勸桑翰逃去。維翰曰「吾大臣,逃將安之!」坐而俟命。彥澤以帝命召維翰,維翰至天街,〈宮城正南門外之都街,謂之天街,經途也。〉遇李崧,駐馬語未畢,有軍吏於馬前揖維翰赴侍衛司。〈揖赴侍衛司,示將囚繫之也。一曰:時張彥澤處侍衛司署舍。〉

 

 상유한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아차리고 돌아보며 이숭에게 말하였다.

 "시중께서 나라를 맡으셨다가 오늘 나라가 망하였는데 도리어 나 상유한으로 혀여금 죽으라고 하니 어찌 된 일이오?"

 이숭에게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장언택이 거만하게 앉아서 상유한을 보니 상유한이 그를 책망하여 말하였다.

 "지난해에 공을 죄인들 속에서 빼내어 다시 커다란 진을 관장하게 하고 병권을 주었는데, 어찌 마침내 은혜를 저버리고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장언택은 응답하지 않고 군사를 보내어 그를 지키게 하였다.

 維翰知不免,顧謂崧曰:「侍中當國,〈李崧官侍中。〉今日國亡,反令維翰死之,何也﹖」崧有愧色。彥澤踞坐見維翰,維翰責之曰:「去年拔公於罪人之中,復領大鎮,授以兵權,〈謂高祖時朝野皆請誅張彥澤,自涇州罷宿衛;去年桑維翰拔使同禦契丹,復領彰國節度使,帥兵戍常山。〉何乃負恩至此!」彥澤無以應,遣兵守之。

 

 선휘사 맹승희는 평소 아첨하고 재주를 피워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이에 이르러 황제가 맹승희를 불러서 그와 더불어 모의를 하려고 하자 맹승희가 숨어서 오지 않았지만 장언택이 체포하여 그를 죽였다.

 장언택이 군사를 풀어 대대적으로 노략질하게 하니 가난한 백성들이 이를 틈타고 역시 다투어 부잣집에 들어가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재물을 빼앗았으며, 이틀이 되어서야 바야흐로 중지하였으나 도성은 이로 인하여 하나같이 텅 비었다.

 宣徽使孟承誨,素以佞巧有寵於帝,至是,帝召承誨,欲與之謀,承誨伏匿不至;張彥澤捕而殺之。

彥澤縱兵大掠,貧民乘之,亦爭入富室,殺人取其貨,二日方止,都城為之一空。〈為,于偽翻;下為主同。〉

 

 장언택이 사는 곳에는 산같이 쌓였으며, 스스로 요에게 공로를 세웠다고 생각하면서 낮과 밤으로 술과 음악으로 스스로 즐겼으며, 나가고 들어오는데 좇는 기병들이 항상 수백 명이었으며, 그의 기치에는 모두 '赤心爲主' 라는 표제가 있어 보는 사람들이 그것을 비웃었다.

 彥澤所居山〈【章:十二行本「山」上有「寶貨」二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退齋校同。】〉積,自謂有功於契丹,〈張彥澤自以疾驅入汴為功。〉晝夜以酒樂自娛,出入騎從常數百人,〈從,才用翻。〉其旗幟皆題「赤心為主」,見者笑之。

 

 군사들이 죄인을 사로잡아서 앞에 도착하면 정언택은 위반한 것을 묻지 않고 다만 눈을 부릅뜨고 삼지를 세우면 즉시 몰고 나가서 그들의 허리와 목을 잘랐다. 장언택은 평소 합문사인 고훈과 더불어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술 취한 틈을 타서 그의 집에 도착하여 그의 숙부와 동생을 죽이고 이르 문 앞에다 효시하였다. 사민들은 춥지 않은데도 벌벌 떨었다.

 軍士擒罪人至,前彥澤不問所犯,但瞋目豎三指,即驅出斷其腰領。〈瞋,昌真翻。豎,而主翻。三指,中指也;示以中指,言中斷之,即腰斬也。此蓋五代軍中虐帥相仍為此以示其下,罪之輕重,決於一指屈伸之間。及漢史弘肇掌兵,有抵罪者,弘肇以三指示吏,即腲斬之,正此類也。〉彥澤素與閤門使高勳不協,乘醉至其家,殺其叔父及弟,尸諸門首。士民不寒而慄。

 

 중서사인 이도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그에게서 시궁창으로 도망가더라도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가서 그를 뵙는 것만 같지 못하오."

 마침내 투자(投刺: 명함을 내밀고 면회를 요청하는 것)하여 장언택을 알현하고 말하였다.

 "편지를 올려 태위를 죽이라고 요청한 사람인 저 이도가 삼가 와서 죽기를 청합니다."

 장언택이 그를 기쁘게 접견하고 이도에게 말하였다.

 "사인께서 오늘 두려운 것이오?"

 이도가 말하였다.

 "저 이도의 오늘의 두려움은 역시 족하가 전에 두려워하던 것과 같은 것이지요. 저번에 고조로 하여금 저 이도의 말을 사용하게 하였더라면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장언택이 크게 웃으면서 명령하여 그에게 술을 마시게 하였다. 이도가 가득 채워 마시고 떠나가는데 마치 곁에는 아무도 없는 듯이 하였다.

 中書舍人李濤謂人曰:「吾與其逃於溝瀆而不免,不若往見之。」乃投刺謁彥澤曰:「上書請殺太尉人李濤,謹來請死。」〈李濤請殺張彥澤事見二百八十三卷高祖天福七年。〉彥澤欣然接之,謂濤曰:「舍人今日懼乎!」濤曰:「濤今日之懼,亦猶足下昔年之懼也。曏使高祖用濤言,事安至此!」彥澤大笑,命酒飲之。〈飲,於禁翻。〉濤引滿而去,旁若無人。〈李濤者,回之族曾孫,明辯有膽氣,固自有種。〉

 

 18일에 장언택이 황제를 개봉부로 옮기는데, 잠시라도 머무를 수 없자 궁궐 안의 사람들이 통곡을 하였다. 황제는 태후· 황후와 더불어 견여를 탔고 궁인과 환자 10여 명이 걸어서 좇았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황제는 내고에 있는 황금과 구슬을 모두 스스로 가지고 갔다.

 장언택이 사람을 시켜서 넌지시 말하게 하였다.

 "요황제가 도착하면 이 물건은 숨길 수 없습니다."

 甲戌,張彥澤遷帝於開封府,頃刻不得留,宮中慟哭。帝與太后、皇后乘肩輿,宮人、宦者十餘人步從。〈從,才用翻。〉見者流涕。〈亡國之恥,言之者為之痛心,矧見之者乎!此程正叔所謂真知者也。天乎,人乎!〉帝悉以內庫金珠自隨。彥澤使人諷之曰:「契丹主至,此物不可匿也。」

 

 황제는 그것을 모두 돌려보내고 역시 나누어서 장언택에게 보내니 장언택이 그 중에서 깅한 보화만 가지고 나머지를 봉해 두고서 요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장언택은 공학지휘사인 이균을 파견하여 군사로 황제를 지키게 하니 안팎이 왕래되지 않았다. 황제의 고모인 오지공주는 문을 지키는 사람에게 뇌물을 주고 들어가서 황제와 더불어 결별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

 황제와 태후가 요황제에게 올린 표장은 모두 먼저 장언택에게 보이고 그런 다음에 감히 발송되었다.

 帝悉歸之, 亦分以遺彥澤,〈遺,唯季翻。〉彥澤擇取其奇貨,而封其餘以待契丹。彥澤遣控鶴指揮使李筠以兵守帝,內外不通。帝姑烏氏公主賂守門者。,入與帝訣, 〈【章:十二行本「訣」下有「相持而泣」四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歸第自經。〈氏,音支。按薛史,烏氏公主,高祖第十一妹也。〉帝與太后所上契丹 主表章,〈上,時掌翻;下同。〉皆先示彥澤,然後敢發。

 

 황제가 내고에 있는 비단 몇 단을 챙기게 하자 주관하는 사람이 주지 않으면서 말하였다.

 "이는 황제의 물건이 아닙니다."

 또 이숭에게 술을 달라고 요구하자 이숭 역시 사양하고서 다른 이유를 가지고 올리지 않았다. 또 이언도를 만나려고 하였으나 이언도도 역시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황제는 슬퍼하기를 오래 하였다.

 帝使取內庫帛數段,主者不與,曰:「此非帝物也。」夕求酒於李崧,崧亦辭以他故不進。又欲見李彥韜亦辭不往。帝惆悵久之。〈當是時,晉朝之臣,已視出帝為路人,雖惆悵亦何及矣。惆,丑鳩翻。〉

 

 풍옥이 장언택엑 아첨하며 스스로 전국보를 호송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요에서 다시 임용해 주기를 희망한 것이다.

 초국부인인 정씨는 석연후의 어머니로 미색이 있었다. 장언택이 사람을 시켜서 그녀를 가지려고 하니 태후가 지연하며 돌려 넘겨주지 않자 장언택이 욕을 퍼부으며 즉시 그녀를 싣고 떠났다.

 馮玉佞張彥澤,求自送傳國寶,冀契丹復任用。〈亡國之臣,其識正如此耳。復,扶又翻。〉

楚國夫人丁氏,延煦之母也,有美,色彥澤使人取之,太后遲迴未與;彥澤詬詈,立載之去。〈詬,苦候翻,又許候翻。詈,力智翻。〉

 

 이날 저녁에 자언택이 상유한을 죽였다. 허리띠를 목에다 얹어놓고 요황제에게 '그가 스스로 목을 매었다.' 고 말하였다.

 요황제가 말하였다.

 "나는 상유한을 죽일 생각이 없었는데 어찌 이같이 하였단 말인가?"

 명령하여 그의 가족을 후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是夕,彥澤殺桑維翰。〈考異曰:薛史:「帝思維翰在相時,累貢謀畫,請與虜和,慮戎主到京則顯彰已過,欲殺維翰以滅口,因令張彥澤殺之。」按是時彥澤豈肯復從少帝之命!今不敢。〉以帶加頸,白契丹主,云其自經。契丹主曰:「吾無意殺維翰,何為如是!」命厚撫其家。

 

 고행주와 부언경은 모두 요의 아장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요황제는 양성의 싸움에서 부언경에게 패배하였기 때문에 그를 힐책하였다. 부언경이 말하였다.

 "신은 당시 오직 진주만을 위하여 힘을 다한다는 것만을 알았고, 오늘에는 죽고 사는 것을 오직 명령하실 뿐인빈다."

 요황제가 웃으면서 그를 석방하였다.

 高行周、符彥卿皆詣契丹牙帳降。〈二人自澶州來降。〉契丹主以陽城之戰為彥卿所敗,詰之。〈陽城之戰,見上卷上年。敗,補賣翻。詰,去吉翻。〉彥澤曰:「臣當時惟知為晉主竭力,今日死生惟命。」契丹立笑而釋之。〈符彥卿言直,契丹主無以罪也。為,于偽翻。〉

 

 23일에 석연후와 석연보는 아장에서부터 돌아왔고, 용황제는 황제에게 수조를 내리고, 또한 해리를 파견하여 황제에게 말하였다.

 "손자는 걱정하지 말고 반드시 너로 하여금 밥을 먹을 곳이 있게 할 것이다."

 황제의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 하였으며, 표문을 올려서 은혜에 감사하였다.

 已卯,延煦、延寶自牙帳還,〈還,從宣翻,又如字。〉契丹主賜帝手詔,且遣解里謂帝曰:「孫勿憂,必使汝有噉飯之所。」〈噉,徒濫翻。〉帝心稍安,上表謝恩。

 

 요에서는 헌납한 전국보가 갈고 다듬은 것이 정밀하지 않은데다 또 이전에 쓰인 역사와 서로 부합하지 않아서 그것이 참된 것이 아니라고 의심하여 조서를 가지고 황제를 힐책하고 진짜를 헌납하게 하였다. 황제가 주문을 올렸다.

 "근래에 왕종가가 스스로 불타 죽었는데, 구전국보는 있는 곳을 알지 못하는데, 반드시 그와 더불어 모두 탓을 것입니다. 이 보는 선황께서 제조한 것인데, 여러 신하들도 갖추어 압니다. 신이 오늘 어찌 감히 보를 숨기겠습니까?"

 마침내 중지하였다.

 契丹以所獻傳國寶追琢非工,又不與前史相應。〈追,都回翻。其文于與前史相應也。〉疑其非,真以詔書詰帝,使獻真者。〈李心傳曰:秦璽者,李斯之蟲魚篆也,其圍四寸。按玉璽圖以此璽為趙壁所,刻璧本卞和所獻之璞,藺相如所奪者是也。余嘗以禮制考之,璧五寸而有好,則不得復刻為璽,此說謬矣。秦璽至漢謂之傳國璽,自是迄于漢,帝所寶用者,秦璽也;子嬰所封,元后所投,王憲所得,赤眉所上,皆是物也。董卓之亂失之。吳書謂鯀堅得之洛陽甄官井中,復為袁術所奪,徐璆得而上之,殆不然也。若然,則魏氏何不寶用而自刻璽乎﹗厥後歷世皆用其名。永嘉之亂沒于劉石,永和之世復歸江左者,晉璽也。魏氏有國,刻傳國璽如秦之文,但秦璽讀自右,魏璽讀自左耳。晉有天下,又自刻璽,其文曰:「受命于天,皇帝壽昌。」本書輿服志乃以為漢所傳秦璽,實甚誤矣。此璽更劉聰、石勒,逮石祗死,其臣蔣幹求援於謝尚,乃以璽送江南,王彪之辯之,亦不云秦璽也。太元之末,得自西燕,更涉六朝,至于隋代者,慕容燕璽也。晉孝武太元大九年,西燕主永求救於郄恢,併獻玉璽一紐,方闊六,寸高四 寸六分,文如秦璽,自是歷宋、齊、梁皆寶之。侯景既死北齊辛術得之廣陵,獻之高氏。後歷周、隋,皆誤指為秦璽,後平江南,知其非是,乃更謂之神璽焉。劉裕北伐,得之關中,歷晉暨陳,復為隋有者,姚秦璽也。晉義熙十三年,劉裕入關,得傳國璽上之,大四寸,文與秦同,然隱起而于深刻。隋滅陳得此,指為真璽,遂以字文所傳神璽為非是。識者又謂古璽深刻,以印泥,後人隱起,以印紙,則隱起者非秦璽也,姚氏取其文作之耳。開運之亂,沒于耶律,女真獲之以為大寶者,石晉璽也。唐太宗貞觀十六年,刻受命璽,文曰:「皇帝景命,有德者昌,」後歸朱全忠,及從珂自焚,璽亦隨失。德光入汴,重貴以璽上之,云「先帝所刻」,蓋指敬瑭也。蓋在唐時皆誤以為秦璽,而秦璽之亡則久矣。今按,「石祗死」,當作「冉閔死」。李心傳之說與唐六典異,今並存之,以俟知者。及周,又製二寶,有司所奏,其說亦祖六典,詳註于後。詰,其吉翻。〉帝奏:「頃王從珂自焚,〈事見二百八十卷高祖天福元年。〉舊傳國寶不知所在,必與之俱燼。此寶先帝所為,〈事見二百八十一卷天福三年。〉群臣備知。臣今日焉敢匿寶!」乃止。〈焉,於虔翻。〉

 

 황제는 요황제가 하를 건널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태후와 더불어 앞길에서 받들어 영접하려고 하였는데, 장언택이 먼저 이를 아뢰니 요황제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유사에서는 또 황제로 하여금 옥을 입에 물고 양을 끌게 하며 대신들은 여친(輿櫬: 관을 실은 수레)하게 하고 교외에서 영접하게 하려고 하여 먼저 이주를 갖추어 요황제에게 아뢰니 요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기습군사를 파견하여 다만 대량을 탈취하게 하려는 것뿐이지 항복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帝聞契丹主將渡河,欲與太后於前途奉迎;張彥澤先奏之,契丹主不許。有司又欲使帝銜璧牽羊,大臣輿櫬,迎於郊外,先具儀注白契丹立,契丹主曰:「吾遣奇兵直取大梁,非受降也。」亦不許。〈降,戶江翻。〉

 

 또 조서를 내려서 진의 문무 여러 관리들은 모두 옛날과 같이 하고 조정의 제도도 나란히 한인의 예의를 사용하게 하였다. 유사시에는 법가를 갖추어서 요황제를 영접하려고 하였는데 요황제가 회보하여 말하였다.

 "나는 바야흐로 갑옷을 입고 군사를 통솔하는 사람이니, 태상의 의위는 시행할 겨를이 없소."

 모두 그것을 물리쳤다.

 又詔晉文武群官,一切如故;朝廷制度,並用漢禮。〈北方謂中國為漢。〉有司欲備法駕迎契丹主,契丹主報曰:「吾方擐甲總戎〈擐,音宦。〉太常儀衛,未暇施也。」皆卻之。〈用太常儀衛,則當改胡服而華服,故言未暇。〉

 

 이보다 먼저 요황제는 상주에 도착하여 바로 군사를 파견하여 하양을 향하여 경연광을 체포하게 하였다. 경연광은 별안간 도망하거나 숨을 곳이 없자 봉구에 가서 요황제를 알현하였다.

 요황제가 그를 힐책하며 말하였다.

 "두 명의 주군이 환영하는 모습을 잃게 된 것은 모두 네가 행한 짓이다. '10만 횡마검'이 어디에 있느냐?"

 先是契丹主至相州,即遣兵趣河陽捕景延廣。延廣蒼猝無所逃伏,〈不料其遽見捕也。先,昔薦翻。相,息亮翻。趣,七喻翻。〉往見契丹主於封丘。〈九域志:封丘縣在大梁北六十里。〉契丹主詰之曰:「致兩主失歡,皆汝所為也。十萬橫磨劍安在!」

 

 교영을 불러 서로 변증하게 하니 일이 무르 10개 조항이었다. 경연광은 처음에는 복종하지 않았지만 교영이 종이에 기록한 것을 가지고 그에게 말하며 보이자 마침내 자복하였다. 매번 한 가지 일을 자복하면서 번번이 하나의 투호살을 주었는데, 8개의 투호살을 받게 되자 경연광은 다만 얼굴을 땅에 묻고 죽여 달라고 요청하니 마침내 그를 쇠사슬로 묶었다.

 그믐 병술일에 백관들은 봉선사에 묵었다.

 召喬榮,使相辯證,事 凡十條。延廣初不服,榮以紙所記語示之,〈景延廣記其所言以授喬榮,見二百八十三卷天福八年。〉乃服。每服一事,輒授一籌。至八籌,延廣但以面伏地請死,乃鎖之。

丙戌晦,百官宿於封禪寺。〈迎契丹主也。封禪寺在大梁城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