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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유지원과 요의 침입/立冬節初候水始氷1日(陰10/3 開天節)己未.

solpee 2021. 11. 6. 17:18

《後晉紀5 齊王 開運 元年》〈甲辰· 944

 

 ㉓. 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말하였다.

 "폐하께서 북적을 방어하여 천하를 안정시키려고 한다면 상유한이 아니면 아니 됩니다."

  ㉓. 或謂帝曰:「陛下欲禦北狄,安天下,非桑翰不可。」〈請罷馮道,請用桑維翰,蓋出一人之口。前史謂維翰倩人以言於帝,通鑑皆曰「或」者,疑其辭。〉

 

 6월 6일에 다시 추밀원을 설치하고, 상유한을 중서령· 겸추밀사로 삼아 일에 크고 작은 것 없이 모두 그에게 맡겼다. 수 개월 사이에 차츰 다스려졌다.

 丙午,復置樞密院,〈罷樞密院見二百八十二卷高祖天福四年。〉以維翰為中書令兼樞密使,事無大小,悉以委之。數月之間,朝廷差治。〈治,直吏翻。〉

 

 

 ㉔. 활주에서 하를 터서 변· 조· 선· 복· 운 다섯 주의 경내를 물에 잠기게 하고 양산을 돌아서 문수에서 합류하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여라 도의 정부를 크게 징발하여 그곳을 막았다. 이미 막고 나자 황제는 그 일을 기록하여 비석에 색고자 하였다. 중서사인 양소검이 간하였다.

 ㉔. 滑州河決,浸汴、曹、單、濮、鄆五州之境,環梁山合于汶。〈梁山在鄆州壽張縣,汶水自東北來,與濟水會于梁山東北。今決河之水瀰漫,環梁山而合于汶。單,音善。濮,音卜。環,音宦。汶,音問。〉詔大發數道丁夫塞之。〈塞,昔則翻。〉既基,帝欲刻碑紀其事。中書舍人楊昭儉諫曰:

 

 "폐하께서 돌에 새겨 공로를 기록하는 것은 애통하는 조서를 내리는 것만 같지 못한데, 붓을 사용하여 미덕을 칭송하는 것이 자기를 책망하는 문장을 반포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좋게 여기고 중지하였다.

 「陛下刻石紀功,不若降哀痛之詔;染翰頌美,不若頒罪己之文。」帝善其言而止。

 

 ㉕. 애초에, 고조가 북쪽 요새의 땅을 분할하여 요에 뇌물로 주었는데(幽· 葪· 瀛· 莫· 涿· 檀· 順· 新· 嬀· 儒· 武· 雲· 凝· 寰· 朔州 그리고 蔚州 등 16州), 이일로 말미암아 부주 자사인 절종원이 역시 북쪽에 속하게 되었다. 요가 하서의 백성들을 모두 옮겨서 요동을 채우려고 하자 그 주에 사는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고 절종원이 이로 인하여 험요를 지키고 그들을 막았다.

 ㉕. 初,高祖割北邊之地以賂契丹,〈事見二百八十卷高祖天福元年。〉由是府州刺史折從遠亦北屬。〈府州領府谷一縣,後唐以麟州東北河濱之地置。宋白曰:府州本河西蕃界府谷鎮。土人折嗣倫,世為鎮將。後唐莊宗天佑七年,升鎮為府谷縣;八年,升建府州以扼蕃界,以嗣倫男從遠為刺史。折,姓;從遠,名。姓氏略:折,常列翻。〉契丹欲盡徙盡徙河西之民以實遼東,州人大恐,從遠因保險拒之。

 

 황제가 요와 관계를 단절하게 되자 사자를 파견하여 절종원을 타일러서 요를 공격하게 하였다. 절종원이 군사를 이끌고 깊이 들어가서 10여 성채를 점령하였다.

 18일에 절종원을 부주단련사로 삼았다. 절종원은 운주 사람이다.

 及帝與契丹絕,遣使諭從遠使攻契丹。從遠引兵深入,拔十餘寨。戊午,以從遠為府州團練使。從遠,雲州人也。〈歐史曰:折從遠,雲中人,蓋指古雲中大郡大界言之。

 

 ㉙. 8월 초하루에 하동절도사 유지원을 북면행영도통으로 삼고 순국절도사 두위를 도초토사로 삼고서 13명의 절도사를 감독하여서 요를 대비하게 하였다.

 ㉙. 八月,辛丑朔,以河東節度使劉知遠為北面行營都統,順國節度使杜威為都招討使,督十三節度以備契丹。

 

 상유한이 두 번이나 조정의 정권을 잡고 양광원과 경연광을 밖으로 내쳤는데, 이에 이르러 한 번 지휘를 통제하자 절도사 15명이 감히 어기는 사람이 없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의 담력과 지략에 감복하였다.

 삭방절도사 풍휘는 장문을 올려 아직 늙지 않아서 쓰임 받을 만하다고 진술하였으나 제서에는 누락되었다.

 桑維翰兩秉朝政,出楊光遠、景延廣於外,〈楊光遠、景延廣,先皆嘗總宿衛兵。天福初,桑維翰秉政,出楊光遠;是時再秉政,出景延廣。朝,直遙翻。〉至是一制指揮,節度使十五人無敢違者,〈劉知遠、杜威并十三節度為十 五人。按薛史載十三節度:鄆州張從恩,充馬步都監;西京留守景延廣,充都排陣使;徐州趙在禮,充都虞候;晉州安叔千,充左廂排陣使;前兗帥安審信,充右 廂;河中安審琦,充馬步都指揮使;河陽符彥卿,充馬軍左廂;滑州皇甫遇,充右廂;右神武統軍張彥澤,充馬軍排陣使;滄州王廷胤,充步軍左廂都指揮使;陝州 宋彥筠,充右廂;前金帥田武,充步軍左廂排陣使;右龍武統軍潘環,充右廂。〉時人服其膽略。

朔方節度使馮暉上章自陳未老可用,而制書見遺。

 

 상유한이 금직학사에게 조서를 내려서 답조를 쓰게하며 말하였다.

 "제서에서는 홀연히 잊은 것은 아니고, 실제로 삭방은 중요한 땅이니 경이 아니면 힘 있게 제압할 수 없소. 최근에 경을 내지로 옮기려고 하는데 대신 임명받을 사람도 역시 모름지기 기이한 재주가 있어야 하오."

 풍휘는 조서를 받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維翰詔禁直學士〈詔禁直學士者,以詔旨詔之也。禁直學士,學士之入直禁地者也。〉使為答詔曰:「非制書忽忘,〈忘,巫放翻。〉實以朔方重地,非卿無以彈壓。比欲移卿內地,〈比,毗至翻。〉受代亦須奇才。」〈「受」,當作「授」。〉暉得詔,甚喜。

 

 당시에 군사와 국가에는 일이 많아서 백관들과 사자들이 자문하고 요청하러 많은 사람들이 폭주하니 상유한이 일에 따라서 재결하면서 처음에는 생각을 거치지 않은 것 같아 사람들이 그가 소홀하고 간략하다고 의심하였지만, 물러나서 그것을 자세하게 논의하였으나 역시 끝내 바꿀 수 없었다.

 그러나 재상이 되어 자못 애정과 증오에 따라 처리하여 한 그릇의 밥에 대한 은혜와 눈 한 번 홀겼던 원망도 반드시 갚았으니, 사람들이 이를 가지고서 그를 작게 여겼다.

 時軍國多事,百司及使者咨請輻湊,維翰隨事裁決,初若不經思慮,人疑其疏略;退而熟議之,亦終不能易也。然為相頗任愛憎,一飯之恩、睚眦之怨必報,人以此少之。〈史稱桑維翰之長而併及其短,所以明是非,示勸警。睚,五懈翻。眦,士懈翻。少,詩照翻。〉

 

 요가 침입하면서 황제는 다시 유지원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산동(태행 이동)에 모이게 하였는데, 모두 기한이 지나 도착하지 아니하였다. 황제는 이를 의심하여 친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태원에서 특별히 짐을 돕지 않는 것은 반드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다. 과연 분수를 가지고 있다면 어찌 신속히 이를 행하지 않겠는가?"

 이에 이르러 비록 도통이 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임석하여 통솔할 권한이 없었고 은밀히히 큰 계책을 모의하였으나 모두 참여할 수 없었다.

 契丹之入寇也,帝再命劉知遠會兵山東,〈太原以河北之地為山東。帝初詔劉知遠自土門出恒州,尋又詔會兵邢州,並見上。〉皆後期不至。帝疑之,謂所親曰:「太原殊不助朕,必有異圖。果有分,何不速為之!」〈言若有分為天子,何不速為之。怒之之辭也。分,扶問翻。〉至是雖為都統,而實無臨制之權,密謀大計,皆不得預。

 

 유지원 역시 스스로 소외됨을 알고 다만 일을 신중히 하며 스스로 지킬 뿐이었다. 곽위가 유지원에게 걱정있는 기색을 보고 말하였다.

 "하동의 산과 내는 험하고 견고하며 풍속은 무예를 숭상하고 땅에는 전마가 많으며 조용하면 농사를 부지런히 하고 움직이면 군사 일을 익히니, 이는 패왕의 자산인데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知遠亦自知見疏,但慎事自守而已。郭威見知遠有憂色,謂知遠曰:「河東山川險固,〈河東治晉陽,東阻太行、常山,西限龍門、西河,南有霍太山、雀鼠谷之隘,北有鴈門、五臺諸山之險,故云然。〉風俗尚武,土多戰馬,〈此所謂侍險與馬也。〉靜則勤稼穡,動則習軍旅,此霸王之資也,〈王,于況翻。〉何憂乎!」

 

 ㊷. 요가 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입구하여쓴데, 노룡절도사 조연수가 군사를 이끌고 먼저 나아갔다. 요의 선봉이 형주에 도착하자 순국절도사 두위가 사자를 파견하여 샛길로 급한 상황을 보고하게 하였다.

 ㊷. 契丹復大舉入寇,〈復,扶又翻。〉盧龍節度使趙延壽引兵先進。〈契丹復以趙延壽為軍鋒。〉契丹前鋒至邢州,順國節度使杜威遣使間道告急。〈契丹前鋒已至邢州,恒州信使路絕,故間道而來。間,古莧翻。〉

 

 황제가 스스로 거느리고 그들을 막으려고 하였는데 마침 병이 나자 천평절도사 장종은· 업도유수 마전절· 호국절도사 안심기에게 명령하여 여러 도의 군사들을 모아 형주에 주둔하게 하고 무녕절도사인 조재례는 업도에 주둔하게 하였다.

 帝欲自將拒之,會有疾,〈將,即亮翻。〉命天平節度使張從恩、鄴都留守馬全節、護國節度使安審琦會諸道兵屯邢州,武寧節度使趙在禮屯鄴都。〈馬全節自鄴都進屯邢州,令趙在禮自徐州進屯鄴都為後鎮。〉

 

 요황제는 대군을 가지고 계속하여 도착하여 원지에 아장을 세웠다. 조정에서는 요의 강성함을 꺼려서 장종은 등에게 조서를 내려서 군사를 이끌고 조금 물러났는데, 이에 여러 군사들이 두려워하여 부오를 회복하지 못하고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지나는 곳에서 방화와 약탈을 하니 상주에 도착할 즈음에는 다시는 정돈할 수 없었다.

 契丹主以大兵繼至,建牙於元氏。〈元氏縣屬恒州。九域志:在州南九十八里。〉朝廷憚契丹之盛,詔從恩等引兵稍卻,於是諸軍恟懼,無復部伍,〈恟,計拱翻。復,扶又翻;下同。〉委棄器甲,所過焚掠,比至相州,不復能整。〈比,毗至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