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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唐의 멸망/霜降節 仲候草木黃落 4日(陰9/26)壬子

solpee 2021. 10. 30. 15:38

《後晉紀1 高祖 天福 元年》〈丙申, 936年〉

 

 ㊳. 부언요와 장언기가 하양에 도착하자 은밀히 후당황제에게 말하였다.

 "지금 호병이 대거 남하하는데 하의 수심도 앝으며 인심은 이미 떠나갔으니 이곳을 지킬 수 없습니다."

 ㊳. 符彥饒、張彥琪至河陽,密言於唐主曰:「今胡兵大下,河水復淺,〈復,扶又翻。〉人心已離,此不可守。」

 

 윤11월 22일에 후당황제가 하양절도사 장존간과 조주 자사 유재명에게 명령하여 하양의 남성을 지키게 하고 드디어 부량을 끊고 낙양으로 돌아갔다. 환자 진계민과 황성사 이언신을 파견하여 소신절도사 이찬화를 그의 집에서 죽였다.

 己(丁)〈【章:十二行本「己」作「丁」;乙十一行本 同;孔本同;張校同。】〉丑,唐主命河陽節度使萇從簡與趙州刺史劉在明守河陽南城,遂斷浮梁,〈斷,音短。〉歸洛陽。遣宦者奏繼旻、皇城使李彥紳殺昭信節度 使李贊華於其第。〈李贊華,契丹主之兄,故殺之。〉

 

 

 ㊴. 24일에 후진황제가 하양에 도착하자 장종간이 영접하며 항복하였는데 배와 노가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창성의 군사가 유재명을 붙잡아 가지고 항복하였는데, 황제는 그를 석방하고 그의 직책을 회복시키게 하였다.

 ㊴. 己卯,帝至河陽,萇從簡迎降,舟楫已具。〈唐主雖斷河梁,而萇從簡具舟楫以濟晉兵。降,戶江翻。〉彰聖軍執劉在明以降,〈彰聖軍蓋留戍河陽者。〉帝釋之,使復其所。

 

 

 ㊵. 후당황제가 마군도지히사 송심건· 보병도지휘사 부언요· 하양절도사 장언기· 선휘남원사 유연랑에게 명령하여 1천여 기병을 거느리고 백마관에 도착하여 싸울 곳에 갔는데, 50여 기병이 있다가 북군에게로 도망하였다.

 제장들이 송심건에게 말하였다.

 "어느 곳이건 싸울 수 없으니 누가 이곳에 서 있으려 하겠습니까?"

 마침내 돌아왔다.

 ㊵. 唐主命馬軍都指揮使宋審虔、步軍都指揮使符彥饒、河陽節度使張彥琪、宣徽南院使劉延朗將千餘騎至白馬阪行戰地,〈白司馬阪也,在洛陽北。史逸「司」字。行,下孟翻。〉有五十餘騎〈【章:十二行本「騎」下有「度河」二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退齋校同。】〉奔于北軍。〈此北軍謂晉兵從太原至河陽者也。〉諸將謂審虔曰:「何地不可戰,誰肯立於此﹖」〈言人心已離也。〉乃還。〈還,從宣翻,又如字。〉

 

 25일에 당황제가 또 네 명의 장수와 더불어 다시 하양으로 향할 것으 논의하였으나 장교들은 모두 이미 상황을 빨리 알고 진황제를 영접하였다.

 진황제는 당황제가 서쪽으로 도망갈 것을 염려하여 거람의 1천 기병을 파견하여 면지에서 꽉 조이게 하였다.

 庚辰,唐主又與四將議復向河陽,〈四將即謂宋審虔等四人。復,扶又翻。〉而將校皆已飛狀迎帝。帝慮唐主西奔,止契丹千騎扼澠池。〈澠,彌兗翻。〉

 

 26일에 당황제는 조태후· 유황후· 옹왕 이중미 그리고 송심기 등과 더불어 저눅보를 가지고 현무루에 올라가서 스스로 불태웠다. 황후가 땔나무를 쌓고 궁실을 불태우려고 하자 이중미가 간하였다.

 "새로운 천자가 오면 반드시 이슬을 맞으면서 살지 않을 것이니, 훗날 백성들의 힘을 거듭 수고롭게 할 것인데, 죽으면서 원한을 남긴다면 장차 어디에 이것을 쓸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중지하였다.

 辛巳,唐主與曹太后、劉皇后、雍王重美及宋審虔等攜傳國寶登玄武樓自焚。〈年五十一。宋審虔與唐主起事於鳳翔,親將也,故與之俱死。雍,於用翻。〉皇后積薪欲燒宮室,〈此皇后謂唐主劉皇后。〉重美諫曰:「新天子至,必不露居,他日重勞民力;〈重勞,直用翻。〉死而遺怨,將安用之!」乃止。

 

 왕숙비가 태후에게 말하였다.

 "사정이 급박하니, 의당 또 피하고 숨고서 고부를 기다리십시오."

 태후가 말하였다.

 "내 아들과 손자, 며느리가 한 조정에서 이에 이르렀는데 어찌 차마 홀로 살아남을 수 있겠소? 동생은 스스로 이를 힘써 주시오."

 숙비가 마침내 허왕 이종익과 더불어 구장에 숨어서 포획을 면하였다.

 王淑妃謂太后曰:「事急矣,宜且避匿,以俟姑夫。」〈太后,曹太后也。姑夫,謂帝也。皇后,曹太后之女,故王淑妃使之避匿以俟帝來。〉太后曰:「吾子孫婦女一朝至此,〈子,謂唐主;孫,謂重美;婦,謂劉后;女,謂唐主之女。〉何忍獨生!妹自勉之。」淑妃乃與許王從益匿於毬場,獲免。

 

 이날 저녁에 진황제가 낙양에 들어와서 옛 집에 머물렀다. 당의 군사들이 모두 갑옷을 벗고 죄 받기를 기다리니, 진황제가 그들을 위로하고 풀어주었다. 진황은 유지원에게 명령하여 경성을 맡기니 유지원이 진군을 나누어서 군영으로 돌아가게 하고 거란 군들은 천궁사에 묵게하자 성 안은 숙연하여 감히 법령을 어기는 사람이 없었다. 사민들 가운데 난을 피하여 숨었던 사람들이 며칠 동안 모두 돌아와서 본업에 복귀하였다.

 是日晚,帝入洛陽,止于舊第。唐兵皆解甲待罪,帝慰而釋之。帝命劉知遠部署京城,知遠分漢軍使還營,館契丹於天官寺,〈館,古玩翻。〉城中肅然,無敢犯令。士民避亂竄匿者,數日皆還復業。〈史言劉知遠之才略。〉

 

 애초에 진황이 하동에 있는데 당조에게 시기를 받아서 중서시랑· 동평장사· 판삼사인 장연랑이 하동에다 많은 것을 축적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며, 무릇 재부 가운데 응당 남겨서 이를 사용하여야 하는 것 이외에는 그것을 모두 거두어 빼앗았는데 진황이 이것으로 그를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初,帝在河東,為唐朝所忌,中書侍郎、同平章事、判三司張延朗不欲河東多蓄積,凡財賦應留使之外盡收取之,〈唐制:諸州財賦為三,一上供,輸之京師以供上用也;二送使,輸送於節度、觀察使府;三留州,留為州家用度。其後天下悉裂為藩鎮,支郡則仍謂之留州,會府則謂之留使。朝,直遙翻。使,疏吏翻。〉帝以是恨之。

 

 27일에 백관들이 들어와서 조현하였는데 오직 장연랑만을 체포하여 어사대에 넘기자 나머지는 모두 은혜에 감사하였다.

 29일에 거가가 궁궐로 들어와서 크게 사면하였다.

 壬午,百官入見,〈見,賢遍翻。〉獨收延朗付御史臺,餘皆謝恩。〈漢馮衍有言:在人惡其罵我,在我欲其罵人。晉祖初入洛而先收張延朗,不惟示天下以褊,亦非所以勸居官奉職者也。既誅又悔之,則無及矣。〉

甲申,車駕入宮,大赦:

 

 "응당 안팎의 관리들에게는 일절 묻지 않을 것이고, 오직 적신인 장연랑· 유연호· 유연랑만은 간사하고 사악하며 탐욕스럽고 함부로 하여 용서하기가 어렵고, 중서시랑 평장사인 마윤손· 추밀사인 방고· 선휘사인 이전미· 하중절도사 한소윤 등은 비록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속이며, 따르는 데에 힘쓰지 않았으므로 나란히 죄를 풀어주되 제명하고, 안팍의 신료들 가운데 먼저 귀순한 사람들은 중서문하에 맡겨 별도로 직임과 할 일을 덧붙여줄 것이다."

 「應中外官吏一切不問,惟賊臣張延朗、劉延皓、劉延朗姦邪貪猥,罪難容貸;中書侍郎,平章事馬胤孫、樞密使房暠、宣徽使李專美、 河中節度使韓昭胤等,雖居重位,不務詭隨,並釋罪除名;中外臣僚先歸順者,委中書門下別加任使。」

 

 유연호는 용문에 숨었다가 며칠이 지나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유연랑은 장차 남산으로 도망가려다가 체포되니 그를 죽였다. 장연랑의 목을 베엇는데, 그렇게 하고 나서 삼사사를 선발하였으나 그에 합당한 사람을 선발하기가 어렵게 되자 후진황제는 심히 이를 후회하였다.

 劉延皓匿於龍門,〈九域志:河南府河南縣有龍門鎮。〉數 日,自經死。劉延朗將奔南山,〈洛城之南山即伊陽諸山。〉捕得,殺之。斬張延朗;既而選三司使,難其人,帝甚悔之。

 

 민인들은 후당이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노왕의 죄는 천하 사람들이 아직 그것을 듣지 못하였는데, 장차 우리 임금을 어찌할꼬?"

 閩人聞唐主之亡,歎曰:「潞王之罪,天下未之聞也,將如吾君何!」〈史言閩人怨毒其君。〉

 

 

 ㊷. 당황을 추가로 폐출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㊷. 追廢唐主為庶人。